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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말(馬)의 그림자로 만든, 현대미술 작품 DARSHAN<다르샨> [No.77]

글 |이동섭(파리통신원) 사진 |Agathe Poupeney 2010-03-09 5,870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은 누보 시르크 극단 징가로가 조금 특별한 신작 <다르샨> Darshan (인도어로 ‘숭고한 비전’)을 발표했다. 조금은 특별한 어떤 것들 때문에, 나는 작품을 보는 동안에도 보고 난 한참 후까지도 작품의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이 참 좋았다. 작품에 대한 짝사랑은 흔히 있고,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작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기에, 이해도 하지 못한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착각이나 오해일까? 지식이 채 따라 잡지 못한 내 감성이 그 작품에 먼저 반응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감성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이어 생겨난 질문은 하나의 답도 얻지 못하고 또 다른 질문만을 끄집어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질문들로 질식당할 듯했던 나는 도망치는 심정으로 작품에 대한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 Robert Musil 의 단편 소설 `축제` 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미스터리하게 만났고, 이제 나는 고통의 길을 통해 너에게 들어간다.” 여기서 나를 잡아끈 구절은 ‘고통의 길을 통해’였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다르샨>을 떠올렸고, 무질의 가르침에 따라 지금까지 내가 좋아한 작품들을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무엇을 통해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갔었던가?

 

 

 

나를 관통했던 뮤지컬 작품들
진공청소기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몇몇 뮤지컬 작품들을 살펴보자. <빌리 엘리어트>에서 나는 빌리의 춤이 돋보였던 ‘앵그리 댄스’와 ‘일렉트릭시티’, 크리스마스 풍경과 할머니의 환상 장면 등을 통해 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물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에스메랄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프롤로 신부, 콰지모도, 페뷔스의 사랑과 숙명을 그린 <노트르담 드 파리>는 내 사랑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아름답다’의 음표 하나, 가사 하나 하나가 마치 껍질이 벗겨진 피부를 찌르는 가시처럼 마음에 닿았다.

가끔은 작품 주변을 빙빙 맴돌다가 배우의 연기와 노래를 통해야만 비로소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조승우의 <지킬 앤 하이드>, 정성화의 <맨 오브 라만차> 등이 그러했다. 대사 하나를 듣기 위해 연극을 보러 가지 않듯이, 한 곡의 노래나 한 장면의 춤을 보려고 뮤지컬을 보러 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 한 장면이 작품을 향한 내 느낌을 압축해줄 수는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자벨라의 ‘메모리’를 통해 <캣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춤, 사적인 경험, 배우의 실력, 명곡 등 각기 다른 통로를 통해 나는 그 작품들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뜨겁게 반응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통해 <다르샨>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회전하는 관객석과 그림자로 등장하는 말
이 작품을 예매하면서, 나는 극단 징가로의 예술감독 바르타바스 Bartabas 가 관객석과 무대의 위치를 서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대체 뭘 어찌 하려고?’ 좋아하는 작품은 늘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왠지 이번엔 깜짝 선물 같은 부록도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깜짝 선물은 협소한 공간을 관객석으로 만들다보니 어쩔 수 없이 관객들이 거대한 5단 케이크처럼 층층이 오밀조밀 쌓여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25주년 기념 작품이니 생일 케이크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싶은 마음에 귀여웠다. 공연이 시작하자, 이 5단 케이크가 오른쪽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공연 내내 관객석은 천천히 돌고 돌았다. 나름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지막 선물은 서너 장면을 제외하고는 관객들이 말이 아닌 말의 실루엣과 그림자만을 봐야했다는 것이다. 분명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이긴 했으나 어디서 놀래야할지 몰라 다소 난감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바르타바스는 이런 연출을 시도했을까?


바르타바스는 항상 작품 밖에 존재하는 관객을 작품 안으로 초대하고 싶어서 무대와 관객석의 위치를 바꾸고, 관객석을 회전시켰다고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런 이유였다면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작품은? 우아하고 건강한 말을 마음껏 보고 싶었던 많은 관객들은 실망했고 지루해했다. 당연히 놀라움, 환호, 탄성, 함성, 박수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예전 작품들과 비교하면, <다르샨>의 관객석은 몹시 조용했다. 말과 (인간)배우들의 기예 장면이 사라지자, <다르샨>은 징가로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누보 시르크’에서 ‘시르크(서커스)’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과연 바르타바스가 무엇으로 그 자리를 채웠는지 주목해야 한다. 


