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이념과 사상이 전혀 다른 두 인물 몰리나와 발렌틴이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정일우는 자신을 여자라고 믿는 낭만적 감성의 소유자 몰리나 역을 맡아 2019년 <엘리펀트 송> 이후 5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에 섰다. 자신과 다른 듯 닮은 몰리나에게 한 발짝 더 가까워지기 위해 마지막 공연을 앞둔 지금까지 대본을 읽고 또 읽고 있다는 정일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난 1월 개막한 공연이 벌써 막바지에 이르렀어요. 지난 두 달간 몰리나로 살아본 소감이 어떤가요.
워낙 쉽지 않은 캐릭터라 연습 때부터 걱정이 많았는데, 이 작품에 도전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려운 마음이 컸지만 출연을 결심했어요. 처음 연습을 할 때는 ‘어떻게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수 있지?’라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계속 대본을 파고들고, 공연을 할수록 두 사람을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두 사람의 아픔이 짙게 묻어 있는 작품이라서, 공연이 끝나고도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질 것 같아요.
일우 씨가 생각하는 몰리나는 어떤 인물인가요?
유약하고, 유리알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면모를 지닌 인물이에요.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모습도 있고요. 그런 면이 저와 닮아서, 그런 부분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또,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인데, 그가 지닌 사랑의 애절함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몰리나는 발렌틴과 감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에게 사랑에 빠져요. 몰리나는 왜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발렌틴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지만 감옥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 그를 돕고 싶다, 아픔을 채워주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생겼을 것 같아요. 사실 몰리나의 사랑의 형태에 대해 연습할 때부터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도저히 모르겠어서 2015년에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발렌틴 역을 맡았던 정문성 배우에게 고민을 토로했는데, 정문성 배우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다른 차원의 사랑일 것이라는 대답을 하더라고요. 일반적인 연애의 감정으로 생각해서는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라고요. 그때부터 제가 풀지 못했던 부분들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몰리나는 자신이 여성이라고 믿는 인물이죠. 행동이나 말투 등 인물의 외적인 면모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몰리나 역을 맡은 배우마다 표현 방식이 다 달라요. 몰리나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고,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거든요. 저는 영화 <대니쉬 걸>의 에디 레드메인, <패왕별희>의 장국영을 많이 참고했어요. 자연스럽게 머리를 넘기거나, 눈동자의 떨림을 표현하는 등 작은 디테일을 통해서 몰리나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개인 유튜브 채널에 올린 브이로그 영상을 보니, 대본에 신비, 설렘 등 몰리나의 감정을 분석해 놓은 게 눈에 띄더라고요.
연습 시작하기 전부터 대본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어요. 연출님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요. 해외에서도 공연됐고, 앞서 몇 차례 공연된 작품이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의 인터뷰도 많이 찾아봤어요. ‘이 배우가 생각하는 몰리나는 이런 감정을 가졌구나’ 생각하면서 제가 생각한 것과 같은 점, 다른 점을 분석했죠. 그렇게 몰리나의 감정을 찾아갔어요. 대신, 다른 배우들이 연기한 영상을 찾아보지는 않았어요. 누군가가 표현한 몰리나를 본 순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 무엇보다 제가 바라보는 몰리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2010년 <뷰티풀 선데이>, 2019년 <엘리펀트 송>에 이어 세 번째 연극 무대예요. 연극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연기의 기본은 연극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연극반에 들어가게 되면서 처음 연기를 시작했는데, 연기를 하면서 ‘인생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매력에 빠져서 배우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캐릭터와 작품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다는 점이 공연의 매력이에요. 또, 드라마, 영화 작업을 하다 보면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무대 작업을 하면 관객분들께 바로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죠. 그 과정에서 배우로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그 ‘피드백’에는 호평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혹평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없나요?
100명의 관객이 있다면, 그들이 모두 저를 좋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좋지 않은 반응을 봐도 ‘이렇게 느낄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는 편이죠. 혹평으로 인해 제 연기가 흔들린 적은 없어요. 그러면 무대에 오롯이 서 있을 수 없거든요. 여담이지만, 공연 기간 중 매너리즘에 빠진 시기가 있어요. 살아있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반사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싶더라고요.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는 캐릭터에 100% 몰입을 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대본을 계속해서 다시 읽었어요. 정일우를 내려놓고, 오로지 몰리나로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기 위해서요. 그것보다 좋은 해결책은 없더라고요.
이제 공연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공연의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마음가짐이 있다면요.
우선 몰리나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깊이 있게 잘 표현하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노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 작품이 끝나면 좋은 작품으로, 더 자주 관객을 만나고 싶고요. 죽을 때까지 연기하는 게 제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