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살다>
캐릭터에 실린 이야기의 속마음
예술가라는 캐릭터
어떤 장르든 유행에 상관없이 계속 인기를 끄는 소재가 있다. 창작뮤지컬에서 그런 소재를 꼽자면 단연 예술가 이야기일 거다. 예매 사이트를 열어보시라. 예술가 이름이 제목인 작품은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예술가라는 소재만큼 품고 있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실존했던 예술가치고 삶이 녹록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와 갈등하든지 자기 자신과 갈등하든지 그들의 삶은 불행하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수준은 천상계다. 타고난 천재이든가 아니면 이 세상에 없는 성실함으로 발휘하는 예술의 능력치가 만렙인 거다. 삶은 기구한데 작품은 이토록 아름답다니. 삶과 작품 사이의 간극과 편차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예술가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해피 엔딩으로 끝날 때가 많다. 어쨌든 그에겐 작품이라는 뛰어난 결과물이 있지 않은가. ‘봐라, 삶은 불행했어도 이런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의 삶은 한 번도 무의미하지 않았다!’ 삶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 승리의 스토리라인에 쓰임새가 명확한 시청각적 요소(음악이든 미술이든 그들의 작품!)까지 있으니 공연 대본의 소재로서 부족할 게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극에는 선명한 스토리라인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 자주 간과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캐릭터다. 예술가 소재는 사건의 드라마가 아닌 인물의 드라마다. ‘이’ 사람이기에 ‘이런’ 삶이 펼쳐지는 불가피한 캐릭터의 드라마인 바, 다른 어떤 드라마보다도 캐릭터의 개성과 매력이 선명해야 하는 서사인 거다. 인간으로서의 자아, 삶이라는 시간, 작품이라는 결과. 이 세 가지 요소 사이의 괴리와 모순으로 역사 속 예술가는 작품 속 캐릭터로 바뀌게 마련이다. 캐릭터로 충분히 빚어지지 않았을 때 예술가 이야기는 진부한 인간 승리의 클리셰에 그쳐버리거나 실체 없는 멜랑콜리에 빠져버리거나 기타 등등 다양하게 경로를 이탈해 버린다. 이래서 예술가 소재로 극을 만든다는 것이 어려운 거다. 예술가는 결코 한 겹의 인간일 수 없다. 비단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원래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다단한 존재이지 않던가. 이러한 입체성이 내면의 모순, 선택의 딜레마, 삶과 이상의 괴리의 틈새에서 잘 빚어질 때 이야기 속 캐릭터는 역사 속 예술가보다 훨씬 생생해진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지금 공연되고 있는 <실비아, 살다>는 충분히 이야기해 볼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틈새에 고통스럽게 끼어있는 예술가인데, 비슷한 소재의 작품과는 달리 제법 생생한 인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딜레마
<실비아, 살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첫 번째 관심은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에 있다. 천재의 재능이 그렇듯이 그의 시는 탁월했고, 시대를 앞선 사람이 그렇듯이 그의 삶은 불행했다. 하지만 그 삶이 남다른 이유는 따로 있다. 서른한 해의 인생을 사는 동안 아홉 살 때부터 십 년을 주기로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다니 지어낸 이야기보다 더 드라마틱하지 않나? 그에게 삶이란 죽음을 향한 열망과 다르지 않았던 거다. 왜일까? 단지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라는 말로 이 삶의 역설을 설명하기란 충분치가 않다. <실비아, 살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엮어낸다.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관통하는 죽음에의 열망을 이해하기 위해 작품이 선택하는 방식은, 그의 삶 전체를 이야기의 재료로 삼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가십 또는 에피소드를 재료 삼아 픽션을 만들어내는 작품은 많았지만 이렇게 통째로 인생의 궤적을 짚어나가는 서사는 흔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극적인 높낮이가 실종된 연대기의 나열이 될 수 있고, 그 결과 평면적이어서 지루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쉽게 선택하지 않는 서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과감하게 이야기의 정공법을 따라간다.
