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쓰릴 미>의 팬들이 연출가와 제작사를 상대로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마니아들이 해당 작품을 반복적으로 관람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데 대해 연출가가 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곱지 않은 시선을 드러낸 것이 발단이 됐다. 결국 제작사의 공식 사과로 사태가 일단락됐고, 이번 사태를 통해 <쓰릴 미>에 대한 마니아들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눈에 띄게 많은 마니아를 양산했던 작품들은 존재했다. 국내 뮤지컬계에서 어떤 작품의 무엇이 마니아들을 홀렸을까.
한국 뮤지컬 시장의 성장과 함께한 마니아
1994년에 초연한 <지하철 1호선>이 2008년에 4,000회 공연을 맞기까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꾸준히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작품 특유의 주제 의식과 감동에 기인하는 바가 컸으나, 한 작품을 수십 번 이상 관람하며 힘을 보태준 마니아의 공도 컸다. 그들은 ‘학전 온 더 대학로’와 ‘곰보네’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연 정보와 후기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작품의 애정을 키워갔다. 한국 뮤지컬계에 최초로 생긴 작품 팬클럽으로 ‘베르테르를 사랑하는 모임(베사모)’을 꼽을 수 있다. 베사모는 2000년에 초연한 창작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팬클럽이다. 뮤지컬을 서양에서 들여온 화려한 쇼 정도로만 알던 당시의 관극 분위기에서, 문학에서 빌려 온 짙은 멜로드라마는 관객들에게 생소하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창작뮤지컬을 만난 데 반색한 마니아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더 나은 작품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했다. 베사모를 비롯한 2000년대 초반의 뮤지컬 동호회는 장르 자체에 애정을 갖고 스터디를 통해 뮤지컬과 더욱 가까워졌고, 점차 커지고 있는 국내 뮤지컬 시장의 발전에도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라이선스 뮤지컬보다 창작뮤지컬에 힘을 실어주고자 했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마니아들은 그에 더 큰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1호선>은 독일 작품이지만, 각색과 연출 면에서 창작에 준하는 노력으로 재탄생했다.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스타일의 완성도 높은 창작뮤지컬들이 뮤지컬 마니아들의 취향을 만족시켰고, 마니아들은 그런 작품에 많은 지지를 보냈다.
영미권의 유명한 라이선스 뮤지컬과 창작뮤지컬이 우루루 쏟아지던 2005년, 그동안 선보인 뮤지컬 원산지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작품이 소개됐다. 프랑스에서 온 <노트르담 드 파리>는 영미권 뮤지컬과는 확연히 다르게 프랑스 명작의 방대한 서사를 생략하고 압축하되, 드라마틱한 음악과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춤을 더해 상징적이고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고급스럽고 예술적이라는 작품 내적 요인에 더해, 처음 맛보는 프랑스 뮤지컬의 관람 문화가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뮤지컬 공연장 내에서의 엄격한 주의 사항 중 사진 촬영 금지가 이 공연의 커튼콜 때는 해제되었고,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커튼콜 무대가 시작되면 뒷자리의 관객들도 무대 앞으로 뛰어나가 배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손을 잡으며 그들과 함께 호흡했다. 열광적인 호응을 실감한 프랑스 배우들 역시 공연 후에 그들을 기다리는 팬들에게 친절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사인 요청에 응했다. 마니아들의 호응과 요청으로 성사된 두 번째 내한 공연과 라이선스 공연까지, <노트르담 드 파리> 역시 국내의 마니아 뮤지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국내에서 2005년에 초연한 <헤드윅>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헤드헤즈’를 양산한 대표적인 마니아 뮤지컬로, 트랜스젠더 록 가수가 대부분의 극을 혼자 이끌어간다. 소재나 형식 등 작품 내적인 면에서 비주류적이다. 뮤지컬로 제작되기 전, 원작 영화 역시 이미 열광적인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던 작품이다. 영화에서 보았던 아름답고 슬픈 영혼의 헤드윅이 한국 공연에서 네 명으로 분화했고, 초연 이후 재공연될 때마다 헤드윅 역을 거쳐간 배우들이 늘어나면서 마니아 숫자도 함께 세포 분열을 이루었다. 작품 자체의 마니아적 성향과 멀티 캐스팅 시스템이 합쳐져, 마니아 뮤지컬로서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졌다.
