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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아버지> 김명곤 연출 [No.103]

글 |김영주 사진 |심주호 2012-04-16 4,892


꿈꾸는 광재이자 바라보는 선비

 

국립극장의 대극장과 소극장에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첫 민선 극장장이었던 그가 연 공모전의 결과였다. 재임까지 해서 6년간 행정가로 일한 후 배우로는 처음 문화관광부 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영화 <서편제>의 소리꾼 유봉이었고 <태백산맥>의 빨치산 대장 염상진이었다. <서편제>와 <춘향뎐>의 각색을 했고, 그 전에는 극단 아리랑을 창단해서 사회참여적인 작품들을 쓰고 연출하기도 했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을 번역했고, <뿌리 깊은 나무>의 기자였던 때도 있었다. 처음 가진 직업은 독일어 교사였고 서울대 독어교육과를 다니는 동안에는 연극과 소리에 미쳐 있는 괴짜였다.

 

거꾸로 올라가 보면 참 별나고 신기한 삶을 살아온 사람답게,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또 아무렇지 않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 다시 ‘광대’의 삶을 살고 있다. 아서 밀러의 대표작 <세일즈 맨의 죽음>을 한국적으로 번안한 <아버지>의 연출과 각색을 맡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제목이 바뀐 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안극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나요? 원작 그대로 하는 공연은 나도 많이 봤는데, 그보다는 내가 이 작품을 보고 느낀 것들을 많이 담아내고 싶었어요. 한국화가 되지 않은 원작 그대로의 이야기는 뼈대는 그대로이지만 우리 관객들에게 온전히 다가오지 않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나는 그걸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내가 받아들이고, 나하고 같이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풀고 싶어요.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기에 좋은 희곡이라는 게 보였는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하니까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소외된 아버지들을 위한 공연을 하고 싶더라고요. 연습을 보러 온 친구 놈이 정말 자기 아들한테 꼭 좀 보여주고 싶대요, 아들놈이 아버지 마음을 몰라주고 속을 썩이는데 너무너무 울고 싶다는 거죠. 그렇게 펑펑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는 아버지들을 위한 판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어느 세일즈맨’과 ‘아버지’는 정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꼭 이 아버지를 특정한 직업군에 한정하지 않았어요. 어떤 일을 하는 아버지든 사회로부터 느낄 수밖에 없는 소외감,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시킨 거죠. 물론 주인공의 직업을 외판원, 영업사원으로 잡기는 했지만 세일즈맨이든 샐러리맨이든 다 같은 처지죠.

 

시대적인 배경, 지역적 배경이 명확한 작품에서 어떤 동시대성을 찾으셨나요? 껍데기는 다 바뀌었죠. 시대, 지역,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들도 한국으로 변했지만 기본적인 구조나 작품이 가지고 있는 테마는 바뀌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살아가면서 가족들과 겪는 갈등이 있는데, 그 가족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자리를 잇게 될 아들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가 충족될 수 없는 데서 오는 갈등이 크죠. 시대나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문제죠.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보험금을 타낼 수 있는 자동차 사고를 내는 것인데, 이런 비극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은,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잘나가는 아버지라고 해도 때로는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끔은 그냥 죽고 싶은 마음, 나도 그럴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굉장히 자랑스러운 아버지일 것 같은데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애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남모르는 감정들이 있죠. 가족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지는 못하고 뒤에서 혼자 삭이는. 엄마는 남편한테든 자식한테든 그래도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아버지는 친구 사이에도 그런 깊은 이야기를 잘 못해요. 그런데 자식들은 그걸 잘 모르죠.