무대 위 실비아 플라스의 삶은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로 펼쳐진다. 세 번의 자살 시도는 그의 삶의 단위를 나누는 기준점이지만 죽음의 의례에 깔린 키워드는 바로 ‘아빠’다. ‘아빠’는 실비아 플라스가 죽기 넉 달 전에 쓴 시의 제목이기도 하고,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갈등을 한 마디로 압축한 단어인 만큼 이야기는 실비아의 삶을 ‘아빠’와 연관 지어 해석하고 풀어낸다. 작품이 실비아에게 부여하는, 여성이면서 글 쓰는 사람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은 ‘아빠’라는 키워드 안에서 충돌한다. 실비아에게 ‘아빠’는 어린 딸의 글을 읽어주고 인정해 주는 존재로서 장차 실비아의 삶을 지배하는 존재의 기원이다. 아빠의 죽음, 그의 첫 번째 좌절이다. 이후 실비아는 토해내듯 투쟁하듯 시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의 글은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 고작 파격적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 잡지의 평론가도, 대학도, 그에게 ‘아빠’가 되어주지 않는다. 두 번째 좌절이다. 실비아는 또 다른 ‘아빠’를 찾아낸다. ‘아빠’를 닮은 사람, 같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테드 휴즈와 불같은 연애 끝에 결혼한 거다. 하지만 테드는 실비아의 글을 제대로 읽어낼 의지가 없다. 곧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결혼의 서약을 배신함으로써 실비아를 사회적 나락으로 처박아 버린다. 실비아는 비로소 ‘아빠’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인정을 갈구하느라 절룩거리는 존재로 나를 전락시켜 버린 가해자, 나를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얽어매는 사회적 굴레, 이것이 ‘아빠’의 세계였음을 말이다.
‘아빠’의 세계 안에서 실비아는 딸과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여성인 그가 쓴 글이 여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아이러니는 실비아의 삶을 속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마지막 무렵 무대를 채우는 실비아의 시 ‘아빠’의 폭력적 언어(아빠, 이 개자식! 아빠를 죽였어야 해!)는 종속된 삶을 끊어버리는 해방의 선언에 다름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지만 실비아는 ‘아빠’를 죽인다!
작품은 실비아의 절망이 점점 더 깊어지는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치우치지도 않으며 덤덤히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쌓이는 현실감은 과잉된 감정의 도움 없이도 더 크게 다가온다. 역사 속의 실비아는 이야기 안에서 더 구체적인 인물로 살아난다. 충돌되는 정체성과 거기에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 사이에서 삶의 딜레마를 그대로 끌어안고 투쟁하듯 살아온 실비아라는 한 인간을 관객은 무대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
실비아의 삶에 주목하는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실비아의 ‘살아남’을 향한다. 제목을 <실비아 플라스>가 아니라 <실비아, 살다>라고 붙인 이유일 것이다. 실비아의 삶은 세 번째 자살 시도가 성공함으로써 끝난다. 자기의 기원을 스스로 파괴하고 모든 사회적 틀을 무효화시켜 버린 여성 시인이, 그리고 그의 삶이 의미의 옷을 입고 부활할 수 있다면! 이것이 작품이 상상력의 힘으로 도달하고 싶은 도착점일 것이다. ‘투명한 벽에 갇힌 채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모든 실비아들’에게 이 작품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기 위해 작가가 상상해낸 인물은 빅토리아 루카스다. 빅토리아 루카스는 실비아 플라스의 자전적 소설 『벨 자』의 작가로서 자서전 작가인가 싶지만 사실 이 이름은 실비아 플라스의 필명이다. 한마디로 빅토리아 루카스는 ‘글을 쓰는’ 실비아 플라스인 거다. 빅토리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실비아 플라스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빅토리아가 상징하는 바는 다양하다. 실비아 플라스가 사회적 자아라면 빅토리아 루카스는 글 쓰는 자아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시선이니 ‘살아가는 나’의 옆에 언제나 서있는 ‘지켜보는 나’다. 그는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빅토리아가 ‘글로 완결된 나’라면 실비아는 ‘현재를 통과하는 나’다. 자전적 소설의 작가인 만큼 빅토리아는 실비아의 모든 시간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빅토리아의 글은 실비아의 삶보다 언제나 나중에 있다. 딱 한번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실비아가 세 번째 자살 시도를 할 때이다. 이 마지막 순간에 빅토리아는 실비아와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말한다. 살아라. 실비아의 사회적 자아는 끝없이 모욕당하고 거절당하며 파괴되었다. 이제 ‘아빠’의 규범을 부숴버리고 그 틀에 갇힌 자기를 없앰으로써 완벽한 자유를 맞이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순간에 한 번도 타인에게 자기를 빼앗겨 본 적 없는, 글을 쓰는 자아가 말을 건네는 거다. 훼손된 자아에게 진심을 담아 건네는, 이 말의 순간을 위해 빅토리아는 준비된 캐릭터였다.
