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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ime Travel] 메가 뮤지컬 [NO.106]

글 |이민선 도움| 조용신 2012-07-02 5,837


웨버와 매킨토시가 탄생시킨 메가 뮤지컬

 

언제 어디서 누가 지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식 문제로 ‘세계 4대 뮤지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누구나 이렇게 정답을 말할 것이다. <캣츠>와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1980년대에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가 런던 웨스트엔드 무대에 올린 이 네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둔 후, 바다 건너 미국의 브로드웨이에서도 롱런하며 흥행과 관련된 많은 기록들을 세웠다. 뮤지컬 하면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런던의 극장들을 채우고 있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삼십 년 전만 해도 영국산 뮤지컬이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1980년대, 영국 뮤지컬 네 편이 쇠퇴하고 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장을 되살렸다. 이들은 문학 작품에서 빌려온 대서사 드라마와 웅장한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 스펙터클한 볼거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브로드웨이를 점령한 일련의 대형 뮤지컬들은 그 규모와 화려함에서 ‘메가 뮤지컬’이라고 불렸다.





198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침체기
1960~70년대 브로드웨이에서는 <헤어>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같은 록 뮤지컬, <카바레>와 <컴퍼니>를 포함한 컨셉 뮤지컬 등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들이 등장하며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마이클 베넷이 연출·안무한 <코러스 라인>(1975), 밥 포시가 안무한 <피핀>(1972)과 <시카고>(1975) 등 독특한 스타일의 연출과 안무가 눈에 띄는 작품들이 등장한 때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브로드웨이 42번가>(1980)와 <라 카지 오 폴>(1983) 등의 신작들이 인기를 얻었지만, 중반 이후로는 이렇다 할 새로운 히트작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뮤지컬계를 이끌던 주요 창작자들의 다수가 공교롭게도 이즈음에 세상을 떠나거나 활동을 중단했고, 이전과는 달리 히트작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롬 로빈스와 마이클 베넷, 고어 챔피언, 밥 포시 등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창 활약하던 이들의 부재로 브로드웨이가 얼마나 허전해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침체된 사회·경제적 상황도 관광객 관객의 유치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관객 수는 줄어드는데 뮤지컬 제작비는 가파르게 상승하니, 공연을 올리는 데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1981년에 개국한 MTV의 영상에 빠져든 젊은이들은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 등 팝 스타들에게 열광하면서, 뮤지컬은 전보다 더 낡은 문화 상품으로 치부되었다.


여러모로 1980년대 브로드웨이는 더없는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내부에서는 돌파구를 찾기 힘들었을 때, 브로드웨이에 활기를 되찾아 준 것은 웨스트엔드 뮤지컬이었다. 젊은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콤비, 클로드-미셸 쇤베르크와 알랭 부브릴 콤비가 만들고 캐머런 매킨토시가 프로듀싱한 일련의 작품들이 연이어 브로드웨이에 상륙했고, 이 작품들은 그야말로 메가 히트를 쳤다.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영국 뮤지컬 빅 4

