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꿈꾸었던 평화, 통합 뮤지컬의 등장 <오클라호마!>
흔히 역사를 강에 비유하곤 한다. 유유히 흐르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무수한 흐름들이 생성되어 더 큰 흐름을 만들어 가기도 하고 이내 소멸되기도 한다. 그렇게 형성된 조그마한 흐름이 갑자기 큰 흐름으로 변하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한순간의 변화 같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준비되고 있었던 흐름, 이 코너에서는 뮤지컬 역사를 바꾼 10개의 결정적 순간을 통해 뮤지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첫 여행은 스타 캐스팅보다 대본의 힘을 믿고 대본과 음악, 안무, 무대 등 다양한 요소를 유기적으로 통합한 뮤지컬을 선보이며 하나의 기준을 만든 <오클라호마!>가 개막한 1943년으로 떠난다.
많은 군인들은 <오클라호마!> 속 무대 위의 평화로운 마을을 보며,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가치를 되새겠다.
뮤지컬의 새로운 아침을 밝히다
<오클라호마!>는 1943년 3월 브로드웨이 세인트 제임스 시어터에서 초연하며 뮤지컬 황금기 시대의 문을 연 작품이다. 린 릭스(Lynn Riggs)의 연극 <그린 그로 더 라일락스(Green Grow the Lilacs)>를 뮤지컬로 각색한 이 작품은 1906년 클레르모어의 외곽에 있는 오클라호마를 배경으로 카우보이 컬리와 농장의 소녀 로리의 로맨스를 보여준다. 1955년 만들어진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으면서, 이 작품은 널리 알려져 미국민이라면 대부분 잘 알고 있고, 학교와 다양한 공동체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작품으로 자리하고 있다. 초연 이후 꾸준히 리바이벌되었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방법은 트레버 넌이 총 연출을 담당하고, 수잔 스트로먼이 안무, 휴 잭맨이 출연한 1998년 웨스트엔드 리바이벌 프로덕션의 DVD를 통해서다. 지금 보면 현재의 뮤지컬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보이지만, 초연 당시 이 작품은 기존의 뮤지컬과는 다른 외양과 내용으로 뮤지컬사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북 뮤지컬, 뮤지컬 플레이, 통합 뮤지컬 등의 주요 키워드를 남겼다.
전쟁에 핀 뮤지컬의 꽃, <오클라호마!>
이 작품이 개막한 1943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지루하게 진행되던 중이다. 집집마다 자식과 남편, 애인이 전장에 있었고, 1941년 진주만 공습 등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겪으며, 이 지루한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채 미국 사회가 불안에 떨고 있는 때였다. 한편, 전쟁은 오히려 미국을 하나로 만드는 매개체였다. 미국은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 많은 전쟁을 거치며 다양한 민족이 모여 건설된 나라이기 때문에 늘 인종 간, 지역 간, 출신 간 사회 통합이 중요한 나라였다. 미국이란 깃발 아래 사회 통합을 꿈꾸기에 전쟁은 적절한 도구였다.
뮤지컬은 드라마와 노래, 춤이 무대에서 종합적으로 펼쳐지는 장르이고, 뮤지컬에서 추구하는 세상 자체가 이상적이고, 평화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 통합을 은유하기엔 더 없이 좋은 장르였다. 이때 등장한 <오클라호마!>는 기존의 쇼 중심의 뮤지컬과 달리 탄탄한 스토리와 가사를 기초로 노래와 안무 등이 고르게 제 역할을 다 하는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다. 카우보이와 농부의 대립과 화합, 사랑과 평화 등의 미국인들에게 친숙한 자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여기에 노래와 춤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타면서 <오클라호마!>에 굉장히 큰 인기를 가져다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수의 군인들이 휴가 때마다 이 작품을 보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군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군인이 등장해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프로파간다 스타일의 작품은 이미 1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고, 그때는 그게 통했을지 모르지만, 30년이 지난 <오클라호마!>의 시대에는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오히려 오클라호마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며 전장에 나가 있는 군인들이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를 되새기는 역할을 하며 ‘평화’를 통해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힘을 실었다. 그렇게 군인들과 그의 가족들, 친구들이 보면서 평화라는 가치 아래 하나가 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통합 뮤지컬, 새로운 스탠더드의 출현
<오클라호마>는 뮤지컬 장르 안에서도 새로운 형식미를 구축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927년 <쇼 보트>의 대본과 가사 작업을 통해 개연성 있는 스토리로 극이 전개되는 ‘북 뮤지컬’의 문을 연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와 1920~30년대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맹활약했던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의 만남은 <오클라호마!>라는 혁신적인 결과물을 낳는다. 이 콤비를 본격적으로 북 뮤지컬 시대의 중심에 뮤지컬 황금기를 열게 한 이 작품은 최초의 통합뮤지컬이자 대본과 가사, 음악이 모두 미국의 정서와 상황을 반영하는 제대로 된 아메리칸 포크 오페라라 할 수 있다.
