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츠>
고양이는 개가 아니다
뮤지컬이 된 시
<캣츠>는 여러모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은 T.S. 엘리엇의 시집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입니다. 시집을 대본으로 쓰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캣츠>는 엘리엇의 시를 장면의 단위로 삼아 그대로 뮤지컬 대본으로 가져옵니다. 시 한 편에 장면 하나, 이야기 하나. 아주 간결해 보이지요? 이런 형식에 어울리는 스타일은 쇼입니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으면 드라마가 쫙 흘러가야겠지만, 시처럼 한 편 한 편 이야기가 나뉠 때는 쇼의 형식이 가장 잘 맞지요. <캣츠>가 선택하는 형식은 레뷔입니다. 레뷔는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쇼의 한 형태입니다. 여러 개의 짧은 에피소드들로 만들어진 극에 노래가 가미된 일종의 옴니버스 코미디지요. 하나의 주제가 있긴 하지만, 극의 길이가 짧고 노래와 춤이 가미되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던 소극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즐겼던 대중적인 서민 문화였다고나 할까요?
레뷔라는 형식을 따르다 보면 춤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캣츠>도 춤이 중심이 되는 공연이지요. 쇼에서 춤이 중심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시가 공연이 되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시가 언어의 함축이라면 춤은 몸의 함축이거든요. 시를 공간으로 옮길 때 그 번역어를 몸으로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지요. 문학 작품의 원작을 뮤지컬로 각색할 때 내용 자체보다 내용을 가져오는 형식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캣츠>는 문학의 고전적 언어인 시를 공연의 대중적 언어인 춤으로 번역한 작품입니다. 쇼라는 가벼운 형식으로 시의 진지함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지요. 명작에는 언제나 이런 의외성이 숨어 있습니다.
시에 담긴 이야기
흔히 <캣츠>에는 드라마의 구조가 없다고 말합니다. 시를 그대로 극의 내용으로 가져왔으니 그저 시를 나란히 배열한 병렬 구조라고 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를 쇼의 형태로 만든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의 극이라는 형식으로 엮이는 한 시작과 끝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애매한 공연이 될 수 있으니까요. 총 14편의 시로 구성된 엘리엇의 시집에는 명확한 서론, 본론, 결론의 구조가 있습니다. 1편의 「고양이 이름 붙이기」가 서론이라면, 14편의 「고양이에게 말 걸기」는 결론인 셈이지요. 중간에 들어가는 고양이들의 자기소개는 본론이고요. 아주 잘 짜인 구조입니다.
「고양이 이름 붙이기」는 세상의 모든 고양이에게는 세 개의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지요. 첫 번째 이름은 부르기 편한 이름입니다. 누구나 다 알만한 흔한 이름이지요. 두 번째 이름은 특별한 이름입니다. 품위 있고 뭔가 남달라서 그 이름만으로 특별해지는 느낌이 드는 그런 이름입니다. 세 번째 이름은 표현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고양이 혼자만 알고 절대 알려주지 않는,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말할 수 있으나 말할 수는 없는’ 그런 이름입니다. 이건 이름이라는 ‘단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본질이자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이름이란 다른 사람이 나를 호명하는 기호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이지 나 자체를 표현하는 호칭은 아닐 수 있거든요. 세 번째 이름은 바로 나 자신만의 이름, 그러니까 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이 오직 나 스스로에게만 필요한 정체성 말이지요.
본론에 해당하는 12편의 시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고양이들의 자기소개입니다. 생김새나 성격이 너무나도 다른 고양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셈이지요. 고양이들의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스며 있습니다. 안정되고 편안한 삶에 대한 예찬, 흘러간 과거에 대한 회한, 지금 솟아나는 삶의 에너지 등등. 고양이들의 이야기는 「고양이에게 말 걸기」로 마무리됩니다. 엘리엇의 시를 그대로 가져와 볼까요? “여러 가지 고양이 이야기를 읽었으니, … 고양이가 나나 너와 닮았음을, 여러 생각을 가진 여러 사람과 많이 닮았음을 알겠지. … 그런데 고양이한테는 어떻게 말을 걸지? … 먼저 기억을 되살려 줄게. 고양이는 개가 아니다. 고양이에게도 말을 걸어야 한다는 거야. 믿을 만한 친구로 대해줄 때까지는 조그만 존경의 표시도 필요해. … 그러면 이름을 부르게 될 거야.”
