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을 맡은 베벌리 나이트&빌리 포터. 사진: Danny Kaan
지난 4월 6일,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2025년 올리비에 어워즈가 성대하게 열렸다. 1976년 ‘웨스트엔드 씨어터 소사이어티 어워즈’로 시작된 이 시상식은 1985년부터 영국의 전설적인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의 이름을 따 ‘올리비에 어워즈’로 명칭이 변경된 지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2017년부터는 로열 알버트 홀이 공식적인 개최지로 자리 잡았다. 이번 시상식은 <보디가드>, <시스터 액트>의 베벌리 나이트와 <킹키 부츠>의 롤라로 토니상을 수상하고 현재 <카바레>에서 엠씨 역을 맡고 있는 빌리 포터가 공동 진행을 맡아 <아가씨와 건달들>의 ‘Luck Be A Lady Tonight’으로 화려한 오프닝 무대를 선보이며 시상식의 서막을 올렸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벤자민 버튼>, <자이언트> 나란히 삼관왕
리젠트 파크 오픈 에어 씨어터에서 개막해 다음 달 바비칸 씨어터로 옮겨지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총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2018년 <해밀턴>의 최다 노미네이션과 같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수상은 톰 스컷(<카바레>로 지난 해 토니상 수상)의 무대 디자인상, 음향 디자인상, 뮤지컬 리바이벌상 등 3개 부문에 그쳤다. 돈마 웨어하우스의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위대한 혜성>은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소냐 역을 맡은 메이무나 메몬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데 그쳤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축하 공연 장면. 사진: Pamela Raith
또 다른 3관왕의 주인공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포크록 음악과 액터뮤지션 스타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남우주연상, 음악상, 최우수 뮤지컬상을 차지했다. 한국에서 ‘트릴로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연출가 제스로 컴튼이 8년간 개발해 오프 웨스트엔드에서 두 차례 공연한 뒤 현재 웨스트엔드에서 성황리에 공연 중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창작진. 사진: Joanne Davidson
연극 부문에서는 로열 코트의 <자이언트>와 알메이다 씨어터의 <더 이어스>가 각각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두 작품 모두에 출연하며 여우조연상 후보에 중복 지명된 로몰라 가레이는 <더 이어스>로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자이언트>는 로알드 달 역을 맡은 79세의 존 리스고가 남우주연상을, 톰 마슐러 역의 엘리엇 리비가 남우조연상을, 작품이 최우수 연극상을 수상하며 이달 말 예정된 재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존 리스고는 “지금처럼 미국과 미국인을 환영하기 복잡한 시기에 나를 받아줘서 감사하다”는 소감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연출상은 애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더 이어스>를 각색·연출한 노르웨이 출신의 여성 연출가 엘린 아보가 수상했다. 한 여성의 삶의 각기 다른 시기들을 다섯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작품이다. 연출상의 유일한 여성 후보였던 엘린 아보는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는 위대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 원작자 애니 에르노에게 공을 돌렸다.
뉴욕에서 건너온 오프 브로드웨이 신작 <타이타닉>이 코미디 작품상과 뮤지컬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의 연출 및 안무를 맡은 크리스토퍼 윌든이 안무상을 거머쥐었다. <올리버!>로 조명상을 수상한 폴리 콘스터블은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17번 후보에 올랐으며 올해로 6번째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그녀는 “공연을 올리는 데에는 마을이 필요하고 우리는 바로 그 마을”이라는 말로 씨어터 커뮤니티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올해 은퇴를 선언한 그의 수상은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안겼다.
