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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2005년의 인물, 신춘수 [No.70]

글 |김영주 사진 |심주호 2009-08-05 5,218

 

꿈을 만드는 돈키호테의 질주

 

<지킬 앤 하이드>의 성공으로 힘을 얻은 신춘수 대표에게 2005년은 경주마처럼 절대 뒤돌아보거나 기웃거리는 일 없이 정면을 향해서 달리는 한 해였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야심은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한국인 프로듀서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설도윤 대표가 <오페라의 유령>을 올렸을 때, 한국 뮤지컬계에서는 이미 일인자가 결정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해외 시장에서 승부를 걸자고 다짐했죠. 남자로서의 야심이었습니다.” 그 후 4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1위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만드는 명 프로듀서가 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지만, 꿈은 그에게 방향을 잡아 주었다.

 


<지킬 앤 하이드>로 기록적인 흥행을 거두고 나서 새해를 맞았을 때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2004년은 그 전까지 느껴본 적 없던 전율을 경험한 해였어요. 그 벅찬 마음을 안고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시작했던 때가 2005년이었습니다. <맨 오브 라만차>라는 작품을 초연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고, 제 생각이 많이 바뀌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지킬 앤 하이드>만큼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을 만들었던 해였고요. 2004년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새로운 작품들을 가지고 정신없이 달렸던 것 같아요.
프로듀서로서 본격적인 조명을 받았던 시기였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잖아요. 지금도 꿈을 꾸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채우지도 못할 만큼 많은 꿈을 꿨던 때였던지라, 주위에서 신중하게 움직이라는 조언을 많이 해주셨는데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지킬 앤 하이드> 이상의 어떤 것을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오직 그것만 머리 속에 가득했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일에는 단계가 있고 과정이 있는데 그때는 훌쩍 뛰어넘어서 비약적으로 이뤄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컸던 것 같아요. 제가 그때 <맨 오브 라만차>를 하기도 했지만 저한테도 그렇게 몽상가적이고 돈키호테적인 기질이 많아요.
사실 2004년에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심장판막수술을 했는데 쉬지 못하고 바로 나와서 <크레이지 포 유>를 하고 또 <맨 오브 라만차>를 준비했지요. 그러던 중에 겨울에 뇌경색이 와서 쓰러졌는데 그러고도 새해를 맞았을 때는 건강을 먼저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도 안하고 거침없이 일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작품에 대한 미친 듯한 갈망 때문에 몸에 대해 걱정할 틈이 없었습니다. 일을 안 하면 못 견딜 것 같은 때였죠.

 

2005년에 갖게 된 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005년에 저는 해외 시장에 대한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드림걸즈>도 넓게 보면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구체적인 계획이 시작된 건 한참 뒤지만, 해외 시장을 위해 단계를 밟아나가기 시작한 건 2005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킬 앤 하이드>와 <맨 오브 라만차>를 가지고 일본 무대에 도전했고요. 두 작품으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때도 이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일을 해나가지만 그때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제일 컸습니다. 수치적으로 나오는 데이터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믿고 한번 몸으로 부딪쳐보자는 마음이 있었죠.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관객들의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비즈니스적인 면에서 좀더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2년 후를 목표로 아시아 시장에 대한 준비를 해야겠다는 겁니다. 2005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정말 다른데, 솔직히 2005년이 더 행복했죠. 왜냐면 그때는 꿈을 꾸면서, 도전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가득했거든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만만함, 달리 말하자면 피 끓는 미성숙함이 있었던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손드하임의 뮤지컬을 공식적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공연한 것도 그 해의 일이죠. <암살자들>을 무대에 올리면서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이런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제 머릿속에서 프로듀서는 예술가였어요. 제가 작품에 대해서 손을 안 대는 부분이 없었어요. <지킬 앤 하이드>를 처음 할 때는 연출가가 오기 전에 완전히 새로운 해석으로 고쳐놓을 정도로 겁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뭐랄까.(웃음) 2005년도에는 뮤지컬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실험적인 작품에 대한 욕심이 컸어요. 제가 관객 입장에 섰을 때도 뮤지컬이든 영화든 컬트적인 작품에 많이 끌리는 편이고요. 그땐 흥행 문제는 뒷전이었죠. 그러니까 당연히 다들 우려를 했고요. ‘저런 작품을 왜 해야 하냐’는 이야기도 많았어요. 솔직히 지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컸기 때문에 그때 작품을 올렸죠.
남들 눈에는 제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돈키호테로 보이고, 그런 기질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움도 없었고 힘든 줄도 몰랐던 것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게 중요하고, 즐거웠어요. 그 과정에서 흥행에 실패하든, 작품에 대한 평가가 별로든 크게 좌절하지는 않았어요. 돌이켜 보면 그 과정이 헛되지 않았어요. <맨 오브 라만차>도 2005년에 평단의 지지를 받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어요. 하지만 그때 긴 안목을 갖게 되었죠. 이 작품은 다음번에는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지킬 앤 하이드>가 늘 구원투수가 되어줬던 것 같습니다. 제가 돈키호테 기질로 작품을 벌여놓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항상 <지킬 앤 하이드>가 비빌 언덕이 되어줬어요. 다들 말렸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품을 올릴 때는 <지킬…>이 언제나 믿는 구석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2005년이 햇수로 치면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데 워낙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인지 그때의 제 모습이 멀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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