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투쟁; 예술가 편> 이연주 · 김지수
연결과 연결
“어떤 사람이 지나가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연극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이연주 작가 겸 연출가가 선보이는 신작 <인정투쟁; 예술가 편>의 대본 첫 장에는 피터 브룩이 남긴 연극에 대한 정의가 적혀 있다. 2017년 두산연강예술상 공연 부문 수상자에 선정돼 극단 애인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게 된 이연주의 이번 연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찰나에 시작된 인연
두산아트센터에 장애 예술가 분들이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번 공연을 구상하게 되셨는지요.
이연주_ 재작년에 두산아트센터에서 상을 받아 신작을 올릴 기회를 얻게 됐어요. 그런데 수상자 자격으로 올리는 작품이다 보니 아무래도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순 없더라고요. 어떤 작품을 할지 꽤 많은 고민이 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연극이란 장르 자체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어요. 사실 저한테 연극은 삶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만들게 되는 거였지, 연극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고민은 별로 안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업을 준비하면서 불쑥 ‘연극을 왜 계속 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왜냐면 최근 몇 년 사이 연극계에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잖아요. 그 중 어떤 문제들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부터 이미 연극계에 알려져 있던 내용들이었던 터라, 왜 우리는 당시에 그 문제를 고쳐나갈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우리는 그런 문제들 가운데서도 한 번도 공연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연극인들은 다들 그렇게 연극이 싫다고 하면서 왜 계속 연극을 하는 걸까. 다양한 층위의 질문들이 저를 계속 찾아왔고, 그 고민 끝에 극단 애인과 함께 신작을 올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어요. 어떤 이야기로든 극단 애인과 작업해보잔 마음이었죠.
김지수 대표님께서는 이연주 연출님께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떠셨나요.
김지수_ 당연히 깜짝 놀랐죠. 아니, 저희랑요? 왜요? 이게 제 첫 반응이었어요. (웃음) 공연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게 지난 1월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어떤 작품을 할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그래도 그냥 되게 감사했어요. 저희 단원들도 굉장히 기뻐했고요. 연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신작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았을 텐데 저희랑 같이 뭔가 해보자는 이야기를 해주신 거잖아요. 물론 저희 단원들 역시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해보자고 했어요. 꼭 신작이라서가 아니라 이연주 연출님과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저희한테는 좋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극단 애인 창단 때부터 함께 작업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김지수_ 2007년 극단 애인을 창단하기 전에 다른 극단에서 2년 정도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연출님께서 스태프로 그 극단 공연 티켓 판매를 담당하셨는데 장애 배우들을 대신해 많은 역할을 해주셨죠. 저한테는 그때 공연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서 연출님께 농담 삼아 나중에 제가 극단을 만들면 저희 작품 연출을 맡아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웃음)
이연주_ 대표님께서 예전에 계셨던 극단과 협력 관계였던 산이라는 비장애인 극단이 있었는데, 당시 제가 그 팀 소속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딱 한 작품에서 서로 마주쳤던 인연으로 극단 애인 창단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저도 극단 애인과 관계 맺음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첫 작업 이후 십 년 넘게 꾸준히 함께 작업을 해오셨는데, 어떤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요.
김지수_ 사실 어떻게 보면 저희 극단은 초창기부터 지금 공연 제목처럼 인정 투쟁을 했던 것 같아요. 물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극단을 꾸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극단은 관객 없이는 존재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데 창단 공연이나 10주년 공연 같은 중요한 투쟁의 과정마다 연출님께서 함께해주셨으니까 정말 감사하죠. 저희 단원이 처음으로 연출을 맡았던 작품도 연출님께서 대본을 써주셨어요. 각자 영역에서 활동하다 연출님하고 좋은 작업으로 다시 만날 때마다 참 좋은 자극이 됐어요. 저희도 더 열심히 성장해야겠고 생각했죠.
이연주_ 아마 대표님께서 민망하셔서 극단 이야기를 많이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애인은 창단 때부터 장애인 배우 전문 극단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했어요. 어떻게 하면 연극을 잘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이 초창기 극단 애인의 첫 번째 화두였죠. 저 또한 그때 연극을 시작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저희 두 사람의 인연은 연극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시작된 게 아닐까 싶어요.
김지수_ 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는 마음으로 작업했던 게 저희 극단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 같아요. 장애가 있는 신체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배우로서 더 표현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노력했던 것도 저희의 힘이었고요. 그런데 하나 조심스러운 부분은 사실 서울만 하더라도 굉장히 많은 장애인 극단이 있거든요. 조금씩 스타일이 다른 다양한 성격의 여러 극단들이 활동하고 있고, 그 가운데는 활동 기간이 10년이 넘은 단체들도 많아요. 그런데 저희가 자주 언급되는 게 조금 부담스러운 거죠. 다른 극단들도 최선을 다해 좋은 작품을 올리고 있으니까요.
