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명한 전쟁이야기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빠지지 않는 법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목숨 걸고 전쟁을 벌이는 남자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여자일 경우 전쟁은 영토확장이나 종교적 명분을 지키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사랑과 질투, 배신 등이 버무려진 인간 내면이 드러나는 비극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아니라도 나라를 망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던 한무제의 후궁 이부인이나 하나라의 말희, 은나라의 달기 등이나,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게 한 헬레네, 시저와 안토니우스, 옥타비우스 등의 영웅들이 이집트와 로마를 넘나들며 전쟁을 벌이게 한 클레오파트라 등이 그러하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인 클레오파트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프랑스 뮤지컬 <클레오파트르,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Cleopatre, La derniere reine d’Egypte 소식을 접했을 때 호기심이 생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뮤지컬계의 거의 유일한 스타 안무가이자 연출가 카멜 우알리가 참여한다는 소식은 호기심을 티켓 구매로 이어지게 했다. 음악 한 곡을 들어보지 않았지만 <태양왕>을 성공시킨 그의 이름만으로도 <클레오파트르>는 꼭 봐야할 작품이 되었다.
2000년 초반 TV 리얼리티 프로그램 <스타 아카데미>의 안무가로 처음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카멜 우알리는 <십계>의 세련된 안무를 선보이며 뮤지컬계에 진출한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안무가를 거쳐 2006년 <태양왕>을 통해 연출가로 거듭났다.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루이 14세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을 뻔한 궁정 스토리가 아닌 한 남자의 러브스토리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프렌치 팝, 록, 디스코, 클래식, 일렉트로니카, 라운지 등 다양한 장르를 조합한 세련된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 결과 <태양왕>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했고, 오랜만에 뮤지컬 공연들이 파리 주요 극장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스타 안무가 겸 연출가의 신작에 프랑스 뮤지컬 애호가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작품 외적인 기대감에 힘입은 <클레오파트르>는 초연 전인 2008년 4월에 발표한 싱글곡 ‘현대의 여자` Femme d`Aujourd`hui 를 메가 히트시켰고, 25만 장의 티켓을 미리 팔아치웠다. 이미 보증 받은 작품의 흥행과는 별개로 염려되는 것이 딱 하나 있다면, 카멜 우알리가 지금까지 모든 작품을 함께 한 스타 제작자 도브 아티아와 알베르 코엔과 결별한데다 각본까지 직접 썼다는 점이다. 결과는 둘 중 하나, 과욕이 부른 참사 혹은 그의 색깔로 잘 통합된 뮤지컬이다.
과연 2009년 1월 29일 팔레 데 스포르 Palais des Sports 에서 초연한 카멜 우알리의 <클레오파트르>는 어떤 결과를 얻었을까?
스타 연출가의 홀로서기 전략
프랑스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뮤지컬은 눈에 띄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2009년 12월호 참조).
<클레오파트르> 역시 그 법칙(주인공은 누구나 알지만 모두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진 역사적인 인물일 것, 대중음악 스타일의 뮤지컬 넘버, 화려한 무대, 무명의 주연 배우, 메가 히트를 기록한 싱글 타이틀곡, 초연 시기는 공연계 최대 성수기인 연말연시 등)을 충실히 따라 제작됐다.
그 결과 초연 전에 대부분의 티켓이 판매됐고, 언론의 호의적인 기사와 대중들의 팬덤 문화가 결부되어 지방공연과 해외 투어공연까지 무난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초연 후 1년이 지난 즈음 파리 앙코르공연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공연실황 DVD를 출시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잘 짜인 전략 아래 만들어진 작품들은 웬만해서는 상업적으로 실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의미 있는 작품으로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멜은 성공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인물들의 엇갈린 사랑과 질투, 배신 등이 그려낸 비극적 드라마보다는 자신의 장기인 춤과 다양한 종류의 볼거리에 방점을 찍었고, 그 결과 <클레오파트르>는 춤을 중심으로 연출된 최초의 프랑스 뮤지컬이 되었다.
여러 명의 작곡가들이 만든 비주얼 스펙터클
사실 <클레오파트르>가 춤 중심의 뮤지컬이 된 데에는 다소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다. 공연에 앞서 카멜이 “그녀를 위해 만들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카멜이 어릴 적부터 동경해왔다는 클레오파트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연 무대를 통해 클레오파트르를 연기한 소피아 에사이디 Sofia Essaidi 가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됐다.
<클레오파트르>는 1년 6개월간의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한 무명의 배우 소피아의 매력을 돋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뮤지컬이었다. 공연 내내 관객들을 매료시킨 것은 소피아,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녀의 완벽한 바디 라인과 그 몸이 추는 춤이었다. 프랑스 뮤지컬 최초로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출가의 특별한 의도 때문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프랑스 뮤지컬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과 연결되어 있다.