 

더블 캐스팅 된 두 배우가 모두 이 작품에 두 번 이상 출연을 했다는 것이 영향을 미치는 점이 있나요? 이순재 선생님은 두 번, 전무송 선생님은 네 번인가 다섯 번을 했는데 이분들의 제일 큰 고민은 전에 했던 걸 잊고 이번 공연에 새롭게 적응하는 거예요. 예전에 공연을 하면서 얻은 좋은 것들은 내게 제안을 해서 이번 공연에 다시 넣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원작과 번안 작품은 맛이 다르죠. 한국적인 상황에서 한국의 아버지를 그려내는 데는 두 분이 <세일즈맨의 죽음>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에서 아버지를 많이 연기하면서 아버지의 감성, 정서를 깊이 표현해온 분들이라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큰 판에서 행정가로 일할 때와 지금 하는 작은 작업 중에 어느 쪽이 더 즐거우세요? 지금 하는 일이 더 행복하죠. 원래 내가 했던 일이 소극장에서 극단 사람들과 작품을 만들고 공연하고 또 공연을 하러 다니는 거였으니까. 그러다가 극장장도 하고 장관도 했지만 내 근본은 함께 연습하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작품을 만드는 여기에요.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면서 창조를 한다는 건 혼자하든 같이 어울려서 하든, 작은 작품이든 오페라 하우스의 대작이든 관계없이 다 행복해요. 일인극이어도 만드는 그 기쁨은 똑같아요.

 

퇴임 후에 곧바로 현장에 돌아오신 게 신기했습니다. 그런 일을 한번 하면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고 정치권에서 오가면서 또 다른 자리에 앉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애초에 꿈이 정치 쪽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에요. 예술, 창작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일을 하다 보니 예술경영, 문화행정 쪽까지 손을 뻗게 된 거지 내가 장관을 하겠다고 꿈을 세웠던 것은 아니에요. 내 꿈은 연극이든 영화든 뮤지컬이든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요. 작품을 만들어서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더 잘되면 세계 무대에 도전하는 것.

 

대한민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연출가 김명곤의 가장 강렬한 무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무대를 연출하신 거였죠. 굉장히 무거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건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의식이었죠. 한 시대의 국민들의 기운이 그날 그렇게 응축이 된 거죠. 그 제안을 받고 노제까지 4일밖에 시간이 없었어요. 4일 동안 밤낮으로 구성안 짜고 전쟁을 하듯이 준비를 했는데 그때 함께 일을 했던 팀원들은 모두 국립극장 시절부터 나와 함께 일을 해온 동료들이었어요. 나와 오랫동안 많은 경험을 공유해왔던 사람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내면서 준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출연진들도 두 말 없이 다 협조를 해줬고 스태프들도 그랬고 오신 시민들도 말할 것도 없이 정말 마음을 다해 주셨어요.

 

그날 행사가 그만큼 품위 있게 치러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위로받은 사람들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과정에서 힘든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 의식에 대한 작품은 그 전에도 많이 해봤고 우리 전통 상례의 의식 중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에 필요한, 적절하게 쓰일 부분들을 따온 거였죠. 노제가 끝난 후에 글을 쓰기도 했지만 정부 쪽에서는 좀 비협조적이었어요. 하지만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정말로 열과 성을 다해 싸워가면서 해낼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정면에서 권력과 싸웠던 시절도 있으셨죠. 그건 더 옛날이죠. 70년대, 80년대에는 정권 자체가 독재 정권이었고 문화예술에 대한 감시, 검열, 탄압이 아주 극심할 때였어요. 5·18 광주항쟁 이후부터 더 심해져서 80년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랬으니까 내가 연극을 시작한 게 70년대 중반이니 15년 정도는 무슨 독립운동을 하듯이, 같이하던 사람들이 도망 다니기도 하고 잡혀가기도 하고 극단이 해산당하기도 하는 그런 험한 일들을 겪었죠.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서 하는 철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제일 힘들고 또 제일 행복하셨을 것 같아요. 행복… 했죠. 그때는 돈, 개런티라는 개념도 없이 연극이라는 걸 했는데, 그 연극을 하다가 잡혀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에 대해 가졌던 믿음, 그리고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활동을 했는데 그렇다고 예술을 도구로만 생각했던 건 아니었고,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는 굶주리고 힘들기만 한 일이지만 그걸 하고 있는 나는 참 행복했어요.

