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연주와 녹음 반주 사이
뮤지컬계 종사자들 가운데 ‘뮤지컬은 라이브로 연주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브 연주를 포기하는 뮤지컬 편수는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다. 오늘도 공연을 앞두고 있는 수많은 프로듀서와 음악감독들이 라이브 연주와 녹음 반주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이들이 라이브 연주와 녹음 반주 사이에서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작비 절감에 있다. 우리가 뮤지컬을 관람하기 위해 여타 공연이나 타장르의 오락물에 비해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눈앞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배우와 연주자, 무대, 조명 등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배우, 연주자, 무대·조명 등을 다루는 스태프들의 인건비가 뮤지컬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브 연주를 위한 음향 시스템을 갖추는 데에도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다. 공연 기간이 길지 않아 큰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제작비 절감은 작품의 수익성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때 라이브 연주자들의 인건비는 녹음 반주로 대체할 수 있어 제작비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국내 연주자들이 하루에 받는 비용은 작품의 규모와 공연 기간, 실력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10만 원 정도다. 녹음 반주 제작비는 누가 어떤 곳에서 녹음을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적게는 1천만 원부터 많게는 5천만 원 정도. 이러한 녹음 반주 방식은 제작비 예산에 맞춰 가감할 여지가 있는데다 초기 제작비 외에 추가로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두달 이내의 공연이라면 라이브 인건비나 녹음 반주 비용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단기 공연을 목표로 제작되는 뮤지컬은 거의 없는데다 지방 공연을 염두에 둔 작품들이 많다보니 녹음 반주를 택하는 공연이 늘고 있다. 공연 기간이 길면 길수록 늘어나는 라이브 연주자들의 인건비만큼 제작비를 절감하거나 수익으로 거두어들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히트한 한 공연의 경우 국내 초연 당시 만들어놓았던 녹음 반주를 사용해 상당한 금액의 제작비를 아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극장 환경에 따라 안정적인 사운드를 표현하기 위해 라이브 연주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뮤지컬해븐의 박용호 대표는 “대학로 공연장 대부분이 라이브 공연을 하기에는 음향 상태가 좋지 않다. 마이크를 거치지 않은 악기 소리를 최대한 막기 위해 방음벽을 설치하고 전자드럼도 써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귀가 아플 정도의 음향 상태에도 불구하고 ‘라이브라서 좋았다’는 관객들의 평가는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음악적으로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 초연 공연만 아니라면 녹음 반주로 공연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초연 이후 3년 만에 녹음 반주로 공연하고 있는 <김종욱 찾기>처럼 말이다. 송한샘 대표 역시 “극장 내 음향은 완벽하게 음향디자이너에 의해 컨트롤되어야 한다. 소극장 뮤지컬의 경우 무대와 객석이 가까워 악기 고유의 소리를 음향디자이너가 모두 잡아내지 못하고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일정한 밸런스 유지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변희석 음악감독은 극장의 사이즈, 작품의 규모에 따라 라이브 연주를 포기하고 녹음 반주를 권유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출연 배우가 4명뿐인 작품에 필요한 연주자가 10명이 넘을 경우 밴드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 “무대 뒤 혹은 극장 로비에 연주자들의 공간을 임의적으로 마련해 라이브 연주를 하는 공연도 있었다. 모든 뮤지컬이 라이브로 연주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배우와 관객들과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눈으로 즐기는 무대 메커니즘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를 고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작곡자가 먼저 녹음 반주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라이브 연주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소리를 표현하거나, 특별히 원하는 수준의 연주를 얻기 위해서다. 작곡자들이 원하는 연주자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뮤지컬계에 그들만큼의 실력을 지닌 라이브 연주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 “기술의 발달로 실제 악기에서 가져온 소리로 만든 녹음 반주의 퀄리티는 라이브 연주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원 맨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엘렉톤을 사용해볼 계획이다”라는 박용호 대표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음악감독들 중에는 라이브 연주와 더불어 녹음 반주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어쿠스틱 악기라면 라이브 연주가 꼭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녹음 반주로 라이브 연주의 피처링을 돕기도 한다. 