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을 위한 주술사
지난해 경기도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고선웅이 송년에 어울리는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가 천사의 도움으로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족과 친구들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줄거리의 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1946)>을 무대로 옮겼다. 예쁘게 차려진 크리스마스 만찬처럼 풍성한 휴먼 드라마가 고선웅의 손끝에서 어떻게 요리되어 나올지 미리 차림새를 그려보았다.
원작이 오래된 영화더라고요. 동화 같은 이야기라 고선웅 연출에게 들음직한 이야기 같지는 않았어요. 영화 보고 정말 감동받았어요. 한때 각색은 안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단박에 그 룰을 깰 만큼 좋았어요.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디테일이 굉장히 살아 있고 이야기가 정말 훌륭했어요. 제가 마흔을 앞두고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며 아슬아슬한 시기를 보낼 때, 마침 제게 인연처럼 다가온 작품이었죠. 내가 이 작품을 각색해서 잘 해내면 좋은 덕담을 들은 듯한 힘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5년이 흐른 후에 경기도립극단에 와보니, 이 작품이 이 극단과 정말 잘 어울리는 거예요. 작품이 인연을 만나면 빛을 발하듯이 반짝 하더라고요.
작품과 극단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셨다고요? 어떤 작품을 보면 이건 이 극단에 어울리겠다, 또는 이 사람이 주인공을 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을 알게 되면 그들과 어떤 작품을 함께하면 좋겠다는 느낌이 와요. 사람들을 알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정하고 그들을 작품에 맞춰 넣으면 균열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배우들에 맞춰서 작업을 하면 결국 제가 원했던 결과물이 나오고요. 작품이 인연을 만나면 잘 풀리는 것 같아요. 경기도립극단의 배우들은 연령 대가 다양해서, 젊은이부터 60대까지 등장해 인생을 예찬하는 이 작품에 잘 맞죠. 출연자만 마흔 명 정도니 공연이 볼만할 거예요. 보통의 제작사에서 쉽게 덤빌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송년 뮤지컬로는 제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크리스마스이브에 사업 부도에 낙담해 자살하려는 주인공 앞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로 하여금 ‘내가 이렇게 잘 살아왔구나’ 하고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가 정말 감동적이거든요. 원작이 발표된 지 이미 65년이 지났는데, 현재에도 유효한 감동을 준다면 그 이야기는 다시 해볼 만하죠. 요즘 화려하고 자극적인 작품은 워낙 많지만,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이 있어요.
송년 시즌에 딱 맞는 이야기로군요. 올해 12월에 안산에서 이틀, 수원에서 이틀밖에 공연하지 않아요. 무척 아깝죠. 잘돼서 송년 레퍼토리로 자리 잡으면 좋겠어요. 한 해의 열두 달이 모두 중요하지만 12월은 특히 그래요. 한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 때라, 저도 살아보니, 그 시기를 보내는 게 녹록치 않더라고요. 분주한 연말에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다음 해를 준비할 수 있을 텐데, <원더풀 라이프>가 든든한 가이드가 될 거라고 확신해요. 인생이 다 그저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올해에 제가 경기도립극단에서 <4번 출구>와 <늙어가는 기술>, <원더풀 라이프>를 차례로 선보이는데, 우리 극단과 함께 삶과 인생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그 많은 이야기들은 삶과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건가요? 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나를 움직이게 해요. 그렇지 않고 일상에 함몰되면 이야기가 샘솟지도 않죠. 사랑과 관심이 없는데도 사랑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건 너무 고단하고 지치는 일이잖아요.
인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는 조금 식상하고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진부함이 갖고 있는 미덕이 좋더라고요.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해갈수록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어떤 형식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느냐에 대해서 고민하게 돼요. 예전에는 재미있고 인상적인, 눈길을 사로잡는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다면 지금은 눈에 띄진 않지만 뒤에서 밀고 나오는 힘이 있는 작품이 좋더라고요. 철이 드나보죠. 이 작품도 정말 뻔하고 촌스러운 플롯을 가지고 있지만 ‘맞아, 한 사람이 없다면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요. 요즘 뉴스를 보면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삶에 대한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져서, 그 화를 세상에 푸는 거예요. 그런 시대에 6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통해서 내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죠.
그런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가장 중점을 두고 하시는 일은 뭔가요? 무엇보다도 참여하는 스태프와 배우들이 인생을 멋지다고 느껴야 해요. 그래야 그들의 에너지가 관객에게도 전달될 거예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원더풀 라이프’는 가짜예요. 관객에게 말하기 전에 배우, 스태프가 먼저 공감해야죠. 그래서 많이 칭찬하고 독려해요. 우리 극단 배우들이 뮤지컬을 소화하는 능력이 조금 부족할 순 있지만 여느 뮤지컬 배우들보다 훨씬 풍부한 감성을 전달할 수 있는 섬세함과 연륜이 있어요. 젊은 두 작곡가가 만든 음악도 무척 좋고요.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어떤 감동을 받길 바라세요? 인생이 정말 멋진 선물이구나, 즐겁게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인생은 고해니 하는 비관적인 정서는 원치 않아요. 천사가 등장해서 우리의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어땠을지 보여주고 주인공이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는 거, 낡고 녹슨 판타지잖아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향수가 송년 시즌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고요. 지금 우리가 잊고 사는,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확신해요. 인생에서 깨달음은 바로바로 얻을 수 없는 거거든요. 기다려야 하고 더디 오고…. 인연이 올 때까지 참고 머물러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이 길로 가기 위해서는 빙 둘러서 가야할 때도 있고. 살아보니까 인생이란 게 저렇게 흘러가는구나, 즐겁게 살자, 그렇게 생각하면 좋죠.
연출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끊임없이 그렇게 최면을 걸죠. 살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때도 있잖아요. 쉽지 않지만 계속 스스로에게 말해요. 인생은 위대한 선물이라고. 오늘도, 내일도, 글피도 그렇게 매일 최면을 걸면 일 년 내내 그런 생각으로 살게 되는 거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9호 2011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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