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웨이에서 걸어 나올 것처럼 <햄릿>
<모차르트!>, <클레오파트라>,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키스 미 케이트> 등의 작품을 통해 서양 고전 의상을
무대에서 충실하게 구현해 내던 한정임 의상디자이너가 가죽점퍼와 블랙 진의 <햄릿>과 만났다. 동시대적인 트렌드와 감성에 충실한, 현대적인 의상으로 돌아온 <햄릿>에 대해 한정임 의상디자이너에게 들었다.
‘우리들이 느끼는 트렌드와 감성을 잘 살린 모던함’이 이번 <햄릿> 의상의 가장 핵심적인 컨셉이다. <햄릿>은 이미 너무 유명한 고전이라 연출가인 로버트 요한슨과 나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것에 주력하고자 했다. 이전 작품이 클래식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이번에는 모던하고 심플하면서도 강조할 포인트를 강하게 어필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디자이너에 따라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나는 대본보다는 음악을 먼저 듣는다. 나로서는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먼저 해석하고 스토리에 들어가야 캐릭터가 잘 보이고, 비주얼적으로 어떻게 풀어내야 캐릭터가 관객들에게 잘 이해가 되겠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는 어떤 한 가지에서 얻기보다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중에 우연히 본 잡지나 책, 역사적인 자료,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 캐릭터를 표현한 방법을 조사하다 얻기도 했다. 약 6개월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지난여름부터 정리된 생각을 모아 스케치를 했고, 연출가와 인터넷 영상 미팅을 통해 하나둘씩 결정해 나갔다. 본격적으로 의상 제작에 들어간 후에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캐릭터에 맞는 소재와 컬러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소재와 실루엣을 살리기 위한 패턴을 결정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캐릭터가 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이 소재가 어울릴까?’를 고민하게 되고, 이것이 잘 정리되어야만 우리가 생각한 이미지에 가까운 옷이 나온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으로 극 전반을 대표하는 소재는 ‘울(Wool)’이다. 시공간적인 조건이 유럽 북부의 추운 지역인 덴마크의 겨울이라 계절성을 나타내기도 좋고, 복수극이 주는 차가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도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이 느낌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이 선왕의 장례식 신이다. 극의 오프닝이면서, 복수극의 시작을 알리고 극 전반의 느낌과 전개 방향을 보여주는 신이라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덴마크, 겨울, 복수극의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울 소재와 블랙 컬러를 사용했다.
소재 면에서 조금 더 디테일하게는 캐릭터마다 그를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따로 잡았다. 햄릿을 예로 들면, 그는 고민하는 젊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블랙 진과 잘 어울리는 거친 느낌의 검은 가죽을 사용하는 한편, 그가 입은 코트와 조끼의 뒷면에는 찢겨진 붉은 가죽 십자가를 새겨 넣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무너져 가는 덴마크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의미에서다. 또한, 셔츠의 단추 모양을 십자가로 하면서 연관성을 주려고 했다. 한편, 이번 <햄릿> 의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강한 컬러감을 살린 염색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클라우디우스와 거투르트의 웨딩 신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보통의 웨딩 신이 파스텔 톤의 따뜻한 느낌이라면 이 작품에서는 이후 불행을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등장인물들이 보라, 초록, 파랑 등 아주 짙은 차가운 색상의 실크 옷을 입는다. 디자인은 심플하게 하는 대신 실루엣을 잘 살릴 수 있는 소재감을 가진 실크에 컬러 염색을 해, 색감에 신경을 썼다.
가장 어려웠던 과제는 바로 ‘유령의 옷’이었다. 연출가와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다 생각이 미친 것은 ‘LED’였다. <아이다>에서도 모자에 사용되기도 했고, 패션쇼 의상에서도 전자 칩으로 LED 를 썼다. 이를 참고로 우리도 시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LED 전기를 의상에 접목한다는 것은 특수효과 전문가와 함께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배우가 갑옷을 입고, 왕관과 가면, 팔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특수 LED 의상을 쓰고, 위에 갑옷을 하나 더 입고, 스위치를 누르면 눈과 입, 어깨와 가슴의 십자가 부분에 붉은 불이 들어온다. 의상에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어려움뿐 아니라 더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연출가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섬뜩한 느낌을 원했고, 이 느낌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조명 팀과 영상 팀, 음향 팀, 의상 팀이 함께 고민해 종합적으로 유령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무대에서 잘 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총 130~140세트의 의상과 액세서리를 디자인했던 이번 <햄릿>은 패션을 전공한 내 노하우을 살릴 수 있어 더 즐겁게 했던 작업이었다. ‘새로움’에 대한 고민으로 전 세계 어느 <햄릿> 프로덕션에서도 하지 않았던 다양한 시도들을 해볼 수 있었다. 이는 연출가 로버트 요한슨과 조명, 음향, 영상 등 각 분야의 전문가 분들과 함께 끊임없이 해결점을 찾아가기 위해 나눴던 이야기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피의 복수를 암시하는 붉은 장미가 뒤에 달린 거투르트의 웨딩드레스, 죄의식을 화려함으로 감추려는 클라우디우스의 자켓, 넋이 나간 후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의 들꽃을 두른 오필리어의 그라데이션 원피스 등 이번 작품에서는 의상에 많은 의미를 담고, 이를 통해 최대로 캐릭터를 표현해보려고 시도했다. 의상 팀 입장에서는 ‘캐릭터는 의상을 입었을 때 100% 완성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나의 의상이 배우들이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배우가 의상을 입고 ‘온전히 그 캐릭터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가 디자이너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8호 2011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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