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BEA> 백은혜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와 온도로 살아간다. 연기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속도와 온도에 스며드는 일이자, 그 배우만이 지닌 속도와 온도가 인물에 배어나 관객에게 스며드는 일이기도 하다. 연극 <비 BEA>는 공감에 대한 이야기다. 존엄사를 원하는 비(BEA)와 그의 어머니, 간병인을 통해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이 작품에서 병 때문에 8년째 침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비를 연기하는 백은혜. 배역의 옷을 벗고 온전한 자신으로 인터뷰에 임한 백은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문장을 이어 나갔다. 그가 나직하게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따스한 온도가 배어났다.
빛과 어둠 사이 그 어딘가
<비 BEA>에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전달하는 방식에 끌렸어요. 전체적으로 밝고 아기자기하게 풀어냈지만 인간 심리의 깊숙한 지점을 건드리는 면이 있더라고요. 비 역을 맡고 처음에는 존엄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접근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연습을 하면서 단순히 존엄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은 더 깊은 곳에 있었죠. 제가 다 말해 버리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극장에 와서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비를 연기하기 위해 참고한 자료가 있나요? 죽음과 존엄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는데, 가장 인상 깊게 본 건 <언레스트: 누워서 싸우는 사람들>이에요.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만성피로증후군이 비가 앓고 있는 미지의 병과 아주 비슷했거든요. 만성피로증후군에 걸린 환자는 결국 침대 생활을 면치 못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한대요. 하지만 원인이 불분명하다 보니 마음의 병으로 간주되어 꾀병이라는 비난을 받고, 치료법 연구도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우연히 이 다큐멘터리를 접하고 저희 작품과도 겹쳐지는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배우들에게 추천했어요.
비는 병을 앓고 있지만 명랑한 모습으로 등장하잖아요. 연기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네, 그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슬픈 얘기를 밝게 한다는 게 말은 쉽지만 몸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너무 밝아도 안 되고, 너무 어두워도 안 되고,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눈빛 하나, 목소리 하나도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죠. 제 목소리가 원래 좀 다크한 느낌이 있어서 목소리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어요.
김광보 연출님과 함께하는 첫 작업인데, 색다르게 느껴졌던 부분이 있나요? 연출님은 테이블 작업에 굉장히 오랜 시간을 투자하세요. 그리고 테이블 작업 때도 움직일 때와 동일한 호흡을 요구하시죠. 그 호흡이 완전히 몸에 익은 후에 움직이니까 더 자유롭더라고요. 테이블 작업이 진짜 중요하단 걸 새삼 느꼈어요. 또 연출님은 배우들에게 직접적으로 뭘 요구하신다기보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편이세요. 근데 그게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돼요. 연출님께서 제게 ‘비의 경험치가 어느 정도일 것 같아?’라고 물어보신 적이 있거든요. 질문을 받고 상상해 봤죠. 비의 실제 나이는 스물여덟이지만, 몸을 움직이면서 사회를 경험한 건 8년 전 일이잖아요. 그러니 보통 스물여덟 살과는 경험치가 다를 거예요. 하지만 그동안 침대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내적으로 성장했으니 보통 스무 살과도 다르겠죠. 스물도 스물여덟도 아닌 그 어디쯤에 있는 비. 그 점을 생각하고 연기하니까 같은 장면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아주 섬세한 연습이 이뤄지고 있어요.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우리는 모두 마음장님이야’를 꼽았던데, 그 이유가 뭔가요? 왜냐하면 제가 찔려서요. 제가 그렇거든요. 타인에게 너그러운 척하면서 실은 그렇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타인을 정의 내리는 그런 면이 제게도 있거든요. 관객분들도 그 부분에 공감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비가 이 대사를 말하기에 앞서 간병인 레이가 먼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자폐증 환자들을 마음장님이라고 불러. 왜냐면 그 사람들은 누군가의 마음에 대해서 말 그대로 장님이거든. 내 생각에 누구나 다 조금씩은 자폐기가 있는 것 같아.’ 저는 이 장면도 참 좋아요. 이런 얘기를 무게 잡지 않고 아주 가볍게 한다는 점이 좋아요. 그래서 그 내용이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다고 생각해요.
좋은 영향을 미치는 좋은 연기
성악과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뮤지컬에 뛰어들게 되었나요? 성악과에 들어가긴 했지만 속으로 오페라는 나와 안 맞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뮤지컬은 어떨까 막연히 생각해 보았는데, 마침 저희 학교를 졸업한 배우 문희경 선생님께서 학교에 특강을 오신 거예요. 그때 처음 인사를 드리고 당시 선생님이 출연하셨던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보러 갔죠. 그 인연으로 같은 공연의 바실리아 역으로 데뷔하는 기회를 얻었어요. 그때 저는 겨우 대학교 1학년이었죠. 이제와 돌이켜보니 운명적인 힘이 저를 뮤지컬 배우의 길로 훅 떠민 것 같아요.
