<최후진술> <신흥무관학교> <해적> 박정아 작곡가, 노력이 무르익는 시간
3월까지 벌써 박정아 작곡가의 네 작품이 공연됐다. 그중 세 작품이 이희준 작가와 협업한 것이다. 2008년 <사춘기>로 이희준 작가와 호흡을 맞추며 데뷔한 박정아 작곡가는 <마마, 돈 크라이> 이후 작년부터 올해 사이 세 작품이나 이희준 작가와 협업하고 있다. 이희준 작가와의 협업작 <최후진술>, <신흥무관학교>, <해적>의 제작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로 또 같은 호흡, 협업
이희준 작가와 협업한 <최후진술>, <신흥무관학교>, <해적> 세 작품이 동시에 공연되고 있다. 다른 작가와도 작업을 많이 했는데 이희준 작가의 특징이라면? 일단 음악을 잘 만들 수 있게 최소한의 대사를 주고 가사에 모든 드라마를 싣는다. 한 곡 안에서도 드라마가 굉장히 많이 변한다. 문학적이면서도 운율도 잘 아는 작가여서 음악으로 만들기 좋은 가사를 쓴다.
이희준 작가와는 <사춘기>(2008) 때부터 10년을 넘게 작업하고 있다. 경험이 쌓이면서 협업하는 방식에 차이가 생겼나? 이젠 대본을 보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 작업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비슷한데 시간이 줄어들었고 인간적인 친분이 쌓이다 보니까 좀 더 냉정하게 직설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둘 다 감정을 섞지 않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불필요한 감정 소모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24시간 일하는 체제가 됐다는 거. 생활 사이클도 비슷하고 해결되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이라 밤낮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둘의 호흡이 가장 잘 맞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전부. 호흡이 맞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오지 않고 그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최후진술>, <신흥무관학교>, <해적>까지 하면서 최상의 호흡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협업은 주로 어떻게 시작되나? 작가님이 간단하고 쿨하게 의뢰를 한다. 완성된 대본을 주나? 시놉부터 같이 개발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국 창작 여건에서는 작가와 연출이 이미 합의한 대본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그 의도를 잘 읽고 음악을 잘 얹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이 높다. 시놉부터 함께하면 장점도 있겠지만 난상 토론 시간이 많다. 대본을 읽으면 이건 작가가 단번에 쓴 가사다, 이건 고민이 많았구나, 이건 아직 해결하지 못했구나, 느낌이 온다. 단번에 쓴 가사부터 곡 작업을 한다. 이희준 작가님은 거의 완고를 보내주는데 “언제 공연할 건데 할 수 있겠어?”라고 문자가 온다.
<최후진술> 대본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대본 읽고 그런 적이 많지 않은데 굉장히 먹먹했다. 셰익스피어는 물론이지만 갈릴레오도 반 예술인이잖나. 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뇌와 삶의 방향성에 초점이 맞춰지더라. 작가님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대본을 굉장히 냉정하게 읽는 편인데 내가 지나온 시간을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해 눈물이 났다.
작가나 예술가 들이 공감하는 가사가 많았던 것 같다. ‘시인의 시간’이란 곡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들의 세례식인데 가기가 싫어 왜냐면 석양이 지고 있으니까. 가정을 이루고 일을 해왔는데 이 가사에 감정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최후진술> 대본 보고 작가님께 “할 이야기가 많으셨어요?” 했더니, “왜 가사가 많아?”라고 물으시더라. 사실 가사가 적을수록 곡 만들기는 좋다. 작가님은 군더더기 없는 가사를 주기 때문에 곡 만들기가 좋은데 <최후진술>은 다른 작품에 비해 가사 분량이 좀 많았다. 그래도 “아니요, 할 수 있어요” 했다.
흔히들 뮤지컬 음악은 곡은 다양하면서 하나의 색깔을 지녀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게 어렵고 애매한 말이다. 작곡가만의 색깔과 그 작품의 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희준 작가님과 작업할 때는 소극장 작품이라도 20곡 이상이 나온다. 대극장은 연주 음악까지 치면 40곡 가깝다. 작품 안에서 다양한 곡이 나오지 않으면 지루해진다. 뮤지컬 작곡가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들으라고 많이 하는데 나도 다양한 음악을 찾아 듣고 공부하는 게 일이다. 한 작품에 팝, 클래식, 재즈, 월드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이 안 들어갈 수가 없다. 작품의 통일성은 음악 장르의 통일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더 큰 틀에서 작품 전체적인 톤 앤 매너라고 생각한다.
콤비의 이름으로
<신흥무관학교>의 톤 앤 매너는 무엇이었나? 시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방향성이 명확한 작품이다. 인물들의 공감대가 있어야 해서 관객들이 들었을 때 바로 느껴지는 톤으로 작곡을 했다. 캐릭터마다 하나의 음악적인 톤을 잡고 그 톤을 다 모았을 때 튀지 않는 게 목표였다. 그러다 보면 멜로디건 화성이건 공통분모가 생긴다. 그것이 톤 앤 매너가 되는데 편곡을 할 때는 다양하게 들리게 했다.
소재에서 예상되는 애국적인 정서를 자제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작품 이야기를 나눌 때 육군과 제작사 측에서 트렌디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더라.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톤은 빗겨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을 철저하게 고증하면서도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게 목표였다.