남성 2인극이 주는 매력
만약 그런 게 있다면, ‘한국 마니아 뮤지컬 역사’에서 <쓰릴 미>를 빼놓을 수 없다. 2007년에 국내 초연한 <쓰릴 미>는 류정한과 최재웅, 김무열이라는 이름 있는 배우들이 출연하긴 했으나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었다. 이전까지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살인공모 스릴러에 동성연애, 2인극, 연주는 단지 피아노뿐, 이것은 완벽한 레어 아이템이었다. 이에 인기 배우의 변신과 재발견이 더해져 예상치 못한 인기를 모은 이 작품은 이후 매년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마니아들 역시 이 작품의 역사에 동반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쓰릴 미>와 함께 ‘보고 또 보고’ 열풍의 중심에 있는 작품은 두 남자의 오랜 우정을 훈훈하게 그린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이다. 2010년 초연에 이어 두 차례 공연되어 <쓰릴 미>에 비하면 역사가 짧지만, 초연 때부터 단번에 반복 관람작의 기대주로 올라섰다.
<쓰릴 미>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즐겨보는 한 뮤지컬 마니아는 드라마 속에 숨겨진 콘텐츠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라면 반복해서 보게 된다고 말했다. 두 작품 모두 드라마가 탄탄한 연극적인 뮤지컬이라, 볼 때마다 드라마의 서브 텍스트를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고. 자신만의 감상과 정보가 쌓일수록 작품과 관객 사이의 유대감은 깊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더욱 애착을 갖게 된다. 하지만 두 작품의 마니아가 많은 이유는 텍스트 자체가 지닌 매력보다 외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우선적으로 관객들이 한 작품을 반복적으로 보는 이유는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기 때문이다. 문화 예술을 향유함과 동시에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멋진 남자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은 반복 관람을 부추긴다. 좋아하는 작품에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것을 여러 번 보아도 여전히 갈증이 느껴질 때,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다른 캐스트의 연기를 보고 비교함으로써 좋아하는 배우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이때, 또 다른 멋진 배우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이런 관람 욕구를 반영한 결과가 멀티 캐스팅이다. 공연의 특성상 같은 사람이 출연해도 결과물이 매번 조금씩 상이한데, 다른 출연진의 공연은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여 마니아들은 또 이끌리듯 공연장에 갈 수밖에 없다.
멋진 남자 배우가 출연하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유독 남성 2인극인 두 작품이 마니아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는 관객이 사랑하는 캐릭터가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애정을 표한다는 설정이 여성 관객의 만족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더불어 관객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또한, 단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둘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는 드라마는 연애극으로 대체해도 무방한 것이라 동성 로맨스물을 보는 느낌을 준다. 국내 젊은 여성들이 동성애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은 만화나 영화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일상적인 동성애 드라마가 갖는 환상성과 거기서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은 흔한 이성 간의 로맨스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다. 두 작품이 만들어진 의도는 다른 데 있다 하더라도, 소비되는 성향은 어느 정도 동성애물의 인기 요인과 접점이 있다.
새로운 마니아 뮤지컬의 출현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의 인기를 이을 작품은 <풍월주>로 예상된다. 올해 상반기에 초연될 <풍월주>는 작품 개발 과정에서 리딩 공연을 통해 일부 관객에게 소개됐는데, 신라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 남자 기방이라는 가상의 설정을 두고 두 남자 기생의 애틋한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모습을 드러낸 후, 실제로 마니아들이 그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대상에 빠져들어 즐기는 마니아라면, 많은 사람들이 두루 즐기는 것보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은 숨은 보석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지난 십여 년간의 시장 확대와 함께, 한 해에 볼 수 있는 뮤지컬은 백오십 편을 넘어섰다. 그중에 마니아들이 애정으로 키워낸 작품이 탄생한다. 마니아의 구미를 당기는 다음 작품은 어떤 스타일일지 궁금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파격적이고 새로운 작품이라면 일단 후보에 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1호 2012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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