사운드가 안정적이라 관객들은 그 차이를 잘 알지 못한다.” 원미솔 음악감독은 극장 사이즈, 예산 등에 맞춰야 할 때뿐만 아니라, 라이브 연주만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데 녹음 반주를 적당히 이용한다고 했다. 장소영 음악감독 역시 제작비 절감의 이유로 원하는 만큼의 연주자와 함께 작업하지 못해 풍성한 사운드를 기대하기 힘들 경우를 대비해 녹음 반주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많은 기술을 요구하고 준비 작업이 많아 불편하기는 하지만 라이브 연주보다 안정되고 수준 높은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특히 브라스 밴드의 경우 우리 연주자들의 라이브 연주에서 좋은 퀄리티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녹음 반주는 연주자들의 컨디션에 좌우되지 않는 퀄리티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규모만큼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 장소영 음악감독은 그런 이유로 <금발이 너무해> 공연에서 라이브 연주만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비록 녹음 반주를 함께 사용하고 연주 인원이 6명으로 줄긴 했지만 <금발이 너무해>가 라이브 연주를 아예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배우들과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호주에서 녹음해온 풀 오케스트라 녹음 반주만으로 공연 중인 <영웅>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영웅>은 국내 최고 수준의 음향시설을 갖추고 있는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함에도 불구하고 ‘기복이 없을 수 없는 라이브 연주보다 완성도 높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라이브 연주를 포기했다. 이에 대해 조용신 칼럼니스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음악에 대해 신경을 덜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영웅>이 녹음 반주를 결정한 것은 지난 10여 년간 라이브 연주를 고수해오던 <명성황후>가 녹음 반주로 연주 방식을 바꾸는 과정에서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지 않았고, 비용 절감의 효과를 본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이어서 “<명성황후>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수정·보완 단계를 얼마나 많이 거쳤겠는가. 창작 초연작인 <영웅> 역시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완성도를 높여갈 수 있어야 한다. 대본, 연출이 바뀐다면 음악도 함께 바뀌어야 하는데 호주까지 가서 녹음해 가져온 반주를 수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극 진행에 있어 즉흥적인 재미를 더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해준다. 이때 음악감독, 혹은 지휘자는 매 공연마다 한결같을 수 없는 연주자와 배우들의 호흡을 붙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김문정 음악감독은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가 음악에 맞춰야 하는 녹음 반주와는 달리 라이브 연주 공연은 음악으로 배우들의 호흡과 템포를 맞춰줄 수 있다. 똑같은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다는 아쉬움도 존재하지만 연주자와의 호흡을 통해 배우의 실력을 120퍼센트 끄집어낼 수 있다”면서 라이브 연주의 힘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극장 앞쪽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빛과 지휘자의 뒷모습, 생음악이 들려주는 포만감 등이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공연 외의 시청각적인 재미를 더해줄 수도 있다. 무대에 큰 변화가 없는 공연에서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라이브 음악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는 “단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되는 공연이라 하더라도 라이브 연주 공연은 뮤지션과 배우, 객석이 서로 밀착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투박하지만 관객들에게 흥미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계음에 의존한 공연과 비교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서 라이브 연주 공연을 고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제작비를 생각하기 이전에 라이브 연주를 통해 관객들에게 편안한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 작품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경제 불황과 맞물린 제작 환경의 악화에 따라 녹음 반주 형태의 뮤지컬 공연이 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녹음 반주를 택했다고 해서 혹은 앞으로 택하게 될 것이라고 해서, 그들이 라이브 연주 뮤지컬에 대한 애정까지 저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무려 40명의 연주자가 한 편의 뮤지컬을 위해 호흡을 맞췄던 1940~1950년대의 뮤지컬 전성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경제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라이브 연주를 고수하고 장려하는 이들이 있기에 뮤지컬계의 내일을 기다려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