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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외롭고 아름답고 쓸쓸한 서커스 <라울> [No.79]

글 |이동섭(파리통신원) 사진제공 |Theatre de la ville de Paris 2010-05-13 5,194

여기, 대사는 하나도 없이 음악만 가끔씩 흘러나오고, 출연 배우 한 명에, 이상한 짐승이 아주 가끔 등장하는 공연이 있다. 누군가 내게 ‘아니, 이런 걸 왜 봐?’ 라고 물을 때, ‘바로 그런 이유로  본다’고 답하게 되는 공연.

마치 일체의 장식, 꾸밈이 없는 ‘생얼’을 보듯이, 공연의 ‘생얼’을 보고 싶어서, 나는 ‘서커스’를 본다.

우리는 서커스를 보면서, 작품성이나 예술성을 논하지 않는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동작들이 많았는지, 얼마나 그것을 보며 즐거웠는지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럼에도 서커스는 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사람들 곁에서 기꺼이 광대짓을 했다.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술로 편입되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여흥거리 Divertissement 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를 기점으로 뭔가 새로운 형식의 서커스를 하려는 움직임이 프랑스와 캐나다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예술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인간의 말을 잘 듣는 코끼리와 원숭이의 재롱과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미녀에만 머물려 하지도 않았다. 서커스는 다른 예술 장르를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며 자신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서커스를 좋아하는 관객은 물론, 그렇지 않았던 관객들까지도 이 새로워진 서커스를 보러 공연장을 찾았다. 징가로와 태양의 서커스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이들이 열어놓은 새로운 길로 많은 단체들이 뒤따랐다. 1990년대 후반부터 몇몇 극단들은 서커스, 현대 무용, 영화, 연기, 노래 등 다양한 분야의 특징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그즈음부터 서커스라고 부르기도, 그렇다고 다른 무엇으로 부르기도 애매한 장르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동작극’, ‘무용 서커스극’, ‘현대서커스 무용’ 등으로 불리며 새로운 서커스의 붐을 이끌어가고 있는 젊은 창작자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이 바로 지난해 또 한 편의 신작 <라울> Raoul을 발표한 ‘제임스 티에레’ 이다. 
 


솔로 서커스
제임스 티에레(1974년 스위스출생)는 서커스단을 운영하던 부모 밑에서 자라난 정통 서커스 혈통이다. 그뿐 아니라 작품 의상과 소도구를 책임진 어머니 빅토리아 채플린은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찰리 채플린의 딸이다(즉, 티에레는 찰리 채플린의 외손자다).

아버지로부터 서커스의 재능을, 어머니로부터 연기(익살, 마임, 판토마임 등)의 재능을 고루 물려받은 그는 두 가지를 융합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2003년에 발표한 자신의 첫 작품 <풍뎅이 교향곡>으로 프랑스의 연극과 공연 부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몰리에르상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그는, 2004년<심해의 야회>로 자신의 이름을 관객들에게 각인시켰다. 2007년에 발표한 <우산이여, 안녕>으로 몰리에르상에 다시 한 번 노미네이트되는데 이어 프랑스, 런던, 뉴욕, 시카고 등에서의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서커스계의 새로운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2009년 말에 발표한 신작 <라울>은 서커스 장르에서도 굉장히 이례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공연 장르에서 배우에게 가장 부담을 많이 주는 솔로극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집밖으로 나가길 거부하는 ‘히키코모리’ 인물인 라울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니 솔로극의 형식을 선택한 듯하다. 덕분에 히키코모리라는 작품의 주제는 무대 위에서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되었다.

 

 

 

상징성을 획득한 서커스 작품?
집밖으로 나가길 두려워하는 라울에게 어느 날 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침입한다. 깜짝 놀란 라울은 벽을 더욱 단단히, 그리고 높게 쌓으려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그것이 숨어든 자신의 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지만 결코 찾아낼 수 없다. ‘그것’이 왔다간 후로 라울은 혼자 지낼 때는 몰랐던 외로움을 점점 크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혼자 음악을 들으면서 추억에 잠기고, 셀카를 찍고, 그것을 액자를 넣는 시늉을 하고, 책을 읽는 등 혼자 놀기를 하면서 자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잊으려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물처럼 생긴 어떤 ‘것’이 또다시 라울의 집 벽을 부수려 하고, 깜짝 놀란 라울은 집밖으로 조금씩 나가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라울의 집은 스스로 허물어지고, 관객들은 마침내 라울의 집을 침입한 그‘것’이 결국 라울의 또 다른 모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라울>을 보면서 티에레가 서커스라는 형식을 이용해 작품의 주제인 히키코모리의 외로움을 얼마나 깊이 있게 그려냈는가에 주목했다. 서커스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몸을 사용해서 주제를 드러내는 표현력이라 할 수 있다.

 

 

티에레는 유머러스한 바디 랭귀지와 (도구를 이용한) 팬터마임, 슬랩스틱에서 시작된 무용 등을 적절하게 사용해 작품의 주제를 일체의 대사 없이 표현해냈다. 서커스의 놀라움과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 씁쓸한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잘 짜여진 극(드라마)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티에레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티에레는 관객들이 서커스에 기대하는 웃음과 놀라움을 충분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단순히 볼거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극의 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극을 구성하고 있다. 다른 서커스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상징성 없는 환상에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로 인해 티에레의 서커스는 예술 작품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상징성이 예술의 필수요소는 아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을 담고 있지 않는 작품이 예술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티에레의 작품에서 보는 지점은 바로 이런 주제의 표현 방식과 서커스의 표현력을 적극적으로 살리면서도 클리셰를 넘어서는 작품의 깊이감이다. 티에레의 작품에서는 서커스, 음악, 무용, 마임, 인형극, 연극, 오페레타 등 아주 다양한 장르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각 장르의 특징을 단순히 조합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이가 바로 티에레다. 그리고 그는 <라울>을 통해 다시 한 번 서커스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79호 2010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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