연극을 향한 공통된 마음
연출님께서는 극단 애인과의 작업 초기에 장애 예술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 가셨나요.
이연주_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장애 예술 관련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제 기억으론 <한국 연극>에서 해외 장애 예술에 대해 다룬 적이 한 번 있는데, 그 외에는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죠. 특히 국내 사례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 저희끼리 무대에서 어떻게 우리만의 미학을 살려낼 수 있을지 이렇게 저렇게 다 시도해봤던 게 나중에는 저희 작업에 더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그때 저희가 참고할 만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 애인 고유의 연극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거든요. 주위 사람들한테 장애인 배우들은 특별히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작업 초기에는 신체적인 특성을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장애인 배우만의 특성이 따로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장애인 배우든 비장애인 배우든 사람은 개개인의 개성이 다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 사람만이 지닌 고유함을 어떻게 작품과 만나게 하느냐가 연출가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십 년 넘게 극단을 꾸려오면서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김지수_ 기억에 남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웃음) 2012년과 2015년에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라는 작품을 공연했을 때, 그때 작업들이 기억에 남아요. 작업 과정에서 단원들 스스로가 정체성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거든요.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도 그 사회의 역사잖아요. 한 사람의 삶이 곧 사회의 역사라는 걸 그 작품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는 극단 초기 작업들이 나라는 개인에서 출발했다면 그걸 조금 더 확장해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도록 생각하게 한 작품이에요.
이연주_ 저도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를 준비할 때가 가장 많이 생각나요. 단원 분들이 직접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기록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던 건데, 누군가의 삶을 알게 된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그때 알게 됐어요. 당시에 접근성이 좋지 않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이유는 우리의 존재를 계속 밖으로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식했다 싶죠. 배우 분들이 불편한 상황에서 공연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공연 막바지에 관객들이 서서 관람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가득 찬 객석을 바라볼 때 기분이 무척 묘했어요. 소극장이라 객석 규모가 백 석 정도 밖에 안 됐지만, 저희한테는 특별한 경험이었죠. 그리고 공연을 보러 오신 단원 가족 분들이 보여주신 격렬한 반응도 잊을 수 없어요.
이번 <인정투쟁>은 연극 작업을 왜 계속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다고 하셨는데, 대본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예술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깊은 고민이 느껴졌어요. 이번 작업을 통해 고민에 대한 답을 찾게 되셨나요.
이연주_ ‘내가 왜 계속 연극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은 정말 끊임없이 찾아와요. 어떤 사회 문제를 마주하게 되거나 제 작업에 대한 답을 찾을 못 했을 때 같은 별별 이유로 제 안에서 질문이 계속 되죠. 심지어 좋은 작품을 보면 그냥 관객으로 존재하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웃음) 사실 우리나라 여러 예술 지원 정책을 보면 우리가 예술의 본질적인 부분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연극을 이야기할 때 ‘대중성’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 데 이때 대중성이 진짜 의미하는 게 뭘까 물음표가 생기는 거죠. 그런 대중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장기적인 계획이 아닌 단기적인 목표를 갖게 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도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자극도 많이 받고 다시 나아갈 동력을 얻은 것 같긴 해요. 저한테 많은 공부가 됐죠.
공연은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그래도 이번 작품이 이렇게 비치진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게 있으세요?
이연주_ 재미없게 비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웃음) 관객 각자에게 맞닿아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다가갈 수 있을까. 이게 가장 고민이에요. 제목은 <인정투쟁; 예술가 편>이라고 지었지만, 관객 분들이 공연을 보면서 ‘무대 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구나’ 하고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이야기가 관객 분들 삶의 어떤 순간들과 연결될 수 있었으면 좋겠죠. 사실 제가 지금까지 작업을 하면서 결국 하고 싶었던 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작품들에 사회 구조 속에서 서로가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담아내고 싶어요. 이번 작품은 예술가 이야기라는 설정에서 시작됐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극장 특성상 장애 예술에 대해 잘 몰랐지만 공연을 좋아해서 보러 오는 관객들도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김지수_ 아뇨, 따로 전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어떤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실 진 모르겠지만, 어떠한 생각 없이 극장에 오시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요. 이럴 것이다 또는 저럴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공연을 보러 오시면, 오히려 그 부분만 보일 수 있잖아요. 특별한 생각 없이 그냥, <인정투쟁; 예술가 편>이라는 공연을 보러오셨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4호 2019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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