역사 속의 실비아는 스스로 죽지만 이야기 안의 실비아는 죽지 않기를 선택한다. 사실 이런 결론은 좀 실망스럽다. 실비아는 죽음으로 자기의 삶을 증명한 사람이다. 그를 물리적으로 살리느라 억지스러워지는 것보다 살아남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훨씬 더 나은 작가적 도전이었을 거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에 너무 도덕적인 개입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지금껏 쌓아온 이야기의 개성은 퇴색되어 버린다. 이 결론이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실비아를 살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빅토리아의 이상적인 말에 생각만큼 힘이 실리지 않는데 실비아가 설득되어 버리는 게 정해진 결론처럼 작위적이기 때문이다. 이건 빅토리아라는 캐릭터가 피상적인 데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다. 실비아의 곁을 위성처럼 맴돌 뿐 그와 갈등하고 충돌하며 그로 하여금 움직이게 할 동력이 될 만큼 구체적인 인격으로 세워지지 않았던 인물이 마지막에 펼쳐놓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말에 설득의 힘이 실릴 리는 없으니 말이다.
‘살다’의 의미를 말해주어야 할 캐릭터로서 빅토리아는 여러모로 아쉽다. 언제나 옆에 있어 마음과 언어를 쏟아낼 수 있는 좋은 친구였을 뿐 안온한 삶을 위협하는 적은 왜 되지 못했을까. 실비아의 삶이 불행했던 건 그가 여성으로서 허락되지 않은 글을 썼기 때문이었는걸. 빅토리아가 실비아만큼 선명한 캐릭터였다면 실비아의 마지막이 상징적 의미로 해석될 여지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빅토리아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적극적인 설정이었지만 만듦새와 쓰임새에서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상상력이 아쉬운 캐릭터다.
장르라는 강박
<실비아, 살다>가 실비아 플라스의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시간을, 대사나 설명이 아닌 사건으로 엮어내 극장의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게 만든 솜씨는 분명 주목할 만하다. 뮤지컬보다 연극에 가까운 호흡은 이 작품의 개성이기도 하다. 의자 등 간단한 오브제로 채워지는 무대의 활용이 그렇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겹쳐놓으며 이야기를 쌓아 올리는 연출의 문법이 그렇고, 무대의 모든 시간을 진행하는 일인 다역에 능수능란한 배우들이 그렇고, 정통적인 뮤지컬의 문법보다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음악이 그렇다. 감정보다 말 자체에 집중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의 비슷한 소재의 뮤지컬과는 확연히 다른 결이다.
만약 이 작품이 뮤지컬이 아닌 연극이었다면 이야기의 결론은 어떻게 끝났을까? 분명 지금같이 안전한 결론은 아니었을 거다. 연극이 질문에 어울리는 장르라면 뮤지컬은 대답에 최적화된 장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결말은 스스로 뮤지컬임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가 아닐까. 실비아의 이야기로 끝나야 하는데 뮤지컬의 문법으로 끝나버린 셈이다. 이런 ‘뮤지컬스러운’ 결말에 대해 작가 자신도 그다지 믿음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지지부진한 엔딩은 이러한 희망을 확신하지 못해 주저하는 작가의 속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빅토리아가 희미하고 실비아가 선명한 건 작가의 관심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삶을 향하고 있고, 그 고통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 없는 긍정적인 답보다는 쉽게 답을 찾지 않는 진지한 고민이 훨씬 정직해 보인다. 비록 결론은 지루했어도 이 작품은 실비아의 삶과 죽음에 진심이다.
이 진심을 그대로 무대에 담아내기 위해 창작진은 아예 작품을 직접 제작하는 길을 택했다. 과감한 결심이고 놀라운 용기다. 지금의 뮤지컬 제작 시스템 안에서는 기존의 뮤지컬과 조금 다른 결의 뮤지컬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창작 팀은 그저 이야기 하나만 붙든 채 매일 신작이 쏟아지는 대학로에 출사표를 던진 거다. 그 첫 작품이 <실비아, 살다>다. 실비아도 살았으니 이 팀도 살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5호 2022년 8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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