 

무섭지는 않으셨어요. 그야, 안 무섭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같이하는 거였으니까. 그러다 8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연에서 검열이 없어졌어요.

 

 

그 후에도 직업이 참 많이 바뀌셨어요. 역마살이 좀 있으신 것 같은데.(웃음) 그렇지. 난 좀 역마살이 있죠. 난 한군데 붙어 있지를 않아요. 직장도 진득하게 붙어있는 체질이 아닌데 직장을 때려치우고 연극을 한다고 해도 배우면 배우, 연출이면 연출 한길만 파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연출도 했다가, 희곡도 썼다가, 연기도 하다가, 제작도 했다가 좀 이런 스타일이에요. 내 인생이 한길로 쭉 가는 게 아니라 여러 길을 둘러 둘러 가다가 이 길도 가보고 저 길도 가보는 그런 식이었는데, 나중에 보면 그게 또 큰 틀에서는 하나의 길이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둘러본 그 길들이 다 참 재밌었어요. 내가 다 해보고 싶은 일들이었으니까. 억지로 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만 가족들은 계속 걱정을 했을 것 같은데요. 걱정 많이 했죠. 젊었을 때는 얼마든지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위치인데 박차고 나가니까 부모님들이 불안해했죠. 그 후에는 집사람이…(웃음) 극장장으로 있을 때 3년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한 번 더 해야 한다고 해서 연임을 해서 6년을 했어요. 그리고 장관까지 거의 7~8년을 계속 월급을 받은 거잖아요? 나는 월급을 안 받는 생활이 너무 기쁘고 좋은데 집사람은 그냥 불안하죠. 지금도 불안해해.(웃음)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직장 생활이라는 건 언제든 끝난다, 내 주위 친구들을 봐도 안 그러냐, 하지만 예술은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하는 것 아니냐. 내가 70살, 80살이 될 때까지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설득을 했죠.

 

예술가도 내가 하고 싶어도 작업을 못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나는 다른 것보다 남이 요구하는 삶보다는 내가 주도적으로 사는 걸 원했어요. 나도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딱 정해져 있는 공무원 생활을 처음 하는 거니까 시키는 대로 했죠. 물론 그 일에 대한 보람을 느꼈으니 열심히 했고. 그런데 한편으로 내 마음속에서 계속 아쉬웠던 건 작품을 쓰거나 창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 시간을 벌어야 하니 빨리 그만두고 창작을 해야겠다 생각을 했죠. 여전히 나한테는 쓰고 싶은 작품, 만들고 싶은 작품이 많이 있어서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보통은 직업이 있고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취미가 필요 없으실 것 같아요. 남들이 취미로 하는 게 내 직업이죠. 그래서 나는 다른 취미가 없어요. 내 일이 다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게 다 취미인 셈이니까. 연극을 하고 영화를 보고 또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애들을 가르치는 것, 그게 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죠. 다른 취미 활동을 하고 싶은 욕구가 없어요.

 

자식뻘인 젊은 친구들을 보면 어떠세요? 지금 같이 연습하고 있는 배우들 중에도 내 친구나 후배의 아들, 딸들이 많아요. 친구들한테 난 너희들과 안 놀고 니네 아들딸들이랑 논다고 자랑하죠.(웃음) 재미있어요. 우리 때는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기보다는 관심이 있어서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이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았죠. 그때는 사람 수가 많지 않았으니까 그냥 꾸준히 하다보면 살아남았는데 지금은 타고난 재능에 미친 듯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아서 그게 안쓰러워요.

 

어린 배우들을 보면 재능의 유무가 보이세요? 보이죠, 아무래도. 그런데 안 보인다고 해서 너는 이 길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위험한 거예요. 연극계도 보면 젊을 때는 재주도 없고 다들 그만두라고 했던 사람이 대기만성으로 완숙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재능이라는 것도 천차만별이라 서른, 마흔이 넘어서 꽃이 피는 사람도 있고 10대 때 이미 다 소진해버리고 20대에는 별 볼일 없어지기도 해요. 20대 때 잠깐 반짝이는 재능이 보였다고 해서 30~40대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거든요. 오래 이 일을 하면서 보면, 재능이 많은 사람이 흔히 길게 못 가요.

