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를 붙이던 남자 따라 간 사연
때는 1993년, 장소는 명동 전철역. 거기서 마주친 벽보 붙이던 한 남자. ‘오! 잘생겼군, 잘생겼어.’ 오뚝한 콧날, 절도 있고 단호한 이미지. 한마디로 말해 참 배우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 그가 벽에 붙이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배우 학교 단원 모집 전단. 잘생긴 남자를 만나려면 저런 데를 가야 하나? 하지만 당시 난 의상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었고, 뮤지컬엔 관심이 없었으므로 내용을 쓱 한번 훑어보고 내 갈 길을 갔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도 그가 눈에 아른거렸다는 거다(그 남자가 누구였냐면, 배우 서영주다. 본인은 자기가 아니었다고 우기지만! 웬만한 배우들은 다 아는 사연인 걸. 요즘은 영주 오빠가 잘생긴 줄 모르겠지만 당시엔 남자 취향이 그랬다). 별 수 있나. 다시 그 장소로 갔지. 포스터는 절반 이상이 찢겨나간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연락처는 남아있었다. 연락처 위로 적혀 있는 지원 자격 요건은 다음과 같았다. 노래, 춤, 연기에 능력이 있는 자. ‘노래? 학창시절 중창단 단장 경험이 있으니 충분하고, 춤? 에어로빅 강사 경력이 있으니 됐고, 연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하면 되지!’ 그렇게 무작정 오디션을 보러 갔다. 그런데 거기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예쁘고, 늘씬하고… 기가 팍 죽었지만 운이 따라준 건지 오디션 지정곡에 ‘Think of Me’가 있지 뭔가. ‘Think of Me’라면 성당 오빠가 선물해준 <오페라의 유령> LP판 덕분에 아주 잘 외우고 있던 노래였다. 물론 잘 부른다는 자신감도 있었고. 심사 위원이었던 윤호진 대표님, 윤석화 선생님, 이상우 선생님 앞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감사하게도 내 노래를 끝까지 들어주셨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때 윤호진 대표님이 하셨던 말씀, “너처럼 생겨서 붙여준 거야.”
예상지 못한 계기로 시작한 배우 연수생 생활. 대형 제작사 에이콤에서 운영하는 배우 학교였던 만큼 최고의 강사진에 커리큘럼은 또 얼마나 빡빡했는지 모른다. 매일 아침 8시 30분까지 출석해서 저녁 7시까지 배우가 되기 위한 기본 트레이닝을 받았으니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배우 생활 밑천은 그때 다 얻은 것 같다. 그렇게 8개월가량의 트레이닝을 거친 후 창작뮤지컬 <스타가 될거야>의 오디션 기회가 주어졌다. 요즘 유행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보다 더 살벌했다. 워크숍 공연 과정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짐을 싸서 돌아가고 그랬으니까. 그래도 그 시절엔 그저 재미있었고, 뭐가 뭔지도 모른 채로 정말 열심히 했다. 매일 열심히 땀을 흘린 후 맥주 한 잔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왠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둥둥 떴다. 첫 공연을 마친 후의 느낌? 솔직히 생각만큼 떨리지 않았다. 배우의 길로 들어선 이유도 그거다. 적당히 긴장하면서 즐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6년 동안 늘 무대를 지킬 수 있었던 것 역시 같은 이유 아닐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8호 2011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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