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사람이여, 짐승이여?” “사람이라기에는 털이 너무 많지 않아? 털색도 물 빠진 것마냥 노래가지고.” “시퍼런 눈, 샛노란 머리, 긴 팔다리, 도깨비냐 귀신이냐 정체를 밝혀라!” 낯선 이방인을 맞닥뜨린 마을 주민들이 혼비백산한다. <푸른 눈 박연>에서 벨테브레 일행과 제주 어민들의 첫 만남 장면이다. 호주 출신 코미디언 샘 해밍턴이 뮤지컬에 출연하는 이 시대에는 다소 호들갑스럽게 비치지만, 외국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나올 법한 반응이다. 흥미로운 것은 벨테브레와 하멜 이전에도 이방인들은 한반도와 교류하거나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단일민족’의 허상이 깨지고 다문화 사회를 사는 지금, 이들의 존재는 반추해볼 만하다.
이방인에서 한국사의 일부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대륙에서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 민족인 거란족이나 여진족, 몽골족이 정치적 혼란기마다 대거 한반도로 유입돼 정착해왔다. 또 왜인도 이미 1~2세기경 삼한시대부터 한반도의 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지정학적으로 대륙 집단과 해양 집단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반도 국가의 위치를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인접한 나라들보다 더 먼 곳에서 와서 당당히 새로운 일가를 뿌리내린 이방인들도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는 이는 금관가야 시조인 김수로의 비, 허황옥(許黃玉)이다. 『삼국유사』 중 가야사를 기록한 「가락국기」에 따르면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로 먼 항해를 거쳐 김해 남쪽 해안에 도착해 김수로와 만나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모가 됐다. 한반도에 차(茶) 문화와 불교문화를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아직도 김해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한 문화제를 진행하며 가무극(<가야여왕 허황옥>)을 공연하기도 한다.
인도 공주가 있었다면 무슬림 세계의 사람들도 우리 역사 안에 존재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는 ‘회회인(回回人)’으로 불리는 무슬림 대표가 정부의 공식 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할 정도였다. 특히 한반도와 아랍 간의 교류는 신라 때부터 존재해왔는데, 이들이 한반도에 정착해 살았던 흔적들은 지금도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경주 괘릉의 무인석(武人石)이다. 오똑하고 큰 코와 곱슬머리, 터번을 쓴 우람한 체격 등 신라인과 전혀 다른 생김새를 지닌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조각은 당시 아랍인들이 경주에 정착해 살았음을 방증해준다.
『삼국유사』의 ‘처용설화’로 익숙한 처용은 바로 이때 울산 지역에 살았던 아랍인으로 추정된다. 당시엔 ‘개운포’였던 울산은 경주의 위성 도시이자 최대 무역항으로 신라의 국제 교역로 역할을 했다. 이때 신라와 교역하고 왕래한 이들 중에는 동서교역의 주역이었던 아랍인들이 있었다. 설화에서 ‘용’은 중앙 귀족 또는 지방 호족을 상징하는데, ‘동해 용’으로 표현된 처용은 호족으로 해석할 수 있고, 무인석의 묘사로부터 그 출신을 짐작할 수 있다.
귀화인 중에는 베트남의 왕자도 있다. 오늘날 화산 이씨의 조상으로 알려진 이용상(李龍祥)이 그다. 왕위 계승을 위한 권력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안남국(베트남)을 탈출한 그는 중국 송나라를 거쳐 고려 화산 지방에 도착했다. 고려에 망명한 그는 자신의 새로운 고국을 침입해온 몽골군을 격파해 항복을 받아냈고, 이런 공을 인정받아 화산군(花山君)의 작위에 봉해졌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역사 속 이방인은 역시 두 네덜란드인 박연과 하멜이다. 기록을 통해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알린 네덜란드 선원 하멜은 1653년(효종 4년) 일행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이후 조선에 억류돼 훈련도감에 편입된 그가 통역자로 만난 사람이 그보다 앞서 조선 땅에 들어와 귀화한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이다. 훗날 하멜은 일행 7명과 함께 탈출해 귀국했고, 14년간의 억류 생활의 기록을 책으로 펼쳐냈다. 조선의 지리와 풍속, 정치, 군사 체계를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었던 이『하멜 표류기』는 유럽 사회에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과 네덜란드는 그로부터 3백여 년이 지나 1961년에 단독 수교를 맺게 된다.
역사물 속 이방인들
MBC 드라마 <김수로>(2010)의 허황옥
방영 당시 ‘인도 출신 퍼스트레이디’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이목을 끌었다. 이국적인 인물의 모습을 담고자 역사물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굵은 선을 지닌 서지혜가 허황옥 역을 맡았다. 극에서 허황옥은 인도의 거상 허장상의 딸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상단을 따라다녀 세상 물정에 일찍 눈을 뜬 외유내강형의 카리스마 왕비다. 항상 김수로를 마음에 품고 그의 마음의 안식처가 돼주는 순애보적 인물로, 후에 최초의 국제결혼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MBC 드라마 <탐나는도다>(2009)의 윌리엄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여러모로 <푸른 눈 박연>과 닮은 점이 많다. 17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탐라(제주도) 해녀 장버진과 풍랑에 표류된 영국 귀족 윌리엄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렸다. 시청률은 별로 높지 않았지만 독특한 소재와 외국인 배우의 과감한 기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윌리엄 역을 맡은 피에르 데포르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프랑스인으로, 국내에서 황찬빈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프랑스인 모델이다. 실제로 박연처럼 모국어를 잊어버려서 대학 때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도 한 코믹한 경력도 있다.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2013)의 폴 내관
올해 서울뮤지컬페스티벌 예그린 앙코르 최우수작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어린 시절을 가상의 상황으로 재구성한 역사 판타지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새롭게 재해석된 명성황후나 고종이 아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폴 내관’이다. 극의 진행자이자 순종을 보좌하는 역을 맡은 이 사람의 정체는 영국 그룹 비틀스의 멤버인 폴 매카트니. 폴 매카트니가 내관이라는 설정도 엉뚱하거니와, 그가 구사하는 재기발랄한 유머 코드는 시종일관 실소를 자아내며 극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2호 2013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