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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olumn] 뮤지컬에서 인디 음악까지 트랜스포머의 가능성 창작판소리 [No.90]

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2011-03-08 6,661

판소리, 슈퍼마켓 아줌마, 브레히트, 홍대 앞 카페, 스타크래프트, 김지하. 이렇게 단어를 나열하면 무언가 떠오르는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중구난방 나열한 듯하다. 하지만 이 말들은 모두 창작판소리로 통한다.

 

 

 

 

 

 

 

 

 

 

 

 

 

 

 

 

 

 

 

 

 

 

 

 

 

 

 

 <사천가>


‘창작판소리’는 ‘창작뮤지컬’이란 말만큼이나 말이 안되는데도 용어로 정착해 버린 말이다. 모든 뮤지컬이 창작이건만 구태여 ‘창작’이란 말을 붙여야 하는 것은, 외국의 것을 번역하지 않고 한국인이 한국 땅에 만들어 공연하는 작품을 따로 설명해야 할 만큼 ‘한국의 뮤지컬’에서 번역 뮤지컬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의미이다. ‘창작판소리’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판소리가 창작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창작판소리’라는 말이 따로 필요한 이유는, 전근대시대부터 내려오고 있는 다섯 바탕 판소리(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가 우리나라 판소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담아 새롭게 창작한 새로운 판소리를 구별해서 불러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창작판소리는, 옛날부터 내려오던 이른바 ‘전통 판소리’와 대비하여, 근대와 현대의 소재들을 가지고 새롭게 만든 판소리를 의미한다.


사실 뮤지컬과 판소리는, 마치 앵글로색슨족의 얼굴과 우리나라 전라도 아줌마들의 얼굴이 다른 것만큼이나 이질적인 공연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그토록 다른 얼굴이 유전자의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문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좀 더 거시적 시선으로 보면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매우 흡사한 문화들이 만들어져온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바이올린과 해금, 기타와 가야금, 플롯과 대금, 클라리넷과 피리가 같은 종류의 악기라는 것을 상상해 보라. 줄을 활로 켜는가, 퉁기는가, 좁은 관에 숨을 살살 불어넣는가, 리드를 입에 넣고 센 압력으로 불어넣는가 등, 기본 원리에서 동일한 악기들이 전 세계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뮤지컬이란 것도, 연극에 노래(또는 노래와 춤)를 유기적으로 엮은 대중적 공연물이니 그리 유별난 것이 아니다. 어느 인류이든 노래가 없는 종족이 없으며, 노래를 부르면 으레 몸을 흔들고 춤을 추게 되어 있다. 말을 하다가 그 말의 억양을 과장하여 높낮이를 만들면 노래가 되는 법이니, 결국 말로 하는 연극과 선율을 붙인 노래가 뒤섞이면 여러 종류의 음악극이나 음악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셈이다.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하던 호머의 서사시가 그렇게 노래로 공연된 음악 이야기이고, 근대 초기 서유럽에서는 오페라가, 20세기 미국에서는 뮤지컬이, 그리고 18세기 우리나라에서는 판소리라는 1인이 공연하는 연극적인 음악 이야기가 발전한 것이니, 서사시, 오페라, 뮤지컬, 판소리가 그리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고 보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가장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판소리가, 근대와 현대의 이야기를 담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식민지를 거치면서 토착적인 예술이 새로운 시대와 호흡하지 못한 불행한 역사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창작판소리는, 바로 이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창작판소리의 선구자는 한국전쟁 때 월북한 명창 박동실이었다. 1970년대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등으로 인기를 모으다 결핵으로 요절한 가수 김정호의 외조부이기도 한 그는, 해방 직전부터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이준 등 이른바 독립운동 열사들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박동실이 월북함으로써 이 ‘열사가’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고, 입에서 입으로 전수받은 몇몇이 1970, 80년대에 간간이 부르다가 월북 예술인 해금이 이루어진 후인 1990년대가 되어서야 정철호의 작창으로 음반 취입을 하게 된다.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구절이 광고에 실리면서 일반인들도 다 알게 된 명창 박동진은 1970년대에 예수의 일생을 창작판소리로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좀 더 파격적인 창작판소리는 1980년대에 본격화된다. 1970년 시인 김지하가 발표한 담시(譚詩, 이야기시) 『오적』은 판소리 해설처럼 쓰여진 시였다. 군인, 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등 이 사회의 고위층을 ‘다섯 도적’에 비유하여 신랄하게 쓴 시로,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잡지 『사상계』가 이 시를 수록했다는 이유로 폐간될 정도였다. 김지하의 후배인 연극인 임진택은, 『오적』을 판소리로 해보고 싶어서 명창 정권진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급기야 1980년대 초반부터 김지하의 담시들 <소리내력>, <똥바다>, <오적> 등을 판소리로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인기가 높았고 많이 공연된 것은 1985년 <똥바다>로, 대대로 ‘조선’과 ‘똥’ 때문에 곤혹을 치른 일본인 ‘분삼촌대(糞三寸待, 똥을 잠시 참으라는 뜻)’가 한일 수교를 계기로 한국에 건너와 재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보이다, 조선 참새 똥 때문에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풍자적 상상력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다.