뮤지컬은 드라마, 음악, 캐릭터, 쇼, 춤 등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통합 뮤지컬은 전체적으로는 각 장면마다 이런 여러 요소가 골고루 배치되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고르게 이루어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어메리칸 포크 오페라는 조지 거슈윈의 <포기와 베스>를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북 뮤지컬의 기반 위에 고전적인 클래식 오케스트라 편성에 미국의 재즈를 도입하며 완성도와 대중성을 함께 높이고자 했던 형식이다. 로저스의 음악이 유럽적 형식에 많이 기대고 있지만, 컨트리 음악을 차용하기도 하는 등 미국적인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 작품이 나올 당시에는 오페라를 변형한 ‘길버트와 설리반’식의 코믹 오페라와 짧은 이야기들을 연속으로 보여주는 보더빌 스타일의 뮤지컬이 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흥행적으로는 배우의 스타성이 굉장히 중요해 어떤 배우가 어떤 역을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퀄리티가 달라지는 상황이었고, 소재적인 면에서는 쇼와 쇼 피플, 백 스테이지 등 화려함과 재미를 보여줄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스토리를 다뤘다. <오클라호마!>같이 미국 사회의 단면을 다룬 작품은 많지 않았다. 스타에 초점이 맞춰져 그들의 화려한 삶이 중심적으로 다뤄졌던 기존의 뮤지컬과 달리 <오클라호마!>는 미국이란 사회를 축소해 그 안에서 개인의 삶을 다루며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탄탄하게 펼쳐내었다.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1900년대 초반, 미국의 중남부 오클라호마의 농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카우보이 컬리와 농장주의 조카 로리의 러브 스토리를 기초로 흘러간다. 컬리는 학교 건립을 위한 경매 행사와 댄스 파티에 함께 갈 여자와 마차를 구하는데, 내심 로리와 함께 가고 싶어 하지만 둘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속마음을 숨긴 채 서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티격태격한다. 한편 로리의 농장 훈제장에 사는 어두운 성격의 일꾼 주드 프라이는 오래 전부터 로리를 짝사랑해 자신이 로리와 함께 갈 생각을 한다. 로리는 컬리에 대한 반항심으로 주드와 함께 가기로 약속한다.
또 하나의 로맨스를 보여주는 것은 로리의 친구인 에이도 애니와 카우보이 윌 파커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잘해 주는 남자를 거절하지 못하는 캐릭터인 애니에겐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 캔자스 시티에서 탄 50달러의 상금을 털어 선물을 사온 윌 파커가 있다. 하지만, 결혼보다는 유희에 더 관심이 많은 페르시아 행상 알리 하킴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애니의 아버지는 현금이 아니면 결혼 지참금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윌을 내쫓고, 한편으로는 알리 하킴을 총으로 위협해 결혼 약속을 받아낸다.
그 사이 로리가 주드와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컬리는 로리를 만나 마음을 돌리려 하지만, 로리는 주드가 두려워 컬리의 제안을 거절한다. 화가 난 컬리는 훈제장으로 달려가 주드에게 시비를 걸다 서로 총으로 위협하며 충돌 직전까지 간다. 컬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주드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들어하던 로리는 잠이 들고, 컬리와 결혼하려다 컬리가 주드에게 죽임을 당하는 악몽을 꾸게 된다.
기다리던 파티 날, 경매장에서 카우보이와 농부들의 말다툼이 일어나고 이는 앨러 부인에 의해 수습된다. 이 자리에서 애니와의 결혼을 피하려는 하킴은 윌이 캔자스 시티에서 사온 선물을 구입하며 결혼 지참금 50달러를 현금으로 건네고 윌에게 다시 애니와 결혼하라고 한다. 한편 마을의 처녀들이 각자 음식을 만들어 넣은 바구니 경매가 시작되고, 로리의 바구니를 두고 컬리와 주드 사이에 경매 경쟁이 붙는다. 그 자리에서 컬리는 안장과 말, 총 등 카우보이의 전 재산을 판 돈으로 간신히 주드를 이긴다.
그날 밤 주드는 로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로리가 거절하자 무력으로 위협한다. 이에 로리는 주드를 해고하고, 그는 앙심을 품고 떠난다. 놀란 로리는 컬리를 찾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3주 후, 두 사람은 동네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는데, 갑자기 술 취한 주드가 들이닥쳐 컬리를 칼로 찌르려 한다. 그는 싸움 중 자신의 칼에 스스로 찔려 숨을 거두게 되고, 마을 회의에서 컬리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로리와 함께 행복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된다.
