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거리에서 낯익은 뮤지컬의 향기가 난다
뮤지컬의 본질은 판타지라고 이야기들 한다. 대중문화연구가인 리처드 다이어는 뮤지컬이 그리는세계는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유토피아의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와 다른, 세계 자체가 단순하고 명확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뮤지컬의 세계는 착한 사람이 승리하고 노력하는 자가 성취하는 세계이며, 다툼보다 화해를 추구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현실 공간에서 거리를 두고 과거의 어떤 곳, 미지의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명작들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적지 않은 뮤지컬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늦은 휴가 삼아 뉴욕을 방문했는데, 곳곳에서 뮤지컬의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맨해튼을 동경한 청춘들
JFK 공항에 내려 지하철로 맨해튼 시내로 들어가려 했는데, 주말이라 지하철의 일정 구간이 운행을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끊긴 구간을 버스로 갈아타고 이동해야 했다. 덕분에 뉴욕이 주는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빈민가를 지나쳤다. 허름한 집들과 벽에는 온통 낙서들이 가득한, 언뜻 보아도 우범 지대임을 직감하게 하는 그곳은 나중에 지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퀸스와 브루클린 경계의 어디쯤 되는 위치였다. 마침 그곳에 커다란 Q 표시의 마트를 보고 <애비뉴 Q>를 떠올리게 된 건 분명 직업병일 것이다.
자를 대고 줄을 그은 듯한 맨해튼의 도로는 가로는 스트리트(Street)로 세로는 애비뉴(Avenue)로 표현한다. 맨해튼의 이스트 빌리지에는 애비뉴 A, B, C, D가 있는데, ‘애비뉴 Q’는 그만큼 맨해튼의 중심가에서 떨어진 가상의 도시를 의미한다. 가난하고 사회적인 약자들이 싼 집세를 내며 살아가는 그런 곳이다. 애비뉴 D가 이스트 빌리지 서쪽 끝 도로이기 때문에 애비뉴 Q가 실재한다면 맨해튼을 벗어나 브룩클린이나 퀸스의 어느 곳에 위치할 확률이 높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그 동네 근방이 아닐까 싶다.
화려한 맨해튼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한 청춘이 생각났다. 바로 <토요일밤의 열기>의 브루클린 청년 토니이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토니는 클럽의 무대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빛났다. 주급을 주말의 클럽에서 모두 탕진할 만큼 그에게 춤은 간절했다. 춤만이 그를 빛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토니는 춤에 빠져 잠시 잊고 있지만 브루클린의 가난한 청년이라는 현실은 그를 초라하게 만든다. 강 건너 화려한 빌딩의 맨해튼은 그저 동경의 세계일 뿐이다. 토니의 친구 바비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자살한다. 가난한 현실의 브루클린과, 동경의 도시 맨해튼을 이어주는 브루클린 브리지에서의 자살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넘어 맨해튼에 들어서면 세계 금융의 심장부라고 하는 월 스트리트와 연결된다. 매일 뉴스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미국 증권거래소와 금융의 상징인 황소상은 모두 월 스트리트에 있다. 지금은 브루클린 브리지와 이어지는 브루클린 지역도 많이 발전해서 토니와 같은 청년들은 브루클린의 더 깊숙한 안쪽, 애비뉴 Q가 있을 곳엘 가야 만날 수 있겠지만, 80~90년대 브루클린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맨해튼에서 멀어져가는 주인공들
뉴욕의 건물들은 오래되어서 어딜 가든 보수하는 관경을 볼 수 있다. 뉴욕의 오래된 건물들에는 어김없이 비상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지그재그로 설치되어 있는 비상계단을 보면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생각난다. 제롬 로빈스가 처음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유대인 집안과 아일랜드 이주민인 가톨릭 집안의 종교적 갈등을 소재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이스트 지역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라고 붙여 두었다. 그러나 이미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걸 안 창작자들은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로부터 7년 후 1950년대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이민자들이 증가하자 이미 자리를 잡은 동유럽의 이민자들과 잦은 갈등을 벌였다. 이주민들 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이주민 청년들의 패싸움이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아서 로렌츠는 이를 소재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고 제롬 로빈스와 레너드 번스타인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탄생한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이주민들은 맨해튼의 북쪽 브롱크스 지역과 서쪽인 퀸스 지역에 주로 몰려 살았는데, 폴란드 이주민들과의 마찰을 빚게 되는 스토리를 구성하다 보니 작품의 배경이 웨스트 사이드가 된 것이다. 1961년 영화로 제작될 당시 촬영지는 현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링컨센터가 들어선 센트럴 파크 서쪽 지역이었다. 지금은 매우 부유한 동네로 바뀌었지만 1950년대만 해도 이곳은 이민자들이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하는 가난한 동네였다.
<라보엠>을 현대판으로 옮긴 <렌트>의 배경 역시 맨해튼이다. 정확히는 유니온 스퀘어 아랫 동네 이스트 빌리지가 배경이다. 이곳은 갤러리나 작고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디저트 숍이나 디자이너의 작은 의상실이 모여 있는 우리나라의 홍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뉴욕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크고 작은 전시 공간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예술가들의 거리가 조성됐다.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아트 등 실험적인 예술이 탄생했다. <렌트>의 모린이 선보이는 퍼포먼스 장면은 이런 기반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든 경우다. 작은 카페에서 조나단 라슨과 같은 아직은 무명인 젊은 아티스트가 서빙을 할 것만 같은 이곳도 이제는 집세가 너무 올라, 가난한 예술가들은 더 저렴한 집들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뉴욕이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가난한 이주민들도, 젊은 예술가들도 맨해튼의 중심부에서 점점 멀어져 애비뉴 Q로 옮겨가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2호 2013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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