음악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똥바다>는 <춘향가>, <심청가> 등에 고정되어 있는 판소리의 변화 가능성을 활짝 열어준 작품이 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 <똥바다>는 전국 대학가에서 수백 회 순회공연을 했고, 관객들은 거의 자지러질 정도로 웃다가 의미심장한 메시지에 충격을 받는, 판소리로서는 거의 생각지도 못한 감동의 경험을 하고 돌아갔다. <똥바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현대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판소리조의 노래로 엮어 공연하는 것이 대중적 호응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줬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겼던 판소리가 이토록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매우 중요한 작품이 되었던 셈이다. 임진택은 1990년대 이후 <오월 광주>를 발표한 후, 최근 김구의 일생을 다룬 <백범 김구>,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이야기를 다룬 <남한산성> 등을 발표하여, 아예 창작판소리 12바탕을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임진택이 열어놓은 창작판소리의 문은, 200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2001년 전주산조축제에서 연 ‘또랑광대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수퍼댁 씨름대회 출전기>(김명자), <스타크래프트전>(박태호) 등이 선풍적 인기를 모았기 때문이다. 20, 30분 이내의 짤막한 소품들인 이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전국으로 초청 공연을 다닐 만큼 인기가 높다. 김명자의 <수퍼댁 씨름대회 출전기>는 자식들의 먹성 때문에 김치 담그기에 치인 슈퍼마켓 아줌마가 김치냉장고를 상품으로 타기 위해 전국아줌마씨름대회에 출전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전국의 뚱뚱하고 그악스러운 아줌마들이 샅바 잡고 끙끙대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날 지경인데, 연극배우 출신인 소리꾼의 연기가 돋보인다. <스타크래프트전>은 인터넷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내용을 판소리로 옮겨놓은 작품으로, 판소리와 인터넷 게임이라는 이질적인 듯한 두 문화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묘미가 매력적이다. 이 작품은 점점 유명해져, 급기야 전국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펼쳐진 대형 경기장에서 막간 공연으로 공연되면서 게임 팬들인 관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기도 했다.

 

     <판소리 애플 그린을 먹다>


이후 소품 창작판소리의 창작은 점점 활발해졌는데, 특히 이 작품들은 전통문화라고 하면 점잖고 우아한 예술을 고집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과감히 깨어버린 코믹한 소품 창작판소리의 선례를 만들어놓음으로써, 창작판소리의 표현 방식을 자유롭게 만들고 대중적 관심을 현격하게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작년 연말과 올해 초에는 이 계보를 잇는 <쥐왕의 몰락기>(최용석)가 발표되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구상하여 몇 년에 걸쳐 덧붙여지며 만들어졌다는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 지금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판소리다. 쥐왕 앞에서 촛불 들고 설치는 새끼 고양이, 쥐왕을 보호하는 경찰인 푸른 개, 다른 나라의 쥐왕들이 모이는 쥐이십 회의에다, 특정인을 연상시키는 어투가 튀어나올 때에 관중석은 웃음바다가 된다.


이들 작품이 자신들을 ‘또랑광대’(명창이 아닌, 자기 동네에서만 활동하는 작은 소리꾼을 비하하는 말)라 칭할 만큼 의도적으로 B급 문화의 티를 내고 있는 것에 비해, 최근 뮤지컬 <서편제>의 주인공을 맡은 스타 소리꾼 이자람의 <사천가>(독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번안)는 완창 판소리를 들으러 다니는 정통 국악 팬과 대학로 연극 팬들을 겨냥한 예술적 품격을 갖추고, 전주소리축제나 국제 연극제들에 초청받는 레퍼토리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작년 연말에 홍대 앞 카페에서 공연된 조정희의 <바리>는 신화 바리데기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되, 판소리의 핵심인 아니리와 발림을 빼고 노래만 엮어 콘서트로 만들어, 목청 좋은 소리꾼의 퓨전 국악을 듣고 싶은 팬들을 겨냥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이러한 창작판소리가 홍대 앞 인디 신에서 뒤섞이고 있다는 점이다. 올 초 <쥐왕의 몰락기>가 공연된 곳은 홍대 앞 커피집이었고, 이 공연에 앞서서 그룹 클라우댄서의 재즈힙합 공연이 벌어졌다. 20명 남짓한 관객들은 재즈힙합 공연에서는 ‘호예’ 하고 손을 흔들다가, 곧이어 벌어진 창작판소리에 ‘그렇지’ 하는 추임새로 화답했다. 프랑스의 카바레가 이런 카페와 술집에서 성장한 양식임을 생각하면, 홍대 앞에서 청바지 입은 소리꾼이 인디 음악 팬들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창작판소리의 트랜스포머 같은 양상은 다소 주춤거리는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활로일 수도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0호 2011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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