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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HAIR <헤어> 런던을 정복한 히피 [No.80]

글 |정명주(런던통신원) 2010-06-08 8,172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어>의 리바이벌 프로덕션이 런던 웨스트엔드의 길구드 극장에서 4월 15일 오픈했다.

웨스트엔드 역사상 최초로 브로드웨이의 오리지널 캐스트가 그대로 기용된 이번 런던 프로덕션은 미국 배우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유분방함으로 보수적인 런던의 관객들을 공략한다. 이번 런던 프로덕션을 제작한 카메론 매킨토시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1967년 뉴욕 초연 이후 베스트 리바이벌 프로덕션으로 손꼽히는 수작이며, 작품의 성격상 영국 배우들을 기용하지 않고, 작년 뉴욕 프로덕션의 미국 캐스트를 그대로 옮겨왔다.

 

 

혁신적인 록 뮤지컬
뮤지컬 <헤어>는 1960년대 초,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반전과 평화, 자유를 외치던 뉴욕의 히피족, 특히 총부리 앞에 꽃을 내밀었던 플라워 칠드런 flower children 세대의 이야기이다. 장발로 상징되던 이 뉴욕의 히피들은 베트남전을 비롯해 당시의 사회적인 제약과 관습을 거부하던 반항아들이었고, 길게 기른 청년들의 머리 hair 가 바로 그들의 반항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사회적, 정치적 반항아들의 뮤지컬 <헤어> Hair 는 공연의 내용과 형식에서도 공연계의 관습을 깨뜨리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극의 구조는 전통적인 드라마의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고 여러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상황을 차례로 소개하는 나열식 구성을 택했다. 음악적으로는 로큰롤과 펑크 음악을 위주로 포크, 컨트리, 데모송, 팝송, 흑인영가, 찬송가, 인도의 명상 음악까지, 가지각색의 음악적 스타일을 혼용했다.

내용상으로는 공연윤리법에 저촉되는 마약과 섹스에 대한 적나라한 언급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1막의 마지막 장면은 전 출연진이 옷을 벗고 단체 누드로 관객을 한참 동안 노려보는 충격요법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뮤지컬 <헤어>는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에 도전장을 내면서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젊은이들의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록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보다 6년 먼저 선보인 <헤어>는 뮤지컬 역사에 기록되는 최초의 록 뮤지컬이다. 또한 42년 전인 런던 초연 당시, 웨스트엔드 최초로 전 출연진 전라 장면을 선사한 공연이기도 하다. 특히, 매너와 격을 중시하며 230년간 유지되었던 영국 공연 검열제도가 1968년 폐지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픈했던 이 작품은 대마초와 환각제 LSD를 노래 가사로 사용한 최초의 공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1947년의 보수세대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1967년의 히피 세대의 목소리를 담은 뮤지컬 <헤어>, 이제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10년,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세대에게 그들의 노래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점잔 빼는 런던 관객들에게 육탄 테러
<헤어>의 런던 공연은 히피들이 가득한 록 페스티벌의 난장을 닮았다. 길구드 극장의 넓지 않은 무대 바닥엔 인도풍의 카페트가 덕지덕지 깔려있다. 무대 뒤쪽엔 낡은 군용 지프가 한 대 서있고, 그 위와 주변에 12인조 밴드가 모여있다.

무대를 비롯하여 객석으로 이어지는 통로까지, 25명에 달하는 배우들이 형형색색으로 믹스매치한 히피풍 의상을 걸치고 나와 여기저기 걸터앉는다. 남자 배우들은 대부분 웃옷을 입지 않거나 맨살에 조끼만을 걸친 차림이다.

 

공간적으로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보이지 않는다.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시키는 배우들도 더러 있다. 그러다가 디온 역의 흑인 여배우 샤샤 알렌이 귀가 번쩍 뜨이는 시원한 열창으로 첫 번째 뮤지컬 넘버 ‘아쿠아리스’를 시작하면, 길구드 극장은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 현장을 방불케 한다.

달과 자유에 대해 노래하는  첫 곡, ‘아쿠아리스’는 애시드 록 Acid Rock 풍으로 멋지게 시작했다가 갑자기 종교집단의 엄숙한 의식을 연상케하는 음악으로 전환한다. 순간 출연진들이 원형으로 둘러 모여 명상을 시작한다. 징 소리가 울리면서 명상 시간이 끝남을 알리면, ‘헬로우’라는 정겨운 인사와 함께, 웃통을 벗은 낡은 청바지 차림의 장발, 버거(윌 스웬슨 분)가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점잖은 영국의 관객들이 제멋대로인 미국 젊은이들의 육탄공격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장발의 청년, 버거는 바지를 훌렁 벗어던지고는 무대 앞쪽 끝에 걸터앉아 앞자리에 앉은 관객을 맨발로 툭툭 차며 장난을 건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팬티 차림으로 객석으로 뛰어 내려와 아예 관객들에게 엎어지며 큰 대자로 드러눕는다. 그렇게 관객과 배우의 경계가, ‘예의’와 ‘자유분방’의 경계가 무너진다.