엘리엇의 시는 고양이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끝납니다. 이름으로 고양이를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고양이처럼 하찮은 존재에게도 그만의 정체성이 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야!” “이 도둑고양이야!” 이런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러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이름을 알아야 하겠지요?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상대, 그리고 나와 너무 다른 상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는 나와 다르지만 한편으로 나와 닮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지요. 고양이와 인간이 서로 닮았음을 보게 되는 것. 고양이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다름 가운데 존재하는 같음을 보면서 이질적인 존재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가 먼저 말을 건네길 기다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언어에 익숙해지는 일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 때문에 당신을 배척하지 않겠다, 당신의 말이 내 귀에 들릴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 이것을 표시하는 것이 엘리엇의 시에서 말하는 존경의 마음을 품은 선물일 것입니다. 그에게 나를 열어놓는 것이지요. 이럴 때 비로소 서로의 이름을 아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고양이가 말하지 않은 세 번째 이름으로 그를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엘리엇의 시는 우화와 동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깊습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존재에게 이름이 있음을 상상하기.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고양이는 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양이는 분명 개가 아니건만 집 안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이라는 점에서 보면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강아지에게 익숙한 사람은 고양이의 반응에 놀라게 마련이지요. 그러면서 불평합니다. “왜 이렇게 상냥하지 않은 거지?” 하지만 기억하세요. 고양이는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의 언어로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요. 그래야 고양이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드라마가 되기 위한 장치
원작의 시집에 정말 멋진 주제가 담겨 있고, 시작과 끝이라는 구조가 명확하게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공연이 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아무리 쇼의 형식이라고 해도 공연이 되려면 최소한의 드라마다운 구조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게 서커스나 버라이어티쇼와 쇼 뮤지컬의 차이점일 겁니다. <캣츠>는 이런 점을 충분히 의식한 작품입니다. 뮤지컬 안에는 시에는 없는 드라마의 장치가 여러 개 깔려 있습니다.
일단 무대 장치만 봐도 그래요. 시에는 이런 배경이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연은 고양이들이 모이는 장소를 만들었어요. 무대는 낡은 타이어, 폐차된 자동차 등 도시의 폐기물들이 쌓인 쓰레기장입니다. 이런 무대는 고양이들이 도시에서 폐기물처럼 버려져 낮에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밤에나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곳에 모여서 고양이들은 파티를 여는 겁니다. 왠지 짠합니다.
이야기에도 여러 장치가 개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양이들의 축제를 상상한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원작 시에서는 젤리클 고양이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축제를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뮤지컬은 이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습니다. 젤리클 축제를 상상하고 축제에서 새로운 삶을 선물받을 한 마리의 고양이를 뽑는다는 재미있는 설정을 마련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의 고양이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만들어지니까요. 누구든지 젤리클 환생의 선물을 받기 위해 자기를 뽐내는 겁니다.
상황이 만들어졌으면 거기에 맞는 캐릭터가 있어야겠지요. 고전적인 드라마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있고, 그의 행동을 막는 악당이 있어야 합니다. <캣츠>도 이런 설정을 아예 무시한 것 같진 않아요. 일단 악당 캐릭터가 명확합니다. 맥캐버티가 그런 캐릭터입니다. 뮤지컬에서 맥캐버티는 젤리클 축제를 훼방놓는 악당으로 설정됩니다. 1막에서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만으로 젤리클 고양이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도록 했고, 2막에서 맥캐버티는 선지자 고양이를 납치해 젤리클 축제를 위기에 몰아넣으니 극을 해치는 역할로 더할 나위 없는 캐릭터인 셈이지요. 고양이인 주제에 젤리클 모임에 속하지도 않고 방해만 놓습니다.
그런데 젤리클 모임에 속하지 못한 고양이가 또 있습니다. 그리자벨라입니다. 원작 시집에는 없지만 엘리엇의 사후에 그의 부인이 미발표 원고를 앤드루 로이드 웨버에게 주어 작품에 삽입됐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합니다. 그리자벨라는 이 작품을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중심 인물입니다. 그리자벨라는 젊은 날 젤리클 무리를 떠나 화려한 도시로 갔다가 늙고 비루해져 다시 돌아온 고양이입니다. 그는 떠난 자임과 동시에 젤리클을 버린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다른 고양이들은 다시 돌아온 그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자벨라는 젤리클 축제에서도 이질적인 존재예요. 다른 고양이들은 집단적이지만 그리자벨라는 혼자입니다. 섞이질 못해요.
그리자벨라가 다른 고양이들과 구별되는 점은 또 있습니다. 다른 고양이들은 춤추는 고양이지만 그리자벨라는 노래하는 고양이입니다. 다른 고양이들이 표면적인 것에 비해 그리자벨라는 내면적인 셈이지요. 이런 점에서 보면 그리자벨라는 가장 인간적인 고양이이기도 합니다. 그는 추억을 노래합니다. 1막과 2막에 걸쳐 반복되는 그의 노래는 추억이 존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잘 보여주는 명곡입니다. 작품 전체에 걸쳐 리프라이즈가 많지 않은데 이렇게 반복되는 넘버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자벨라는 작품의 핵심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고양이들과는 다른 방식의 표현과 다른 방식의 배치라는 점에서 그리자벨라는 이 작품의 드라마에 핵심적인 캐릭터가 확실합니다.
