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
우리는 왜 극장에 모여야 할까
공연과 극장
코로나19가 가라앉기는커녕 또다시 번지는 요즘 공연을 보러 간다고 하면 열에 일곱한테는 잔소리를 듣는다. 이럴 때 꼭 공연을 봐야겠냐고, 감동을 나누려다가 바이러스를 나누면 어쩔 거냐고, 나중에 세월 좋아지면 그때 보라고, 핀잔 섞인 걱정에 할 말은 없다. 입 꾹 다물고 조용히 마스크를 쓰는 수밖에. 이제 극장은 위험한 곳이 되어버렸다. 전염병 때문에 극장이 폐쇄되고 공연이 금지됐던 몇백 년 전의 역사가 지금 여기의 현실이 될 줄이야. 국공립 극장의 개막 일정은 또 다시 묘연해졌고 브로드웨이 극장들은 꽤 오랜 시간 문을 닫을 거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연극은 페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백 년 전 어느 연출가의 선언은 20세기 공연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멋진 은유였지만 이게 현실이 되니 상황은 난감할 뿐이다. 지금의 공연은 코로나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선의 양상은 다양하다. 효율적이기 위해서 영상화나 스트리밍 등 매체 중심의 접근이 시도되었고, 안전하기 위해서 극장에서의 공연을 최소화하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수도 드러났다. 서울시의 소극장 운영 지침을 보시라. 소극장에서는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2미터 이상 확보하면서 객석을 띄엄띄엄 배치해서 관객 숫자를 삼분의 일로 줄이는 거리 두기를 적용하란다. 극장의 전체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안다면 이런 대책은 차마 말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따지면 그 좁은 소극장에서 아무리 거리를 둬봤자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한 자리 건너앉아도 어차피 밀폐된 공간인 건 똑같은데? 객석의 간격이 넓어지는 만큼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은 결국 공연인 만큼 관극하기엔 편해도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일 뿐이다. 그 밑에는 더 본질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코로나 시대를 돌파하려는 모든 시도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다. 관객과 무대가 함께하는 공간으로서 극장의 개념을 해체하기. 관객을 앉히지 않는 객석을 늘리는 것이나 극장에 오지 않아도 공연을 볼 수 있는 방법을 다각화하는 시도 등에서 보게 되는 사실은 하나다. 더 이상 극장은 관객에게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사실. 포스트코로나의 국면에서 공간의 개념은 연결의 효율로 대체되고 있다. ‘그럼에도 왜 굳이 극장이어야 할까.’ 극장이라는 당연한 전제는 이제 진지한 질문이 되었다. 영상만큼 선명하지도 않고 스트리밍만큼 편리하지도 않은데 마스크를 잔뜩 올려 쓰고 두 시간도 훨씬 넘게 객석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면 공연은 그래야 할 만한 분명한 이유를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뮤지컬 <렌트>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기에 좋은 재료다.
낡은 것과 오래된 것
<렌트>는 퓰리처상으로 검증된 뮤지컬의 고전이지만 다른 고전 작품처럼 편안하게 즐기기엔 생각 밖으로 쉽지 않은 작품이다. 일단 동성애, 마약, 에이즈 등등 소재의 시의성이 꽤나 분명하고 배경이나 상황 역시 적잖이 미국적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선명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특정한 시공간에 갇혀버릴 때도 있다. 1990년대 뉴욕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에서 소재의 유효 기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게다가 노래로 전달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일목요연하기보다는 산발적이기에 그만큼 생동감이 넘치지만 한 번에 포착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 말에 깔린 의미를 알아채서 인물들의 사연과 관계를 그려내려면 미리 예습을 하는 게 낫다. 처음 보는 관객에게 이 작품은 그다지 친절한 작품이 아닌 거다. 매번 공연될 때마다 ‘잘 들리지 않는다’는 관객의 의견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공연의 문제라기보다는 작품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이번 공연 역시 이런 특성의 함정을 잘 메운 것 같지는 않다. 개막 공연을 봤기 때문에 지금은 어떻게 개선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속도감으로는 경쾌해도 이해도에서는 명쾌하지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작품을 처음 보는 관객 중에서 로저가 미미를 거부하다가 어느 순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난을 자처하는 대담함과 뜨겁게 사랑하는 열정만큼 그들을 지배하는 짙은 불안 역시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건만 공연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니 관객은 대충 짐작만 할 뿐이다. 