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연두라는 말을, 4월의 잎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들려주는 할머니의 눈이 꿈꾸듯 빛난다. 오이가 크는 모습을 보고 느낀 경이로움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주름진 입술에선 싱그러운 오이 냄새가 난다. 가지의 보랏빛이 지닌 신비를 설명하는 목소리가 비온 뒤의 은빛 거미줄처럼 떨린다.
후두둑 떨어지는 감꽃달, 짙은 숲 속에 내 마음의 바람이 스미는 달, 오이가 크는 달, 참나무잎이 5mm씩 자라는 달….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강좌를 맡았을 때였다. 인디언식 이름 짓기를 해보고 그것을 설명하는 시간. 어르신들이 유월에 붙인 이름들이 어쩌면 다들 유월다운지 내 마음에 푸른 물이 드는 것 같았다.
내처 자신의 이름도 인디언처럼 지어보았다. 그중에 제일 마음을 끈 것은 ‘선인장 꽃을 딸 때’. 선인장이라는 식물과 꽃, 상반되는 이미지의 충돌이 빚어내는 미묘한 아름다움. 뜨거운 빛 아래 꽃을 따는 여인의 모습. 선인장 가시에 찔렸던 기억. 모래와 태양의 냄새….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누가 아닌 이 이름의 주인 것이어서.
51년 안동 출생. 자양동 골목시장에서 30년 가까이 떡집을 하고 있다. 수업시간마다 떡을 한 봉다리씩 돌리곤 하는, 손이 큰 여자. 마흔에 혼자가 되었다. 그 후 흔들리거나 힘이 들 때면 한복 치마끈으로 가슴을 바짝 조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는, 그렇게 동여매면 또 살아갈 힘이 솟곤 했다는, 선인장 같은 여자. 혼자 떡집을 꾸려가는 와중에도 틈틈이 목욕 봉사나 동화 구연을 한다는, 꽃 같은 여자.
그 수업을 통해 시라는 것을 처음 접한 그녀가 태어나 처음 사 보았다는 시집을 보여주었다. 못 배운 여자의 그것임을 숨기지 못하는 거친 필체로 시집 여백에 빼곡히 쓴, 역시나 처음 써본다는 시. 그것을 세월의 풍파가 스민 허스키한 목소리로 읽어줄 때는 눈물이 다 났다. 어느 날인가는 ‘요즘 연애하세요?’ 여쭈었던 적이 있다. ‘선인장 꽃을 딸 때’님 얼굴에서 문자 그대로 빛이 나서였다. 그녀는 그즈음 알게 된 작가 고 권정생 선생님과 연애를 하고 있다고, 글을 읽고 쓰는 재미를 느끼며 사는 요즘이 평생 가장 즐겁고 기쁜 때라고, 시를 알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웃는다. 정말 연애를 하는 스물의 여자처럼.
시에 대해 이야기한 다른 자리가 있었다. 70명쯤 되는 분들께 ‘시’ 하면 뭐가 떠오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육사, 김소월 외에는 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평생 손에 책 대신 망치를 들고, 기름을 묻혀온 자동차 생산직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문학작품을 읽었던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경험담을, 69일이나 갇혀 있으면서도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서 살아남았던 칠레 광부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우리가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처음 배운 자장가에 대해, 있는 구멍도 못 뚫는 서방을 원망한 아라리에 대해, 우리가 노래방에서 불렀던 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소월의 「실버들」을, 정지용의 「향수」를, 서정주의 「푸르른날」을, 고은의 「세노야」를 읽어드렸다. 희자매의 ‘실버들’을, 이동원·박인수의 ‘향수’를, 송창식의 ‘푸르른날’을, 양희은의 ‘세노야’를 들려드렸다. 몇몇 분들이 따라 불렀다. 졸던 분들도 깨어서 같이 불렀다. 봄날의 강의실이 중년 남자들의 우렁우렁한 노랫소리로 가득했다. 내 속에도 뜨거운 무엇이 차올랐다. 시를 노래하는 분들의 눈 속에 떠오른 빛이, 그 반짝임이 오월의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가 무엇이냐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시는 힘이 없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구나 떡집 여자이고 공장 노동자이다. 그리고 시는 겨우 그런 것이다. 경숙 씨의 얼굴에, 기계공 김 씨의 눈 속에 넘치는 빛 같은 것. 한 편의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십일월에도 유월을, 떠나온 연애시절을 살 수 있는 일은 아닐까.
시월이어서다. 어감 때문인지 시월은 왠지 시가 더 어울리는 달이라서 나는 여기다 이런 시시한 얘기나 늘어놓아 보는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1호 2013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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