잘 만들어진 공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대체로 갈등의 최고조와 그 갈등이 해결되는 드라마의 절정 부분이기 마련이다. 음악으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뮤지컬의 본질적인 속성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프랑스 뮤지컬에서는 드라마와 상관없이 싱글 히트곡 장면들이 가장 기억에 남게 됐다.
1막에 히트곡들이 모두 모여 있는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지루한 2막은 더 지루해져 버린 <로미오 앤 줄리엣>, 1막 중반 혹은 2막 초반에 히트곡이 나와 버린 <모차르트> 등이 그러했다. 시저를 유혹해 조국을 배신하게 만든 클레오파트라, 시저의 죽음이후 세상을 지배하던 옥타비우스와 그의 여동생과 결혼한 안토니우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버린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우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과 참혹한 패배, 그리고 죽음까지, 누구나 결말을 알고 있는 스토리와 1막 초반 시저를 유혹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싱글 히트곡의 화려한 무대까지, <클레오파트르>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해질 위험이 충분히 있어 보였다.
만약 히트곡을 후반부에 사용했다 하더라도 잠깐의 지루함을 달래줄 뿐 근본적인 처방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새로운 관점이나 해석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로 옮긴데다가, 연극의 대사와도 같은 음악이 제 구실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르>에서 음악은 단지 춤을 추기 위해, 인물의 내면 감정을 토로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뮤지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러 작곡가들이 공동으로 작품에 참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태양왕> 이후에 제작된 대부분의 대형 프랑스 뮤지컬은 마치 주크박스 뮤지컬의 발전된 형태로 보이는 ‘한 명의 음악감독과 여러 작곡가들’로 음악팀을 구성하고 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뮤지컬은 드라마와 음악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음악극이라기보다는 여러 편의 뮤직 비디오가 무대 위에서 연속 실현되는 한 편의 무대 스펙터클에 가까워졌다.
아티아와 코엔이 제작한 작품들이 그러하고, 그들과 함께 작업했던 카멜 역시 그 스타일을 답습했다. 총 21곡의 넘버들로 이루어진 <클레오파트르>의 대부분의 노래는 <태양왕>에 참여한 리오넬 플로랑스와 파트리스 귀라오가 작곡했고, 나머지 곡과 23곡의 간주곡은 제레미 샤르보넬, 카티아 랑드레아, 다룰 압델카데르, 이자벨 베르날, 이반 카싸르가 참여했다.
7명의 작곡가를 이끄는 음악감독의 이름을 프로그램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연출가가 그 역할을 대신 맡았을 것이다. 카멜이 드라마 전개에서 음악으로 채우지 못한 부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태양왕>이 그랬던 것처럼 <클레오파트르> 역시 주인공의 매혹적인 독무와 수십 명의 화려한 군무, 무대 전면에 내세운 각종 서커스와 기예, 화려한 영상 프로젝션 등을 이용해 쉴 새 없이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클레오파트라 역의 소피아를 내세웠다.
무대를 장악한 여배우의 몸
동서양의 매력을 섞어놓은 듯한 얼굴을 가진 소피아의 노래나 춤 실력은 B플러스 정도였다.
하지만 포토샵을 거친 듯 완벽한 바디 라인을 지닌 그녀는 무대 위의 각종 화려한 장치와 이국적인 일렉트로닉 아라비안 음악, 50여명의 무용수들을 배경삼아 때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비너스로, 때로는 치명적인 유혹을 내뿜는 살로메로, 때로는 주변의 모든 남자들의 눈을 멀게 만든 에스메랄다 등으로 현현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드라마에 몰입하기보다는 그녀의 몸이 보여주는 비주얼 스펙터클을 기다리게 됐다. 두 시간여 동안 소피아의 몸이 만들어내는 춤과 노래를 보다보면, 그녀는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는 배우라기보다는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 물신화된다. 카멜은 그녀의 몸을 춤추게 함으로써 관객들을 집단 최면에 빠져들게 하려는 듯했다.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결부된 음악이 아닌 스토리 전개의 적절한 순간에 등장하는 다양한 볼거리들, 그 중에서도 소피아의 육체를 내세운 <클레오파트르>는 음악극의 형식을 갖추고는 있지만 결국 잘 만들어진 음악이 파편화되어 나오는 화려한 비주얼 스펙터클이 되어버렸다. 대중적으로 흥행한 <클레오파트르>를 잘 만든 작품이라고 하기에 주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곡일지라도 작품 안에서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기억에 남는 뮤지컬 넘버가 되기는 어렵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프랑스 뮤지컬은 주크박스 뮤지컬의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할까, 아니면 그저 상업적인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남게 될까?
<클레오파트르,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Cleopatre, La derniere reine d’Egypte
2009년 1월 29일 초연 파리 팔레 데 스포르 Palais des Sports
2009년 5월~12월 프랑스 지방, 스위스, 벨기에 투어
2010년 1월 14일 - : 파리 앵콜 공연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78호 2010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