마지막의 「고양이에게 말 걸기」를 선지자 고양이가 젤리클 축제의 결론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역시 극적인 설정입니다. 지금까지의 젤리클 축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정리하는 것이지요. 그리자벨라가 젤리클 축제의 환생을 선물받는 고양이로 선택되어 다시 젤리클 고양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와 함께 아름다운 삶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끔 하지요. <캣츠>는 서사의 틀이 분명치 않고 줄거리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만, 사실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분명한 ‘서사적인’ 작품입니다.
그래도 <캣츠>는 쇼다?
<캣츠>가 서사적인 작품인 것과 별개로 관객들의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배우들의 춤입니다. 고양이가 된 배우들이 관객석을 통해 무대로 등장하며 공연이 시작되는데, 옆을 지나가는 배우를 보면 진짜 고양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예요. 공연이 시작되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양이의 몸짓에다가 발레, 탭댄스, 모던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춤이 환상적입니다. 음악도 록, 발라드, 팝, 가스펠, 재즈, 클래식 등등 모든 장르가 망라되어 있어요. 음악과 춤의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까요. <캣츠>는 굉장한 쇼 뮤지컬임이 틀림없어요.
쇼 뮤지컬이라고 하면 쉽고, 가볍고, 감각적인 오락이 연상됩니다. 맞습니다. 쇼 뮤지컬은 노동에 지친 서민들이 하루의 피로를 푸는 생활형 오락에서부터 시작된 장르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쇼 뮤지컬이야말로 뮤지컬의 최고 장르라는 사실은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볍게 즐기는, 제일 쉬워 보이는 쇼를 왜 뮤지컬의 최고봉이라고 이야기하는 걸까요? 일반적으로 예술은 어려운 것에서부터 쉬운 것으로,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으로 발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쉽고 가벼운 예술은 무겁고 진지한 예술의 파생 상품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뮤지컬은 이런 흐름을 거스릅니다. 가볍고 천박하기까지 했던 보드빌, 벌레스크 등 쇼의 형식에 이야기가 얹히고, 그 이야기에 넓이와 깊이가 더해지면서 발전해 왔던 것이 뮤지컬의 역사거든요. 쇼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콘셉트로 그 무게를 더해왔더랬지요. 뮤지컬에서 실험이란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해체하는 것이라기보다 가벼움 위에 무거움을 더하는 방식으로 흘러왔던 거예요. 일반적인 공연예술의 흐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쇼 뮤지컬은 가장 브레히트적인 방식입니다.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형식은 가볍기 그지없으니까요. <카바레>와 <시카고>는 좋은 예입니다. 웃음이 있지만 왠지 씁쓸하고, 희화적이지만 뒤집으면 풍자가 있습니다. 브레히트가 이야기한 거리두기가 바로 이런 것이지요. 쓰디쓴 현실의 모습을 마치 쇼를 보는 것처럼 가볍고 새삼스럽게 보게 만드는 연극적 기술이에요. 쇼 뮤지컬의 전설로 남는 작품들이 모두 진지한 인문학적 질문을 품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캣츠>는 매우 훌륭한 인문학적 쇼 뮤지컬입니다. 춤추는 고양이들의 축제에는 인간을 향한 질문이 깊게 스며 있으니까요.
고양이-되기의 의미
그 첫 번째 질문은 ‘왜 고양이가 되어야 할까?’입니다. 철학자 김용석은 <캣츠>의 독특함을 의묘화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기존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의인화의 관점에서 다루어졌지만, 이 작품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의인화는 모든 것을 인간화시키는 방식입니다. 꽃이 됐든 동물이 됐든 인간 아닌 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가져와 인간의 옷을 입히고 인간의 사유를 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묘화는 다릅니다. 인간이 고양이가 되는 것입니다. 고양이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고양이의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의인화와는 아주 다른 방식입니다.
