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이경성의 무대는 자유롭지만 묵직하다. 문학적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예술 장르를 결합한 실험적인 무대, 그럼에도 이는 현실에 기원하고 있어 쉽게 산화되지 않는다. “큰 힘이 됐어요. 그동안 제 작업의 의미들이 어느 정도 공유가 됐다는 뜻이니까요.” 올해 제5회 두산연강예술상에 이름을 올린 그는 담담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소감을 전했다. 그리고 늘 그러했듯 연극을 통한 소통을 이어갈 것이다.
이경성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피어오른다. 그래, 현실보다 더 극적인 것이 어디 있겠어! 예술이란 것이 본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지만, 그의 무대는 유독 철저한 무에서 시작한다. 작가가 쓴 희곡을 지도 삼아, 연출가가 길을 찾아나서는 일반적인 연극의 방식,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연극은 이와 다르다. 기존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은 만큼 그의 무대는 자유롭다. 흥미로운 것은 무에서 시작하지만, 그 무가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것! 현실과 밀접히 맞닿아 있는 사유와 행동, 그것이 뒤섞이며 이경성의 연극은 처음부터 하나씩 새로 쓰인다.
“미술 분야는 작가 스스로가 세상을 보고 그것을 텍스트로 삼아 작품을 만드는데, 연극은 문학적 텍스트를 거치는 과정이 창작자로서 백 퍼센트 만족스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본 세상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죠. 문학 언어를 연극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연극 언어 자체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희열을 줘요.” 이경성과 그의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키가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2010년 <도시이동 연구 혹은 연극-당신의 소파를 옮겨 드립니다>(제47회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 수상작)이다. 광화문 일대에 괴물녀를 출몰시켜 화제를 모은 이 독특한 공연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특정 공간이 지닌 사회적·정치적 맥락을 전하기 위해 철저한 현장 답사와 자료 조사를 거쳐 이루어진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올해, 그는 일련의 실험적인 작업들로 제5회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았는데, 그중 다시 한 번 광화문을 무대로 삼은 도전도 눈에 띈다. 제16회 서울변방연극제 개막작인 <25시-나으 시대에 고함>, 인권운동가, 학생, 정치인 등 다양한 계층의 24인이 한 시간씩 릴레이 1인 시위를 펼치는 프로젝트였다. “광화문이 4년 전과 너무 달라졌더라고요. 예전엔 광장 자체가 일상적인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된 거죠. 그래서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진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한 평 공간을 만들었어요. 또, 그날은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 양의 아버지가 단식을 처음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거든요, 그 현장을 마주하며 바라본 광화문의 풍경이 정말 인상적이었죠.”
이경성의 작업들은 지금 이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만큼 울림도 크다.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질문이 있어요. 연극이란 뭘까? 연극이 이 시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제 작업들은 이런 고민에서 출발해요. 많은 예술 장르 중에서도 연극은 우리 현실에 대해 성찰하고 질문할 수 있게끔 시간을 직조할 수 있잖아요. 동시대에 존재하면서 계속 현실을 붙잡고, 또 현실을 이탈하면서, 우리에게 계속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니까. 그래서 전 현실과 맞닿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연극을 만들고 있어요.” 그런 만큼 그의 작품들에는 현실을 향한 질문들이 촘촘히 채워져 있는 것이다.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내가 이 질문을 정말 궁금해하나? 스스로에게 중요하지 않으면 이걸 굳이 나눌 필요가 없잖아요. 이 질문이 정말 진정성이 있어야, 그것을 관객들과 나눌 수 있고, 또 결과가 실패하더라도 의미가 있거든요.” 이러한 진정성은 그의 최근작들에도 자연스레 녹아있다. <서울연습-모델, 하우스>는 도시,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은 현대사와 한 개인,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은 극장에 대한 질문들을 품고 있는 작품들. “고등학교 동창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연극은 안 봐도 그만이지만, 이가 아프면 치과는 꼭 가야 되지 않느냐고. 그럼 극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풀어야 평생 연극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이런 지점에서 <남산 도큐멘타>를 시작할 수 있었죠.”
이경성의 질문과 고민은 비단 사유에만 그치지 않고, 행동과 실천으로 힘껏 나아간다는 점에서, 내일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지난 7월, 자택의 방을 헐어 작은 극장을 하나 만든 획기적인 일 또한 현재의 고민에서 비롯된 것. “연극 한 편을 만드는 것이 점점 복잡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을 즐겁게 하고 싶은데, 요즘은 제작부터 홍보, 유통 등이 시스템화 되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을 덜어내고, 핵심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이를 하듯.” 그래서 그는 특별한 무대 장치도 없고, 꽉꽉 채워도 15명 남짓 들어가는 공간으로 관객들을 초대했다. “작은 공간에서 피부와 공기와 이야기를 밀접하게 나누는 것만으로도 연극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어요.” 나아가 이러한 경험은 일회성의 감동이 아닌, 앞으로 그의 꿈과 단단히 연결돼 있어 의미를 더해 준다. “큰 꿈은, 연극을 보러 가는 행위 자체가 이 사회에서 필수적인 시간으로 여겨지는 문화적 풍토를 만드는 것이에요. 연극을 보고 질문을 품는 시간들이 누군가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는 것! 어떤 작업을 하더라도 큰 틀에서 이런 현실들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만들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4호 2014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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