록 뮤지컬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심리적인 디테일은 두터운데 잘 들리지 않는 바람에 이 디테일을 놓쳐버릴 때 남는 것은 소재의 표면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에이즈나 마약이나 동성애 등 소위 파격의 모티프는 낡아 보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낡음은 이 공연에서 부차적인 문제다. 한국에서의 <렌트>는 그 무게 중심이 작품의 파격이 아닌 공연의 관록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는 불안한 청춘들이 자기를 이야기하지만 공연에서는 세월을 쌓은 배우들이 자기의 관록을 자랑한다. 엔젤 역할로 시작해서 여장남자 캐릭터에 한 획을 그으며 성장해 온 배우 김호영이 다시 엔젤을 연기할 때 <렌트>의 엔젤보다 더 도드라지는 건 김호영의 엔젤이다. 최재림의 둥글고 풍부한 성량은 록 뮤지컬 넘버의 뾰족함을 부드럽게 덮어버리고, 한때 밴드의 보컬이었던 시절이 드러나도 좋으련만 오종혁의 노래에서는 뮤지컬배우로서의 경력이 보이더라. 록 뮤지컬이라는 정체성이나 청춘의 파격이라는 주제보다 더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제작사 신시컴퍼니가 그동안 쌓아올린 이 작품의 세월이자 거기에서 비롯된 안정감이다. 그래서 마지막 무대에 상영되는 비디오 필름의 주인공은 뉴욕의 젊은이들이 아니라 이 공연의 배우들이다. <렌트>의 자기 이야기가 아닌 <렌트>를 공연하는 자기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극장
만약 이 공연을 스트리밍으로 봤다면? 별다른 특색 없이 그저 평범했을 거다. 작품 자체로 새로운 면모는 그다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하고 오래된 고전일수록 작품의 가치는 공연성에 좌우되는 법. <렌트>도 그렇다. ‘라 비 보엠’의 신나는 전주가 시작될 때 관객들은 리듬을 타며 몸으로 반응하고, 일 년 525,600분의 시간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을지 묻는 ‘시즌스 오브 러브’를 들을 때는 크게 내뱉는 호흡으로 화답하더라. 이런 관객의 반응은 영상에 담길 수 없지만 이런 현장의 분위기야말로 숱하게 공연됐을 이 작품을 여전히 고유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현장의 기운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관객의 반응은 언제나 신체적이기 때문이다. 몸과 몸이 함께 있을 때 만들어지는 에너지의 파동, 여기에 붙는 이름이 바로 감동이다. 감동의 자리는 마음이 아니라 언제나 몸이다.
관객의 박수 소리가 새삼스럽게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다. 개막 공연이어서 그런지 박수 소리가 꽤나 크더라. 박수는 관객과 배우가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존재했음을 몸으로 증명하는 관객만의 표현이다. 관객에게 극장은 박수를 치기 위한 공간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배우들의 인사에 관객들이 반응하는 방식은 카메라를 드는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물론 기억을 기록으로 담아두려는 열심일 것이다. 하지만 줄어든 박수 소리만큼 무언가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함께 있음의 감동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만 같다. 극장에서 관객의 몸이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지도 꽤 오래됐다. 배우의 몸과 관객의 몸은 각각의 방식으로 극장에 존재해야 하건만 요즘은 작은 움직임마저 허락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관객의 몸이 추방되고 있는 셈이다. 박수를 치는 관객이 많았던 개막 공연의 커튼콜에서 배우와 관객이 극장에서 서로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작품으로 볼 때 <렌트>는 낡은 면도 있고 불친절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에이즈와 동성애와 마약의 파격은 지금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예스러움이지만 싸워야 할 때 싸우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며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는 청춘의 용기는 지금 여기서 찾아야만 하는 낭만이라고, 이야기는 다소 불친절해도 음악에 실린 마음과 무대의 풍경에 담긴 미묘함을 읽어달라고. 공연이라는 복잡한 소통의 장으로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는 거다. 이것이 어디 <렌트>만의 초대이겠는가. 모든 극장은 관객으로 인해 특별한 공간이 된다. 지금은 마스크 없이는 이 초대에 응할 수 없지만 이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코로나의 시절을 추억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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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2호 2020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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