지난 13년 동안 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변화가 있었나요? 데뷔 전까지 연기를 배워본 적이 없으니 처음에는 정말 서툴렀어요. 대신 정말 열심히 했죠. 잘은 아니고 열심히! 제가 뭐 하나에 꽂히면 굉장히 열정적이거든요. 근데 배우로서 경력이 쌓일수록 느끼는 건, 공연이라는 건 나 혼자 힘주어 당긴다고 해서 움직이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내가 다른 배우들을 잘 받쳐줬을 때 그 배우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좋은 공연이 완성된다는 걸 배우고 있어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제가 기도했던 내용은 이래요. 언젠가는 나를 통해서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생각에 잠기고, 위로받는, 그런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 이제는 제가 실제로 그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난쟁이들> 같은 경쾌한 코미디에서 주로 참여했는데, 최근에는 <베르나르다 알바>, <섬: 1933~2019> 같은 묵직한 작품들로 스펙트럼이 부쩍 넓어진 느낌이에요. 주변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요. 밝아 보이는데 슬픔이 있다고. 제가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나만 아는 줄 알았는데?” 그랬더니 “야, 다 알아”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그런 인상 덕분에 또 다른 기회를 얻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코미디도 여전히 사랑합니다.
목소리 프로젝트의 음악극 <태일>과 <섬: 1933~2019>에 연달아 출연했는데,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거예요? 다들 제가 창작진과 전부터 친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태일>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이분들을 만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오디션을 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이 온 거죠. 나중에 들었는데, ‘태일 외 목소리’ 역할에 어떤 배우가 어울릴지 창작진 마음속에 어떤 선택 기준이 있었대요. 당연히 태일 역 배우와 잘 맞아야 하고, 일인 다역을 잘 소화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밖에 쑥스러워서 제 입으로 말하기는 힘든 이런저런 기준이 있었는데 제가 그 기준에 맞다고 판단하셨나 봐요. <섬: 1933~2019> 때는 박소영 연출님이 이런 말로 절 꼬셨어요. “굉장히 힘든 작업이 될 거야. 근데 너라면 아주 잘할 거야.” 대본을 받아 보고 “뭐야, 쌈닭이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하고 소리치긴 했지만(웃음) 실은 같이 하자고 해주셔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목소리 프로젝트는 귀감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공연을 만들잖아요. 그런 멋진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섬: 1933~2019>이 힘든 작업이었던 이유는 뭔가요?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1966년의 마리안느와 발달 장애아를 돌보는 2019년의 고지선을 오가며 연기하는데, 의상을 갈아입듯 마음도 퀵 체인지를 하는 게 어려웠어요. 재빨리 역할을 바꾸는 동시에 각 인물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야 하니까요. 특히 고지선을 연기하는 게 어려웠어요. 예민한 지선이를 연기하다 보니 저도 같이 예민해져서 처음으로 공연하면서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했죠. 박소영 연출님은 2019년의 이야기가 다른 시대와 달리 다큐멘터리 느낌을 주길 바라셨어요. 다큐멘터리 같은 생생함을 살리려면 그때그때 상대 배우의 호흡을 이어받아 불꽃 튀는 화학 작용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죠. 배우들이 너무 익숙해진 것 같으면 연출님이 목표를 다시 상기시켜주셨어요.
고지선의 이야기에 비하면 마리안느의 이야기는 아주 잔잔했어요.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이야기는 1933년 백수선의 이야기와 2019년 고지선의 이야기 사이에 낀 작은 섬 같아요. ‘이게 어떻게 마리안느와 마가렛에 대한 공연이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는 이 구조 자체가 마리안느와 마가렛답다고 생각했어요.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중간에서 딱 중심을 잡아주는 거. 실제로 그분들은 자신을 위해 무언가 남기려고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래서 마리안느를 연기할 때 너무 힘주지 않고, 그 삶을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보여주자 마음먹었어요. 그분들도 저희가 이렇게 하길 바라셨을 것 같아요.
최근 드라마 <녹두꽃>에도 출연하셨잖아요. 어떻게 캐스팅된 건가요? 신경수 감독님이 2014년 제가 출연한 연극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를 보러 오신 게 시작이었어요. 이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의문의 일승> 때 저를 불러주셨고, 이번 <녹두꽃>에서 처음으로 긴 호흡의 역할을 맡겨주셨죠. 저는 늘 공연을 통해 드라마 출연 기회를 얻었어요. 처음 출연했던 드라마도 2009년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보셨던 분이 캐스팅해 주신 거였죠. 앞으로도 좋은 작품이라면 뮤지컬이건, 연극이건, 드라마건 가리지 않고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배우 생활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어디가 어딘지 방향도 모르고 뛰었는데, 그런 것치고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워낙 어릴 때 데뷔해서 시행착오가 많았거든요. 20대 후반에는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많은 사람에게 노출하게 됐을까?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싶다’ 생각하며 괴로워하기도 했죠. 혼자서 막 이불 킥하고. (웃음)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주변에서 인도해 주는 대로 걸어왔다면 이제는 나 스스로 어디로 갈지를 잘 판단해서 걸어야겠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시행착오가 있을 테고, 세월이 지나 이 순간을 돌아보며 같은 후회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좋은 사람,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거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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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비 BEA> 백은혜,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 [No.192]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2019-09-28 7,268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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