오페라, 카바레, 관현악, 판소리, 다양한 민속무용 등을 징가로화한 그동안의 작업 선상에서 보면, <다르샨>은 일차적으로 빛과 실루엣을 이용하는 그림자극을 수용했다. 말의 그림자와 실루엣이 공연 내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전시장을 공연 무대처럼 사용하는 도미니크 곤잘레즈-포에스터 Dominique Gonzalez-Foerster 나 에이자-리자 아틸라 Eija-Liisa Ahtila 와 같은 현대 비디오 예술가들처럼, 바르타바스는 천막 극장을 전시장 삼아 말과 배우, 비디오 프로젝션, 그림자극을 결합하여 <다르샨>을 마치 한 편의 현대미술처럼 만들었다. 즉, <다르샨>은 현대미술과 그림자극을 징가로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들의 세련된 서커스를 기대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낯설고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관객을 작품 밖에 두지 않고 구조적으로 작품 속에 위치하도록 하는 현대미술의 작용 원리와 방식을 이해하고 그림자극의 매력을 알고 있던 관객들이라면 <다르샨>이 오랫동안 기억될 명작임에 틀림없지만, 그 접점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징가로의 25주년 기념작 <다르샨>은 앞으로도 단순히 과거의 영광에 젖어 비슷한 작품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예술세계를 향해 나아갈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인 것이다.

 

 

 

징가로화한 현대미술과 그림자극
서커스가 사라진 실망감은 공연장을 나서 일상을 살다보면 서서히 묽어진다. 대신 실루엣과 그림자, 프로젝션 등이 결합한,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장면들과 클래식 음악이 만들어냈던 아름다운 분위기만이 내 안에 남는다. 그렇게 해서 <다르샨>에서 나를 작품 속으로 이끌었던 몇몇 장면들은 이제 내게 시간의 양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소중한 무엇이 되었다. 사실 이런 아름다움은 바르타바스가 표현하려던 주제는 아니다. 주제를 표현하는 그의 예술언어(스타일)가 빚어낸 효과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전하려던 주제는 무엇일까?  


새가 날아가는/해지는 하늘 아래 말과 함께 걷고, 말 밑에 앉아 비를 피하고, 말 위에서 국수를 먹고, 달리는 말 위에서 춤을 추는 장면들은, 단순히 말과 인간이 함께 있는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인간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실제 사례이다. 극단 징가로의 배우들은 그렇게 말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직접 보고 느끼게 하기 위해 바르타바스는 항상 무대 밖에 머물 수밖에 없던 관객을 배우의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해서, 관객은 관객이자 배우가 되고, 배우처럼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즉, 바르타바스는 관객을 작품 안에 있게 함으로써 작품-관객의 거리를 아주 좁혀 버렸다. 그래서 그림자극과 현대미술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 한결 수월하게 관객들은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징가로의 전작 <바투타>가 관객으로 하여금 집시의 시간을 잠시나마 엿보게 했다면, <다르샨>에서 바르타바스는 관객들로 하여금 극단 징가로의 배우들처럼 보헤미안의 시간을 직접 체험하도록 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말을 더 오래 보고싶은 기대는 좌절당했지만, 그 좌절은 다른 작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무엇’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그리고 내 감성은 여기에서 움직이게 되었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
비록 작품 속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다르샨>에서 나는 바르타바스가 마련해놓은 아주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그곳은 말들이 제 그림자와 함께 자유로이 뛰어노는 먼 옛날, 어느 먼 곳이다. 그리고 그 먼 옛날, 그 먼 어디처럼 오늘도 여전히 극단 징가로의 단원들은 살아가고 있다. 천천히 회전하는 좌석에 앉아 잠시나마 맛 본 그런 삶은 참으로 달콤했다. 바로 이것이 바르타바스가 <다르샨>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주려던 주제가 아니었을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77호 2010년 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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