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링컨센터의 씨어터 시리즈로 제작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Women on the Verge of a Nervous Breakdown은 영화 <그녀에게>, <나쁜 교육>, <귀향>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1988년 작 ‘Mujeres al borde de un ataque de nervios`을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26주년을 맞은 링컨센터 씨어터 시리즈의 위상에 걸맞게 토니상을 수상한 저력 있는 배우들을 내세워 리메이크된 이번 작품은 바람둥이 이반 Ivan을 둘러싸고 그의 인생을 공유하고 있는 아내 루시아 Rucia 와 지나간 연인이자 이 극의 주인공인 페파 Pepa, 그리고 이반의 새로운 연인인 파울리나 Paulina 가 좌충우돌 사건을 겪으며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좌충우돌 벌어지는 사건들 사이에서 쏟아지는 유쾌한 웃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자체로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원작의 이국적인 매력을 충실히 재현한 무대와 원작을 뛰어넘는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를 그 매력의 요소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을 충실하게 살리려는 제작의도, 원작을 뛰어넘는 감초 배우들의 연기
공연은 전체적인 배경설정부터 세세한 장면들까지 원작을 살리려는 의도가 충실해 보인다. 원작의 배경인 마드리드는 영화의 또 다른 요소로 그 매력적인 풍광을 자랑하는데, 이번 공연의 제작팀 또한 이러한 영화의 이국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마드리드의 유럽식 건축물들과 풍광을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편집해 무대 배경에 영사하는가 하면, 배우들 전체가 스페인어의 강한 영어 악센트를 특별히 코치 받아 구사하는 등 순수 미국에서 제작된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원작의 매력을 무대화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유쾌한 성격에 맞추어 영화가 가지고 있던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는 많이 사라졌지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원작 내의 코믹한 장면들 또한 버리지 않고 무대 위에 재현한 노력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남편의 연인들을 미행하며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는 루시아가 영화 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를 휘날리는 장면이 있는데,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이러한 영화 내 장면이 연극적 장치를 이용해 코믹하게 재현되었고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제작팀이 원작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인 부분들은 캐릭터의 묘사인 듯 보인다. 원작 캐릭터들의 머리색과 의상은 물론 이번 공연에 캐스팅된 거의 모든 배우들이 원작의 캐스트들과 매우 유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원작 배우들의 캐릭터를 염두에 둔 흔적이 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몇몇 캐릭터들은 원작의 몫 이상을 충실히 해내며 제작팀의 캐스팅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택시 운전사 역할로 등장하는 대니 버스테인 Danny Burstein은 극의 초반 마드리드라는 노래를 부르며 관객들의 호감을 얻고, 그 호감은 극의 중간중간 주요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극의 전개를 돕는데 톡톡한 역할을 해낸다. 페파의 친구 캔덜라 Candela 역의 로라 베난티 Laura Benanti 는 타고난 코미디 감각으로 세세한 장면들에서까지 관객의 웃음을 유발시킨다. 배우로서 그녀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코믹적인 순간들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 공연의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중 하나로 자신만의 캔덜라를 만들어 내었다. 특히 돋보였던 배우는 이반의 아내 루시아역을 맡은 패티 루폰느 Patti Lupone . 여러 작품을 통해 토니상과 각종 연기상을 받은 이 관록 있는 여배우는 작은 호흡, 몸짓 하나로 관객들을 쥐고 흔드는 저력 있는 모습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극 초반 몇몇 아쉬운 배우들의 연기와 코러스의 식상한 사용이 때때로 극의 흐름을 상투적으로 만들고 아직 미완된 빈틈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저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력은 관객이 공연의 빈틈을 잊고 극을 즐기도록 상당부분 돕고 있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일 수 없는 무대구성
그간 여러 작품으로 토니상에 노미네이트 된 경력을 가지고 있는 무대 디자이너 마이클 이어건 Michael Yeargan 은 수시로 바뀌는 극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무대화시켰다.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만큼 수없이 나누어지는 장면들을 무대화하기는 얼핏 보기에도 쉽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대 뒷배경과 무대바닥, 그리고 극장의 높은 천장을 이용해 구성된 다양한 세트는 끊임없이 바뀌는 극적 공간을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인 이반에게 버림받고 수면제의 도움으로 힘들게 잠을 청한 페파의 침대가 특수 장치를 이용해 빙글빙글 돌고, 그 모습을 천정에 비스듬하게 떠 있는 대형 반사물을 통해 관객들에게 비추어준다. 이는 마치 페파가 어지러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이러한 페파의 상황을 관객도 고스란히 느끼게 만든다. 또한 건물 아래로 추락한 캔덜라가 갑자기 밧줄을 타고 무대 천장으로 내려와 순간적으로 공간을 뒤집기도 한다. 이렇듯 극장의 공간을 충분히 활용한 무대 활용은 원작의 공간을 충실히 재현할 뿐만 아니라 공연만이 만들어 낼 수 연극적 재미를 더해내고 있다.
특히 무대를 가로로 잘게 나누어 각각이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한 바닥의 사용이 인상적이었다. 수시로 바뀌는 극적 공간과 잠시 스쳐가는 원작의 장면들을 묘사하기 위해 무대 바닥이 잘게 나뉘어 빠르게 이동하는데, 이러한 장치의 이동이 예상치도 못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무대 위의 등장인물이 전화를 받을 때, 그 전화를 거는 상대방의 공중전화 부스가 나뉘어져 있는 무대 바닥의 한 부분을 이용해 등장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하는 루시아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순식간에 등장했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동무대의 사용이 현재 등장해 있는 등장인물들과의 다른 공간을 순식간적으로 만들어낼 뿐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한 캔덜라가 페파에게 하루 종일 수십 통의 전화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캔덜라가 하루 동안 이동하는 공간을 무대 바닥이 쉴 새 없이 이동해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이 이동바닥이 없었다면 원작의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어떻게 무대화했을지 감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매우 효과적인 무대였고, 그 몫을 충실히 해 내었다.
현지의 평가
이 공연이 보여주고 있는 가벼운 코믹요소들이 그간 링컨센터의 씨어터 시리즈가 보여온 위엄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관객들은 공연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인터미션을 알리며 불이 켜지는 순간 함께 온 친구 또는 연인과 얼굴을 마주치며 웃는 관객들의 모습에서 이번 공연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엔터테인먼트의 목적을 지나치게 살리고 있는 이번 공연에 대해 평단의 평가가 호의적이진 않지만, 공연마다 각자의 목적과 성격이 다르고 그것을 여유 있게 받아들인다면 공연평이 꼭 전문가의 비평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듯 보인다. 일상에서 이 정도로 웃을 일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공연은 모처럼 보는 내내 실컷 웃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9호 2011년 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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