같은 사람을 흉내 내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고양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서 내 몸의 리듬과 패턴을 버려야 합니다. 두 발이 아니라 네 발로 걸어야 하고, 묵직함은 버리고 가볍디가볍게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살아왔던 몸의 방식이 아니라 고양이의 방식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몸의 움직임이 바뀌는 것은 관념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고양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할 수도 있고 설명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 몸이 그대로 움직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고양이가 되도록 내 몸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의 움직임을 바꾸려고 생각할 때 고양이가 된다는 것은 더 복잡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고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특성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할 고양이의 개성적인 몸짓을 파악해야 하니까요. 이제 나에게 고양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양이가 아니라 한 마리의 고양이입니다.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 유일한 존재를 나는 나의 몸을 바꾸는 실천을 통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다름이란 유일함의 다른 이름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위의 공동체
두 번째 질문은 ‘각각 유일한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입니다. 젤리클 고양이들의 축제는 조금 다른 공존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젤리클 축제에 모인 고양이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제각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공간에 모여 축제를 엽니다. 축제를 여는 목적은 새로운 삶을 선물받을 젤리클 고양이를 선택하기 위해서지요. 이들을 축제로 엮어주는 틀은 그들이 유한하다는 사실입니다. 빛나던 시절은 다 가버리고 지금은 낡고 초라해져 버린 존재들. 그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필요합니다. 젤리클 축제는 이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축제인 셈이지요. 젤리클 고양이들은 자신들의 한계 때문에 한곳에 모이고 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함께 모이는 것이지요. 이런 형태는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가 이야기하는 무위無爲의 공동체를 연상케 합니다. 할 수 있음의 가능성으로 모이는 유위有爲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도, 너도, 이 한계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가능성이 아니라 한계로 서로와 소통하는 이들이야말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낭시는 말합니다. 공동체는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에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각자가 유한하면서도 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런 존재들이 함께 있음을 깨닫는 곳이 곧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가 우리에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억한다는 것
젤리클 고양이들의 모임이 무위의 공동체임은 그들이 젤리클 축제에서 선택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보면 더 확연해집니다. 그리자벨라가 그 주인공입니다. 젤리클 모임에 환영받지 못한 이였던 그리자벨라가 어떻게 젤리클 축제의 고양이로 선정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자벨라는 한때 잘나가던 아름다운 고양이입니다. 그를 설명하는 단어가 글래머Glamor임을 보면 그가 어떤 화려함을 누렸을지 상상이 갑니다. 하지만 화려함은 풀처럼 시드는 법. 이제는 늙고 누추해진 그는 과거의 기억을 노래합니다. 그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젤리클 고양이 중에 과거의 기억을 노래하는 또 다른 고양이가 있습니다. 바로 극장 고양이 거스입니다. 한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출연했을 정도로 무대를 주름잡았던 잘나가던 배우였습니다. 이제는 ‘고리 뛰어넘기’ 같은 재주만 인정받기에 늙은 배우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극장 고양이 거스는 과거를 추억합니다. 그에게 과거는 화려하고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것들은 그것을 몰라줍니다. 거스는 요즘 젊은것들을 한탄합니다. 자기 젊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이지요. 그에게 과거는 여전히 잊을 수 없는 현재형의 아쉬움입니다.
그리자벨라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거스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에게도 과거는 역시 화려함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회한이 서려 있지요. 과거는 행복했던 시간이기도 하지만, 불행했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행복이 가듯 불행도 갑니다. 과거의 시간은 달빛이지만 그리자벨라는 새벽빛의 시간을 고대합니다. 자기를 만져주는 손길이 있었을 때가 행복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에게 행복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기대할 것이 됩니다. 예전에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거든요. 지나간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이제는 무엇이 행복인지 압니다. 불행을 통해 깨달은 진실입니다. 그는 이제 새벽빛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그리자벨라의 그 유명한 뮤지컬 넘버 ‘메모리’는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추억은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이라고 하지만 모든 추억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추억은 기억해야 할 것을 지워버린 아름다운 속임수이기도 하니까요. 추억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기억, 그것은 상처와 연관됩니다. 사람들은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의 상처를 지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자벨라가 보여주는 태도는 그것과 다릅니다. 과거의 상처는 지워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지우기보다 애써야 하는 것은 그 기억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매이는 순간 기억은 멈춤이 되고 영원한 현재형이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독점하는 블랙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가 돼버립니다. 설사 그것이 아름다운 기억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아름다움에 매인 사람은 현재의 풍경이 모두 불행할 뿐입니다.
그리자벨라의 기억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집착이나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생성의 힘입니다. 그는 달빛의 세계에서 새벽빛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기억에 매인 자가 아니라 해석하는 자의 자리에 섬으로써 현재의 삶을 새로운 삶으로 시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메모리’는 그의 삶이 이미 다시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자벨라가 새로운 삶을 선물받는 젤리클 고양이가 되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기억을 새롭게 해석하는 사람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삶의 기회일 것입니다. 그리자벨라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환생이란 결국 이런 것 아닐까요?
<캣츠>는 고양이들의 이야기이자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젤리클 고양이들의 축제에는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많은 질문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양이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보석 같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2호 2023년 3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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