 

 

형식도 파격, 내용도 파격
뮤지컬 <헤어>는 그렇게 경계심을 허무는 공연이다. 수시로 객석을 침범하는 배우들은 자신들의 흥을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전염시킨다. 공연의 구성이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대개의 뮤지컬은 1막이 시작하고 30분 이내에 주요 인물이 다 소개되는 것이 상례인데, 뮤지컬 <헤어>는 한 시간 가까이 지나도록 계속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드라마가 시작할 기미도 없이, 전 출연진이 무대 위에 상주하면서, 한 명씩 차례로 앞에 나와 자신을 소개하고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뒤로 물러난다.

 

팬티 차림의 백인 청년 버거가 열여섯의 처녀 도나를 찾고 있다는, 다소 모호한 내용의 록 뮤지컬 넘버 ‘도나’ Donna 를 흥겹게 열창한다. 그 다음엔 닐이라는 청년의 리드로, 전 캐스트가 함께 대마초를 노래하는 포크송 풍의 ‘해시시’ Hashish 가 이어진다. 이내 무대의 배우들은 마약에 취해 섹스를 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그중 우프라는 남자 배우가 관객을 향해 ‘사랑한다’며 소돔과 고모라의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그린 곡 ‘소도미’ Sodomy 를 부른다. 그 다음은 흑인 청년 허드가 나와 펑크 리듬으로 ‘컬러드 스페이드’ Colored Spade 를 부른다. 목화밭의 노예로 시작해, 엉클 톰을 거쳐 엘리베이터 안내원으로 이어지는 미국 흑인들의 역사를 코믹하게 읊어대는 이 곡은 리드미컬한 펑크의 리듬으로 블랙코미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어서, 클로드라는 백인 청년이 단순하면서 코믹한 톤으로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노래하는데, 알고 보면 그는 영국과 아무 상관없는 폴란드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다시 흑인 청년 허드의 리드로 시작하는 ‘아이 엠 블랙’ I`m Black 은 전원이 합세하는 프로덕션 넘버로 발전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합창곡, ‘나는 없는 걸’ I Ain`t Got No 은 록을 기본으로 하는 데모송이다. 


이렇게 1막의 대부분은 매번 다른 배우들이 다른 음악 스타일을 소개하기 때문에, 스토리를 찾아내거나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거의 모든 배우가 무대에 계속 남아 코러스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배우들과 낯을 익히는 효과는 있다. 그리고 솔로곡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배우들은 원형이나 반원을 만들며 코러스 역할을 한다. 전환이 없는 무대에서, 배우들은 훌륭한 무대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들의 세상엔 술과 마약, 섹스가 있고, 동시에 인도향을 피워 놓고 평화를 구가하는 명상의 시간이 공존한다. 그들의 ‘신’은 ‘그녀’이고 ‘흑인’일 수 있으며, ‘물을 아끼기’ 위해서 ‘샤워는 친구와 같이’ 하는 것이 좋고, 베트남전을 위한 징집령에는 강경하게 반대해야 한다.


이렇게 한 시간 가량 히피들의 세계가 소개되고 나서, 서서히 극의 중심 드라마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노래했던 청년 클로드와 그의 부모님이 만나는 장면을 통해, 1947년의 부모 세대와 1967년 현재를 살아가며 방황하는 히피 세대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청년 클로드에게 초점이 모아진다. 클로드에게는 정상적인 인생을 살라고 강요하는 부모님이 계시다.

그리고 반정부, 반전 시위에 적극적인 당찬 여자친구 쉴라도 있다. 쉴라를 비롯한 클로드의 히피 친구들은 모두 베트남전을 위한 징집에 반대하지만, 클로드는 자원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그래서 그는 고민한다. 클로드의 솔로곡 ‘어디로 가야 하나’ Where Do I Go 는 답답한 그의 고민을 담은 절규이다. 이 곡이 끝남과 동시에 반항과 방황의 극점에 위치한 히피 젊은이들은 과감히 옷을 벗어던지고 전원 나체가 되어, 도전적인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면서 1막이 끝난다. 그리고 2막에서도 60년대 말의 역사적 상황이 파편적으로 재현된다. 단, 1막과는 달리, 2막에서는 클로드가 베트남전에 자원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나중에 차가운 시체가 되어 되돌아오는 종말을 보여준다.    