1960년에 런던에서 개막한 <올리버!>가 자국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1963년에 브로드웨이에 진출해서도 히트를 쳤는데, 브로드웨이에서 영국 뮤지컬의 성공은 당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런 사례는 보기 어려웠다. 영국의 젊은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작사가 팀 라이스가 콤비를 이루어 발표한 음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0)와  「에비타」(1976)가 영국을 넘어 미국에서도 인기를 얻으면서, 팬들의 기대 속에서 이 컨셉 앨범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이 제작되었다. 영국 출신의 창작자들이 주도한 두 작품은 선공개된 음악의 인기 덕에 브로드웨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에 더욱 화려한 옷을 입혀준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의 도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웨버는 T.S. 엘리엇의 시를 토대로 한 뮤지컬 <캣츠>를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합류한 매킨토시는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젊은 연출가 트레버 넌을 추천하고, 무대디자이너로 존 내피어를 참여시켰다. <캣츠>는 웨버가 원했던 대로 레뷔에 가까운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트레버 넌과 존 내피어는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우화를 무대 위에 환상적으로 구현해냈다. <캣츠>는 평단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들을 맞아들였다. 런던에서 초연한 이듬해인 1982년에는 브로드웨이의 윈터가든 극장에 자리를 잡고 2000년까지 18년 동안 장기 공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웨버와 매킨토시는 몇 년 후 <오페라의 유령>에서 다시 한번 대박을 터트렸다. 웨버가 작곡하고 해롤드 프린스가 연출을 맡은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웨스트엔드에서 화려하게 개막했다. 쏟아지는 호평과 관광객 관객들의 입소문, 오리지널 캐스트 음반을 접한 이들은 브로드웨이에서도 이 공연을 볼 수 있기를 고대했다. 1988년에 런던 오리지널 캐스트인 마이클 크로포드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그대로 무대에 서는 조건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기에 이르렀다. 개막 전에 이미 1,800만 달러어치의 예매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매킨토시는 웨스트엔드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만 눈여겨보진 않았다. 1980년대에 매킨토시가 주도한 또 다른 작품은 프랑스인 클로드-미셸 쇤베르크와 알랭 부브릴 콤비가 만든 것이다. <레 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1980년 파리에서 개막해 3개월간 공연된 후 막을 내렸다. 이 작품의 음반을 들은 매킨토시는 이를 영어 버전으로 바꾸기 위해 팀을 구성했다. 원작의 창작 콤비에 영어 가사 작사가와 연출가 트레버 넌을 합류시켜, 1985년 웨스트엔드에 새로운 버전의 <레 미제라블>을 선보였다. 원작 스토리의 흡인력, 존 내피어가 선보인 역동적인 회전 무대, 설득력 있는 음악에 힘입어 이 작품 역시 큰 환호를 받았다. 이제 런던에서의 대성공은 브로드웨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 오리지널 장 발장 역의 콤 윌킨슨과 함께 브로드웨이로 떠난 영국산 <레 미제라블>은 1987년부터 2003년까지 롱런했다. 이후 매킨토시는 쇤베르크와 부브릴 콤비와 함께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현대판인 <미스 사이공>을 제작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비극적인 드라마에 감미롭고 애틋한 선율의 음악과 무대 특수 효과가 더해졌다. 1989년에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후 1991년에 브로드웨이로 진출했고, 당시에 세운 선예매 3,600만 달러어치라는 기록은 아직도 갱신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메가 뮤지컬의 특징 

1980년대에 런던과 뉴욕을 한꺼번에 점령한 네 작품은 그동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달리, 역사와 종교, 판타지 등에서 다양한 소재를 취해 사랑과 배신, 구원 같은 다소 추상적인 주제를 전했다. 그에 맞게 대사 중심으로 일상을 보여주기보다 음악의 비중을 높여 극적으로 드라마를 진행시켰다. 음악은 세세한 드라마 전개보다는 강렬한 캐릭터를 뒷받침하고 정서를 전달하는 기능을 했다. 대부분 성 스루로 진행되는 네 편의 뮤지컬은 오페라처럼 화려한 음악적 스케일을 자랑했다. 특히 웨버는 그의 전공에 맞게 클래식 음악을 활용하면서도 이에 팝을 결합하여 웅장하면서도 대중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그의 음악들은 무대에서 소개되기 전에 음반을 통해 먼저 회자되었고, 그 덕에 그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은 비평에 상관없이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매킨토시가 주도한 빅 4 뮤지컬은 관객들의 귀뿐만 아니라 눈길도 사로잡았다. 영상 매체를 통해 웅장한 스펙터클을 경험한 대중들에게 그에 못지않은 화려함과 무대의 현장성을 동시에 안겨주기 위해, 무대 장치의 예술적·기술적 성취에 큰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웅장한 음악,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무대 특수 효과를 장착한 네 편의 뮤지컬은 십년 사이 영국과 미국의 공연계를 휩쓸었다. 작품의 규모와 성공 규모에서 ‘메가’ 뮤지컬이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었다.


매킨토시가 제작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 규모나 영향력에서 이전의 브로드웨이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브로드웨이로 수출한 네 편의 작품 모두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상연됐고 또 흥행에 성공했다. 두 나라뿐만 아니라 호주와 유럽 각지, 캐나다와 아시아 등에 수출돼 전 세계 각지의 관객들이 그의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는 글로벌화가 세계의 화두가 되었던 때로, 공연의 글로벌화는 매킨토시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킨토시는 영국과 미국을 넘어 세계의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당시의 세계가 선보였던 강렬한 시각적 효과에 사람들이 얼마나 매료돼 있는지도 알았다. 이런 생각을 마케팅 전략에도 적용했다. 매킨토시는 공연의 광고물에 비평가의 인용이나 매출 정도, 또는 스타 배우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오로지 미끈하게 잘빠진, 그리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로고를 박았다. 그는 세계 전역에 작품의 저작권을 수출했을 뿐만 아니라, 공연과 관련된 음반과 각종 기념품 등을 만들어 판매했다. 상품에 그 작품을 상징하는 로고를 넣어 판매함으로써 부가적인 이윤 창출과 더불어 작품의 홍보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매킨토시의 사고는 뮤지컬이 전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상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넘어, 상연 이외의 방식으로도 상업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문화 상품임을 일깨워주었다.