 

어떤 사람이 길게 가나요? 재능이라는 게 아주 없어도 힘들고, 2급 정도 되면서 죽었다 깨어나도 이거 말고는 안 되는 사람, 다른 걸 하려고 해도 도저히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운명 같은 건데 그런 이들이 오래 살아남아요.

 

 

이번에 총감독을 맡은 광주 세계아리랑축전은 어떤 행사인가요? 올해 처음 만들어진, 아리랑을 테마로 하는 페스티벌이에요. 행사 총감독이기도 하지만 개막식에 할 대형 총체극 형식의 <아리랑> 연출도 맡았죠. 지금 구상하고 쓸 준비를 하고 있어요. 내가 처음 극단을 만들었을 때 붙인 이름도 아리랑이었고, 그때 처음 올린 작품 <아리랑>도 내가 직접 쓴 거였죠.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있는데 광주에서 좋은 취지의 행사를 한다고 하기에 맡기로 했죠. 중국에서는 지금 아리랑까지 자기네 문화유산으로 흡수하려고 하는데, 위기가 될 수 있는 이 때 아리랑을 살리자는 뜻도 있어요. 중국과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너무나 밀접하기 때문에 갈등 거리가 많아요. 모든 소수민족의 문화를 자기네 중화 문화로 편입시키려고 하는데 조선족의 문화유산까지 중국 문화라고 해버리면, 조선족의 문화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 문화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불 보듯 뻔하죠.

 

참여극을 하셨던 80년대에 비해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이 훨씬 복잡해진 것 같으세요? 전혀 다르죠. 그때는 아주 단순했어요. 한반도에 있는 좁은 남한 사회 안에서의 싸움이었지만 지금은 경계도 불분명하고 대립하는 내용도 뭐가 옳고 그른지 판별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더 고민해야 할 것도 많죠.

 

블로그와 트위터를 하시죠. 재미있으세요? 젊은 세대들하고 소통하느라 하는 건데 재밌어요.(웃음) 전화나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어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릴 수 있고 사람들은 거기 대해서 또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게 아주 혁신적이잖아요.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사람들, 내 옛날 공연을 본 사람들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글 남기면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을 해주는구나 싶어서 고맙기도 하고요. 온라인에서도 느껴지는 온기가 있어요.

 

그런데 인터넷상에서 공격성을 쉽게 드러내는 성향들도 있잖아요. 나는 그런 쪽은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렇게 자기의 증오심과 분노와 한을 분출하는 익명의 존재들이 가진 어두운 기운이라는 게 있어요. 나는 거기서까지 그런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자꾸 공격적으로 어두운 쪽으로 가다보면 그 거미줄에 휘말릴 수밖에 없어요.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어떤 소통에서나 가릴 건 가리고 조심할 건 조심해야죠.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 다 내뱉는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말을 공격적으로 하고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스스로 자기 말의 구속에 빠져들고 상처를 만들어요. 그런 걸 보면 안타깝죠.

 

독재 정권하에서 투쟁을 하던 분에게서 이런 온화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본래 온화한 사람이에요.(웃음) 내가 성격이 사납고 공격적이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이 아니라 이게 옳은 일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독재 정권은 사라져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으니까 목소리를 냈던 것이지 아무나 붙잡고 싸운 건 아니니까요.(웃음)

 

돌이켜 보면 그 일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방향을 결정했다 싶은 일이 있으세요? 연극반에 들어간 것, 판소리를 만난 것.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연극반에 놀러 갔고, 3학년 때 시골의 국악원에 놀러 갔다가 판소리를 들었거든요. 그게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어요. 그 뒤로는 계속 그 연장인 만남들이 이어졌고. 어렸을 때는 문학을 지망했고 그래서 독문학을 전공했는데 헤세나 괴테 같은 작가처럼 되고 싶었죠. 지금도 언젠가는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작품을 쓰고 싶은 꿈이 있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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