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스타운>, 계속되어야 하는 사랑 이야기
고전 신화의 아름다운 변주
연극의 핵심은 이야기에 있다. 연극이 공연 장르로서 발달하기 시작한 까닭은 여러 세대를 거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전설이나 신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공연의 중심에는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고, 공연의 핵심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이다. 때문에 다양한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새롭게 전달하는 방법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 속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그리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오늘날 관객들의 현실에 맞게 전달한 뮤지컬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제73회 토니어워즈 14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기록적인 성과를 거뒀다.
<하데스타운>의 주요 등장인물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이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메신저로 죽은 자를 하데스에게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신이다. 그는 극 중 관객에게 필요한 부분을 설명해 주는 해설자 역할을 하며 등장인물과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인도한다. 저승의 신인 하데스는 이승에 잠시 올라왔다가 풍요와 출산의 신 페르세포네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해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풍요를 상징하는 신 페르세포네가 저승에서만 지낼 수는 없으니 일 년의 반인 봄과 여름은 이승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저승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한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어머니인 무사이 여신 칼리오페의 영향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졌으며, 그의 음악은 생물과 무생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르페우스는 님프인 에우리디케를 보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결혼 당일(이야기에 따라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으로 나오기도 한다)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구하러 저승으로 내려가고 그의 노래에 감동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단, 오르페우스가 앞장서고 에우리디케가 그의 뒤를 따르되 이승에 올라가기 전에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면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와야만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이 이야기의 비극적인 결말은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승에 거의 다다른 오르페우스는 결국 불안함에 뒤를 돌아보게 되고 그렇게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서 이승으로 향하던 에우리디케는 저승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슬픈 사랑 이야기 말이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역시 이 이야기를 기본 골격으로 하지만 조금의 변주를 했다.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는 저승으로 가는 어느 기차역에 있는 재즈 클럽을 연상시키는 곳이다. 오르페우스는 이 클럽에서 테이블을 치우는 말단 웨이터며, 에우리디케는 우연히 마을을 지나던 것으로 설정을 바꿨다. 그러나 <하데스타운>이 들려주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가 신화와 가장 다른 점은 에우리디케가 독사에게 물려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부분이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페르세포네가 이승으로 가 겨울이 오면, 오르페우스는 봄을 불러일으킬 역작을 쓴다. 이 와중에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에우리디케는 하데스의 초청을 받아들여, 자발적으로 하데스가 지배하는 저승으로 내려간다. 극 중 이승은 짧은 봄을 제외하곤 춥거나 더운 날씨 때문에 살기 어려운 각박한 곳(기후 변화로 인해 우리가 겪는 문제가 연상되는 지점이다)으로 묘사되는 반면, 저승은 춥지 않고 자유로운 곳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승에서의 자유에는 조건이 따른다. 춥고 배고프지만 인간성을 잃지 않은 채 살아 숨 쉴 수 있는 이승과 달리 죽음이 지배하는 공간인 저승은 쇳소리와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는 산업화 도시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설정은 저승에 간 사람은 누구든지 하데스와 계약을 맺는다는 점이다. 이 계약으로 하데스에게 영혼을 내어 준 사람은 허리를 펴지도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하데스의 노예로 영겁의 세월을 살면서 이승의 기억을 잊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하데스타운>의 저승은 인간성을 잃고 노예 계약을 맺을 무한한 자유를 허가해 주는 신자유주의 이율배반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와 그 색을 같이한다.
물론 하데스도 처음부터 이런 공간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세포네와 연애를 하던 시절,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구하려는 사랑에 빠진 오르페우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더 나은 무언가를 주고 싶어서, 혹은 그의 권력을 지키고 싶어서, 저승이라 정의되는 하데스타운의 영혼을 더욱 착취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듣고 페르세포네를 향한 사랑을 기억하게 된 하데스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놓아주기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하고 만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하데스뿐 아니라 저승에서 모든 영혼의 인간성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오르페우스를 따라 이승으로 향하는 에우리디케를 놓아준다면 두 사람뿐 아니라 다른 영혼들도 같이 하데스를 떠나게 될 상황이 펼쳐진다. 이 시점에서 하데스는 운명의 세 여신의 조언을 듣는다. 약속을 지키되 조건을 거는 것. 그리고 결국 모두가 알다시피 <하데스타운> 속 오르페우스는 이승에 가까워지자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를 잃고 만다.
반복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
그런데 <하데스타운>의 이야기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헤어지는 것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마치 대본에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헤르메스가 다시 무대로 나온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면서, 혹시나 또 한 번 더 이야기하게 된다면 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의미의 말을 하며, 첫 곡인 ‘Road To Hell’을 부른다. 이 곡을 통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처음처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공연은 끝을 맺는다. 다시 비극적인 결과가 반복된다고 해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혹은 희망과는 무관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구조는 그 자체로 현실의 부조리함에 대한 저항이자 예술가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오르페우스를 통해 이 작품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란 생각이 들게 했다. 작품에서 헤르메스는 이렇게 말한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조각난 세상을 어떻게든 회복시키고 싶어 했으며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고. 이것이 한낱 인간이었던 오르페우스가 신들에게 받은 선물이었다고. <하데스타운>의 창작자들도 오르페우스와 이 작품을 빌려 바로 이런 철학을 관객들과 나누고 있다.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하데스타운>의 저항적인 태도에 기립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오래 기간 완성되어 온 작품
올해 토니어워즈에서 무려 14개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이지만, <하데스타운>의 시작은 굉장히 검소했다. 인디 싱어송라이터인 아나이스 미첼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2006년 버몬트주에 있는 작은 동네의 소극장에서 시작됐다. 이것은 2010년 아나이스 미첼의 컨셉 앨범으로 이어졌고, 2013년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 대혜성> 연출가로 주가를 올리기 시작한 레이첼 차브킨이 합류했다. 그리고 이들은 2016년 뉴욕 시어터 워크숍에서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을 올렸다.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캐나다와 런던을 거쳐 2019년에야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것은 10년이 넘는 개발 과정을 통해 아나이스 미첼이 이 이야기의 묵직한 무게를 다듬어갔기 때문이다.