연극 여우주연상은 <오이디푸스>의 레슬리 맨빌에게 돌아갔다. 맨빌은 “요즘 젊은 배우들이 영화와 매체로만 몰리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진정한 배우로서의 성장과 선택은 매일 무대에 서는 데 있다”고 조언했다. 뮤지컬 여우주연상은 <헬로, 돌리!>의 이멜다 스턴튼이 수상했다. 그녀는 5월부터 자신의 딸이자 넷플릭스 <브리저튼>에서 프루던스 페더링턴을 연기한 베시 카터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며, 최근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감사를 전했다.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위대한 혜성> 축하 공연 장면. 사진: Danny Kaan
축하 공연 하이라이트
는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서 마이클 잭슨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후 웨스트엔드 무대에도 오르고 있는 마일즈 프로스트가 공연의 오프닝곡인 ‘Beat It’을 선보이며 팝의 황제를 재현했다. <식스 더 뮤지컬>의 창작진의 신작인 <왜 나는 솔로일까?>(< Why Am I So Single? >)팀이 MZ 세대의 온라인 데이팅 문화를 포착해 낸 신나는 댄스 넘버 ‘8번의 데이트’ 넘버를 공연했고, <지붕 위의 바이올린> 팀은 작품의 문화와 전통이 가장 잘 느껴지는 결혼식 장면의 ‘Bottle Dance’ 넘버를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팀이 액터뮤지션의 앙상블 호흡을 자랑하는 ‘Shipping Out Tomorrow’ 무대를 연출했다. 어쿠스틱한 사운드와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작품의 세팅과 테마를 엿볼 수 있는 인상적인 무대였다. 새로운 버전으로 극장을 개조해 공연 중인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는 러스티와 스타라이트의 발라드 멜로디 ‘I Am The Starlight’를 연출했다. 장소의 한계 때문에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빠르게 경주하는 기차를 연기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작품의 중심에 있는 따뜻한 메시지의 의도가 느껴지는 감동적인 무대였다.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위대한 혜성> 팀은 참신한 콘셉트와 해석이 돋보이는 훌륭한 프로덕션이었는데, 축하 공연으로 ‘발라가’와 ‘소냐 얼론’을 선보여 선곡이 흥미로웠다.
<레미제라블> 축하 공연 장면. 사진: Pamela Raith
어워즈의 마무리는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레미제라블>이 꾸몄다. 카메론 매킨토시는 감사 인사와 함께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명작을 쓰는 데에는 AI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며, AI와 첨단 기술을 활용한 예술 교육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한 영국 정부의 교육 정책을 따끔하게 비판했다. 판틴을 연기한 루시 존스, 레이첼 앤 고, 에포닌을 연기한 샨 아코, 나타니아 옹 그리고 자베르로 공연 중인 브래들리 제이든이 하이라이트 메들리로 무대를 장식했다.
반가운 얼굴들과 시의적 메시지
개인적으로는 한국 공연계와 연이 있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보여 뜻깊었다. 정영두 연출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한국적 소리로 해석한 국립창극단 <리어>로 오페라 최우수 업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수상은 아쉽게도 불발됐다. ‘트릴로지 시리즈’의 제스로 컴튼 연출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선전했고,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로 의상 디자인 상을 수상한 가브리엘라 슬레이드는 <식스 더 뮤지컬>의 의상 디자인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22년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공연했던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담당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으로 뮤지컬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리브 안드루시어는 2022년 <인사이드 윌리엄> 런던 워크숍에 참여했고 2023년에는 <레드북> 런던 워크숍에서 안나를 맡은 바 있다. 필자가 한국에서 연출했던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의 작가 태티 헤네시는 새로운 버전으로 각색한 <동물농장>을 선보여 독립 극장 상에 후보로 올라 무대를 빛냈다.
올리비에 어워즈는 미국의 토니 어워즈와는 확실히 다른 영국적 정체성을 지닌다. 군더더기나 시간 끌기가 전혀 없는 간결함은 물론, 수상자가 발표되고 무대로 이동하는 동안에 수상하지 못한 다른 후보들의 얼굴을 여과 없이 클로즈업 샷으로 보여주는 냉정한 관습도 고수한다. 축하 공연에서도 세트나 대도구는 거의 활용하지 않고 영상과 조명으로만 무대를 연출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공동체 정신은 더욱 깊고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상업 작품뿐만 아니라 독립 극장, 오프 웨스트엔드 작품, 오페라, 무용, 가족극까지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는 시상식은 진정한 공연 예술인의 축제로 느껴진다.
화려한 조명과 빛나는 무대 뒤에서 가장 뚜렷하게 울려 퍼진 것은 감사와 연대의 목소리였다. 수상자부터 시상자, 그리고 진행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무대 뒤에서 극장을 움직이는 숨은 영웅들— 기술팀, 무대팀, 의상 분장팀 등 무대를 떠받치는 백스테이지 스태프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진심 어린 감사를 계속해서 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상식은 단순한 축하의 자리만은 아니었다. 공연계를 둘러싼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많은 이들이 재정난과 관객 감소, 그리고 예술과 예술 교육에 대해 계속해서 줄어드는 정부의 지원 부족을 언급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조명했다. 화려한 무대 위 조명이 빛나는 순간에도, 진짜 공연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뜨겁게 뛰고 있으며, 그 심장은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