(좌)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중) 아그네스 드밀 (우) 리처드 로저스
대본 중심, 유기적 통합
당시 뉴욕타임즈는 “오프닝 넘버인 ‘What A Beautiful Mornin’이 뮤지컬의 역사를 바꿨다”라고 평했다.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오클라호마!>의 오프닝은 당시에는 뮤지컬보다는 연극에 가까웠다. 기존의 뮤지컬 작품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무대에 나와 합창을 하거나 노래로 각 캐릭터에 대해 소개하며 오케스트라의 서곡으로 시작했다면, 이 작품은 ‘What A Beautiful Mornin’이라는 컬리의 솔로 곡으로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래 전에 앨러 이모가 홀로 물레를 돌리며 시작하는데, 이런 조용한 시작은 당시의 관객에겐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줬다는 것이다. 원작을 희곡에서 찾았다는 점, 작품의 시작이 연극적이라는 점은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코미디가 아니라 극(play)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주 주효했다.
이 작품의 드라마와 가사는 완벽하게 매치되어 흘러간다. 대본과 가사 작업을 한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는 뛰어난 작가이자 작사가였다. 그의 가사에는 드라마가 잘 녹아 있고, 드라마에도 음악적인 부드러움이 잘 배어있다. 노래가 끝이 나도 여운이 남아있고, 그 여운을 안고 다음의 드라마로 부드럽게 진행된다. 대본이 공연을 이끌면서 공연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이전의 작품에서는 유명 배우의 비중이 커서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는 쇼로 극의 흐름을 끊는 일이 많았다면, <오클라호마!>부터는 플롯과 배역에 맞는 연기, 가사와의 유기적인 관계가 매우 중요해져서 아무리 스타라 해도 작품 안에서 배역에 집중해야만 했다.
카우보이들이 정착하여 농부들과 화합을 이뤄가는 과정, 마을의 공동체가 성립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스토리는 ‘전통과 현대의 충돌’을 이겨내고 ‘화합’하여 ‘평화’를 얻는 미국의 오랜 가치를 드라마에 정교하게 담았다. 자신의 영역을 확실히 구축하고 있던 타 예술 장르의 창작자들이 합류하면서, 다양한 요소들이 대본과 음악 안에서 유기적으로 드라마와 호흡하는 결과물이 나왔다. 가장 눈에 띄는 예가 1막 후반의 ‘드림발레’ 신이다. 사랑하는 컬리와 두려운 주드 사이에서 고민하는 로리의 심리를 꿈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발레로 표현된다. 15분간의 발레 소품은 뮤지컬의 1막과 2막의 세 남녀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으며, 뮤지컬 안에서 독립적인 신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다음 막으로 넘어가는 브리지의 역할도 한다. 뮤지컬이 아니었다면 개별적으로 존재했을 요소가 뮤지컬이란 장르 안에서 서로 시너지를 일으킨 예라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출신의 안무가 아그네스 드 밀의 합류로 이 작품은 춤이란 요소가 드라마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작품은 뮤지컬 제작과 시스템 과정에서 다양한 예술가들, 작사, 작곡, 연출, 무대미술, 안무가 등이 대등하고 수평적인 협력 관계를 이루기 시작했고, 이는 이후의 제작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으로 뮤지컬 황금기가 시작되면서, 작곡가와 작가들이 뮤지컬에 수도 없이 뛰어들었고, 배우는 물론 음악, 미술, 연출, 대본 등 각 분야의 가장 재능 있는 인재들이 뮤지컬계로 모여들었다. 뮤지컬이 시대를 주도하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1970년대 해롤드 프린스와 스티븐 손드하임의 연출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을 ‘컨셉 뮤지컬’로 규정하면서 평론가들은 이에 대한 비교 대상으로 ‘통합 뮤지컬’인 <오클라호마!>를 예를 들었다. 그만큼 형식과 내용적인 면에서 스탠다드로 자리하고 있는 이 작품은 ‘대본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의 한국 뮤지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클라호마!>는 무분별한 스타 캐스팅이 난무하던 당시 ‘작품이 오래도록 지속되어 공연될 수 있기 위해서는 대본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한 사례다. 당장은 스타에 의존해서 잘될 수는 있지만, 배우는 결국 바뀌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육성도 필요하고, 스스로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 책임도 가지고 있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작품성을 갖춰야 배우와 관계없이 작품의 퀄리티가 유지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증명해 준 셈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1호 2012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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