개인적인 감상일지 모르지만 결국 가슴에 와닿는 부분은 비장한 노래더라. ‘죽어도 죽지 않는다’를 가장 많이 기억하긴 한다.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생겨서 작품이 끝날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가게 하는 게 목표였다. 단체로 온 군인들이 1막 끝나고 화장실 가면서 이 노래를 부르더라. 두 가지를 다 잡고 싶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16세에서 18세 정도의 어린 나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그들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애국심에 뭉클해지는 뮤지컬 넘버도 만들고 싶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국방부 작품이다 보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스타 캐스팅을 할 수 있었다. 창작 초연은 캐스팅이 정말 힘들다. 이 작품이 뭔지 모르고 보장되지도 않는다. 국방부 작품을 하다 보니까 일단 캐스팅에 관여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창작뮤지컬은 티켓 판매 걱정을 많이 한다. 제작사가 살아야 나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티켓 판매에 민감한데 <신흥무관학교>는 여는 순간 매진이 됐다. 10년 동안 한 마음고생을 보상받는구나 싶었다. 제작 일에 고민하지 않고 작품만 열심히 만들면 되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내 작품은 마니아성이 강해서 지방 갈 일이 없었는데 이 작품으로 원 없이 지방을 다녀봤다.
<해적>은 ‘노동요’가 굉장히 중독적이고 인상적이었다. 해적들 하면 노동요가 이미지로 떠오르잖나. 가사에 노래가 가야 하는 방향이 다 있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어때야 한다는 게 가사에 다 나와 있다. (노동요 가사 : 이 노래 참 쉬운 노래, 해적도 외우는 노래, 음치도 부르는 노래, 박치도 부르는 노래 …… 이 노래를 부르면 폭풍우도 무섭지 않고, 이 노래를 부르면 팔 잘려도 아프지 않아. 이 노래 신기한 노래, 꼬여도 말 되는 노래, 멜로디 맴도는 노래, 까먹지 못하는 노래) 대본 받고 작가님께 ‘노동요’ 가사대로 안 되면 어떡해요, 그랬더니 “잘 써야지” 하시더라. 엄청 스트레스 받았다. 네 번 정도 새로 썼다. 초등학생인 둘째랑 작가님한테 들려주었는데 네 번째까지 퇴짜 맞았다가 다섯 번째 곡에선 둘 다 오케이 해주더라.
<해적>도 그렇지만 <최후진술>이나 <신흥무관학교>에서 한두 곡 이상 귀에 꽂히는 노래가 있다. 일반인들도 뮤지컬을 보고 귀에 남는 곡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반응에 대한 생각은? 뮤지컬을 한두 편 작업했을 때였는데 한국 뮤지컬은 귀에 남는 곡이 없다는 말이 싫었다.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뮤지컬에서 아는 노래가 나올 때 내적 만족도가 크다. 창작 초연은 모르는 노래를 2시간 동안 들어야 하고 이야기나 조명, 의상 등 많은 정보를 쫓아가면서 봐야 한다. 굉장히 불친절하다. <오페라의 유령>은 물론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노래를 잘 썼지만 이미 여러 번 했고 노래가 여기저기서 정말 많이 나오지 않나. 이걸 비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창작이라도 귀에 남는 곡을 남겨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런 오기도 있었고 뮤지컬 음악은 드라마를 따라가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객들에게 좋은 느낌으로 어필해야 한다. 기억에 남는 좋은 멜로디를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나. 그런 곡을 쓰겠다는 목표는 있다.
<최후진술>의 ‘넘버원 팬’을 보면 “갈릴레오 갈릴레이~”라고 시작하는데 이 가사와 멜로디가 정말 잘 맞았다. 특히 말의 느낌이 강한 곡이다. 멜로디를 뽑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말을 다양하게 많이 읽어봤다. 한국어가 영어보다는 억양이나 악센트가 적어서 덜 음악적이다.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혼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이 읽어본다. 말의 음악적인 성질에서 노래로 발전하는 게 제일 자연스러워서 그런 방식을 많이 취한다.
<해적>은 남성, 여성 버전이 다르다. 키가 다를 텐데 어떻게 작곡을 하나? <해적> 기획 의도를 듣고 깜짝 놀랐다. 주제가 해적이어야 하더라. 해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깜짝 놀라게 된다. 되게 재밌겠다. 근데 소극장이다. “2인극인데 인물이 4명 이상이야. 남자가 해도 되고 여자가 해도 돼.” 그게 작품의 의도란다. <해적>은 소극장 사이즈가 아니라, 앞으로를 생각하고 만든 작품인데 인물의 수나 작품의 에너지가 크다. 남자 배우만 하거나 여자 배우만 하는 거라면 그래도 방법을 찾아보겠는데, 남녀가 출연하는 버전도 있어서 더 힘들다. 남자 배우가 할 때와 여자 배우가 할 때 키가 다르다. 각 키가 지닌 고유의 느낌이 있어서 조성을 선택할 때 그 느낌을 반영한다. <해적>은 남자 버전과 여자 버전, 심지어 남녀 버전을 고민해야 해서 곡을 쓰면서 무척 머리가 아팠다.
<해적>은 앞선 작품들에 비해 리프라이즈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프라이즈를 쓰는 걸 좋아한다. 바뀌는 맛을 좋아하는데 다른 작품에서는 저게 같은 노래인가 싶을 정도로 많이 바꾼다. <해적>은 리프라이즈를 크게 바꾸지 않고 비슷하게 가져갔다. 부르는 사람들이 달라지기도 하고 연극적인 장치도 많은 작품이다. 음악이 복잡하고 페어가 바뀔 때마다 음악이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어서 리프라이즈는 가급적 비슷하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의 노래가 고스란히 생각나야 감정이 쌓여서 더욱 슬퍼지는 그런 방식이 이 작품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 박정아 작곡가가 직접 들려주는 각 작품의 애정하는 곡 설명은 <더뮤지컬> 홈페이지(www.themusical.co.kr) 더뮤픽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7호 2019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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