 

 

 

<헤어>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을까
뮤지컬 <헤어>는 전통적인 뮤지컬 문법을 적용하기 힘든 작품이다. 기승전결로 간결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이야기, 파편적인 스냅샷으로만 경험되는 당시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어>의 창작자이자 배우인 제임스 라도 James Rado 와 제롬 라그니 Gerome Ragni는 1966년 한창 붐을 이루던 플라워 칠드런의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나 센트럴 파크로 답사를 다녔고, 그때 만났던 실제 인물들이 <헤어>의 등장인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67년, <헤어>가 오프-브로드웨이의 퍼블릭 씨어터에서 개막할 즈음엔, 이미 뉴욕의 히피 문화는 시들어가는 과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과거였고, 베트남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비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가 믹 브라운이 요약하듯, <헤어>는 새로운 스타일과 새로운 시도로 당시 ‘사회사의 한 장을 생생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6주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애초의 예상을 뒤엎고 브로드웨이로 이전되어 2000회가 넘게 공연되는 성공 신화를 남겼다. 


2010년, 런던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헤어>는 이제 ‘과거’에 있었던 옛날이야기에 불과할까? 그 대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물론 세상은 많이 변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프리섹스를 지향하며 공동생활을 시도하는 코뮨 히피들은 더 이상 주위에 없다. 마약이나 단체 누드 신, 인도식의 요가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는 소재이다. 하지만 <헤어>의 세계에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중요한 이슈들이 담겨있다.

 

전쟁에 대한 분노,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 그리고 기성세대에 동의할 수 없는 젊은이들의 분노와 방황. 이런 것들은 어떤 시대이건 여전한 숙제로 남기 마련이다. 더구나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 비즈니스는 나라만 바꾸어 가며 반세기가 넘도록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로 인해 주검으로 고향에 돌아온 젊은 병사를 맞으며 눈물 흘리는 가족과 친구는 아직도 지구촌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그래서 주인공 클로드 역을 맡아 열연하는 개빈 크릴 Gavin Creel 이 꽃다운 젊음을 고뇌로 채울 때, 관객들은 같이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낀다. 특히 그가 군복을 입은 채 차가운 시신이 되어 귀향하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버거 역을 맡은 윌 스웬슨 Will Swenson 이 웃통을 벗은 채 무대를 종횡무진하면서 자유를 갈구할 때 많은 사람들의 목젖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출가, 다이안 폴루스 Diane Paulus 가 격렬한 에너지를 담아 재현해낸  21세기의 <헤어>를 관람하는 관객들에게도 클로드가 던졌던 질문이 아직 풀리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Where Do I go 하는. 


사뭇 심각한 주제와 사회적 이슈들을 담고 있지만, 뮤지컬 <헤어>는 고민하기 위한 공연은 아니다. 고민과 좌절을 노래와 춤으로 풀어내는 희망을 위한 공연이다. 60년대 말의 로큰롤 선율을, 펑크 리듬을, 가슴 찡한 포크송을 들으면서 발장단을 맞추는 그런 공연이다. 출연진들은 배우이기보다는 가수에 가깝고 그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에너지가 관객들의 가슴에 전해질 무렵이면, 그 순간 거침없는 헤드뱅잉을 하여도 좋다. 그리고 오늘을 잊고 잠시 춤으로 왜 사는지에 대한 대답을 삼아도 좋은 공연이다. 그래서 공연이 끝날 무렵, 배우들에게 이끌려 무대 위로 올라간 관객들은 함께 신나게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수백 명의 관객들이 배우들과 마구 섞여 무대 위에서, 통로에서 흥겨이 춤을 추는 모습을 런던의 무대에서 보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수시로 객석을 방문하는 미국 배우들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설득으로 인해, 온몸으로 분출하는 그들의 자유분방한 정신이 숫기 없는 영국의 관객들에게 전염된 듯했다. 공연이 끝나고 한참 동안 파티 분위기가 유지되었고,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배우들이 잘 아는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그것만으로 뮤지컬


<헤어>는 충분했다. 매일 밤 그렇게 많은 관객들을 유혹하고, 사로잡고, 무대 위에 질펀한 파티를 열 수 있다면 말이다.  더불어 집에 가는 길에 1967년의 그들의 고민을 되새기면서,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잠시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뮤지컬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0호 2010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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