 

메가 뮤지컬의 영향력
웨스트엔드 뮤지컬의 영입으로 브로드웨이가 되살아났다. 영국산 뮤지컬의 승승장구에 반발하여, 더욱 미국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과거의 명작들이 리바이벌되기도 했다. 물론 메가 뮤지컬의 성공 요인을 뒤따라 블록버스터급의 뮤지컬이 제작되기도 했다. <미스 사이공>을 마지막으로 매킨토시의 메가 뮤지컬은 더 이상 브로드웨이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90년대의 메가 뮤지컬은 전적으로 브로드웨이의 주도로 제작되었고, 그 중심에 디즈니가 있었다.


뮤지컬이 아닌 만화영화를 콘텐츠로 갖고 있던 디즈니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여 자사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미녀와 야수>(1994)를 내놓았다. 유치하고 화려하기만 한 공연에 관객들이 반응할까 의심하던 평단의 예상을 깨고,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 관객들이 <미녀와 야수>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대부분 뮤지컬 영화임을 감안하면, 자사 콘텐츠를 활용한 뮤지컬 제작이 그리 무모한 도전도 아니었다. 1990년대 타임스 스퀘어 재개발 사업에 따라, 디즈니는 오랜 세월 동안 비어 있던 뉴암스테르담 극장을 사들이고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이곳에 두 번째 작품 <라이온 킹>(1997)을 올렸다. <라이온 킹>은 가면과 인형을 이용해 아프리카의 밀림과 동물들을 표현했고, 유쾌하고 교훈적인 가족 뮤지컬을 넘어서 예술적 경지에 이른 무대를 펼쳐보였다. 이로써 디즈니는 명실공히 브로드웨이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었다. 디즈니의 세 번째 작품 <아이다>는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아닌 오페라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 전작에 비하면 흥행 정도는 약소하지만 여전히 동화 같은 해피엔딩 드라마와 인상적인 무대 볼거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기술의 발달로 뮤지컬 무대에서도 화려한 비주얼의 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프로듀서들은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초대형 규모의 무대를 선보이려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그런 무대 장치를 운용할 수 있는 공연장과 제작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런던에 비해 무척 협소했던 브로드웨이 공연장들은 영국산 메가 뮤지컬에 자극을 받고 극장 리노베이션을 거치게 된다. 제작비 상승과 물가 상승으로 2000년을 전후하여 티켓 가격도 엄청나게 올랐다. 엄청난 제작비를 티켓 가격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 프로듀서들은 더 많은 투자자들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아야 했고, 투자자들에게 흥행을 예상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제시해야 했다. 그것은 이미 성공한 원작의 활용과 스타 배우의 기용, 또는 화려한 무대 비주얼이었다. 그런 이유로 2000년대 이후에는 영화를 원작으로 한 무비컬과 기존의 히트곡을 엮어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 또는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메가 뮤지컬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다.


<프로듀서스>와 <헤어스프레이>, <스팸어랏> 등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어둡고 심각한 작품보다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분위기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유명 원작을 토대로 놀랄 만한 비주얼을 자랑한 <위키드>와 <메리 포핀스>, <스파이더맨> 등은 아직도 메가 뮤지컬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현재 소개되고 있는 뮤지컬들 중에서 1980년대 메가 뮤지컬의 특징에 꼭 맞게 부합하는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한 여러 가지 성공 사례들을 따르며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든 4대 뮤지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메가 뮤지컬의 감성적인 멜로드라마, 성 스루 스타일, 화려한 무대 디자인 등이 작품 내적으로 따를 만한 성공 요인이라면, 그에 못지않게 작품 외적 요인도 현재의 뮤지컬 제작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뮤지컬은 국적을 넘어서 더 많은 관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되고 있고, 전 세계 동시 다발적 상연과 더불어 라이선스 및 부가 상품의 판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뮤지컬을 향한 이런 시선이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는 불과 삼십년 전 캐머런 매킨토시로 인해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5호 2012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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