큰 나무가 있는 원형 무대 주위에 둘러앉은 관객을 앙상블처럼 활용한 오프브로드웨이 공연과 비교하면 현재 브로드웨이 공연은 확실히 상업적으로 발전했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동선에서 분리됐고, 배우들의 움직임은 더 체계적이고 복잡해졌다.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 청동빛의 무대는 다층 구조로 설치되어 오프브로드웨이의 무대에 비해 훨씬 더 압도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브로드웨이의 관객들은 확실히 수동적으로 공연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런던 공연부터 사용한 다중 회전 무대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데에 효과적이고, 이 공연이 지닌 순환적인 주제 의식을 시각적으로 잘 그려낸다. 앞서 잠시 썼지만, 레이첼 호크의 브로드웨이 무대는 뉴올리언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재즈 클럽을 연상시킨다. 공연이 시작할 때 무대 1층에 세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반원형의 무대를 둘러싼 계단을 올라가면 라이브 밴드가 자리 잡고 있다.
1막과 2막이 시작할 때 헤르메스와 페르세포네는 관객에게 일곱 명의 연주자로 구성된 라이브 밴드를 소개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작품과 관객이 멀어진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는 창작자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런데 구체화한 무대와 은유적으로 그려진 캐릭터 사이에서 그 시도는 그리 좋은 결실을 얻지 못한 듯싶다. 이런 불균형적인 캐릭터는 작품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헤르메스 역을 맡은 앙드레 드 실즈는 해설자로, 가이드가 되기에는 무대 위에서 존재감이 큰 느낌이었다. 물론 페르세포네나 하데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를 맡은 배우들은 훌륭하게 자신의 능력을 뽐냈다. 그러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무려 50년간 관객들을 만나온 앙드레 드 실즈는 그의 존재 자체에서 오는 카리스마로 전체적인 힘의 균형을 깨버렸다. 그러나 이번 리뷰에서 배우의 연기나 작품의 분위기를 언급하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다. 필자가 보러 간 날에는 페르세포네 역을 메인 캐스트인 앰버 그레이가 아닌 커버 배우 킴벌리 마라블이 연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좋은 작품인 것은 알겠는데, 공연이 꽤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앰버 그레이는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 대혜성>에서 피에르의 부인 일레인을 맡아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배우로, <하데스타운>에서는 2016년부터 하데스를 맡은 패트릭 페이지와 함께 고정으로 출연 중이다. 작품과 함께한 역사가 깊은 데다 그녀의 카리스마가 더해졌으니, 인터넷에서 본 그녀의 페르세포네는 정말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킴벌리 마라블은 앰버 그레이의 이런 에너지를 따라잡기에는 힘겨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공연을 보는 내내 전체적으로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술이 전하는 진정성
그럼에도 <하데스타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나이스 미첼의 음악과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연출된 몇몇 장면,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시의적절한 메시지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Wait For Me’라는 뮤지컬 넘버 장면으로, 이는 아나이스 미첼이 <하데스타운>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곡은 오르페우스가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에우리디케를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며 부르는 노래다. ‘Wait for me I am coming’이라는 후렴구와 함께 오르페우스가 회전 무대에서 움직이며 천장에서 긴 줄에 달린 조명이 내려온다. 앙상블 배우들이 이 조명을 위로 올렸다 놓으면, 조명은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가로등 불빛처럼 오르페우스의 움직임에 속도를 더해 준다. 또 ‘Why We Build The Wall’이라는 곡은 2006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 트럼프가 캠페인 메시지로 삼은 ‘국경 장벽’과 맞물려 저승을 넘어 현재 사회 문제를 깨닫게 해준다. 특히 낮은 음색의 패트릭 페이지가 ‘가난이라는 적을 물리치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벽을 짓는다고 노래하는 것은 그 불편한 의미가 독특한 음색과 만나 비참한 현실을 다시 주목하게 한다. 이 두 곡은 다른 어떤 곡보다도 작품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노래다. 이외에도 오르페우스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상기시키고 에우리디케가 떠나도 된다는 조건부 허락을 받는 ‘Epic’ 역시 그 음색이 슬프고 아름다워서 기억에 남는다. 또 공연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인 ‘Road To Hell’이나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길을 신명나게 부르는 ‘Way Down Hadestown’도 무대 연출과 앙상블의 조합이 좋았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하면서 부르는 ‘I Raise My Cup’은 페르세포네와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배우들이 함께 서서 이 노래를 부르고 공연이 막을 내리는 것은 <하데스타운>이 품고 있는, 예술과 예술가를 향한 애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브로드웨이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작품이 지닌 진정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을 사랑하고 만든다는 것의 가치를 아는 작품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브로드웨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직도 많이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9호 2019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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