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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칼럼] 과자를 먹는 순서 [No.123]

글 |허은실 2014-01-14 3,902

당신은 어느 쪽이었나? 맛있는 것부터였나. 반대로 맛없는 것부터였나.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먹는 순서 말이다. 지금에야 이런 게 아직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어릴 적만 해도 최고의 명절 선물은 비교할 것도 없이 과자선물세트였다. 특히 이렇다 할 간식거리를 접할 수도 없는 시골 출신이었던 데다 군것질을 하라고 용돈을 줄 만큼 넉넉한 부모님을 두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린 나에게 그것은 명절을 ‘明절’이게 하는 유일한 아이템이었다. 껌과 사탕과 비스킷과 초콜릿 등 종류도 다양한 내용물도 내용물이지만 선물 상자를 싸고 있는 알록달록한 포장지 자체가 내겐 하나의 은유처럼 남아있다. 그것은 일테면 달콤한 것, 꿈꾸는 것, 특별한 것.   

아, 그래서 어떤 순서였는지를 물었지. 나로 말하자면 맛없는 것부터였다.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겠지만 그래서 나는 ‘ㅊ크래커’ 같은 무미한 과자부터 먹었다. 초콜릿 같은 달고 비싸고 맛있는 과자는 내일을 위해 아껴두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은 같은 양으로 주어진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인생도 어쩌면 과자선물세트 같은 것은 아닐까. 누구나 그것을 받는다. 누군가는 당장의 행복을 음미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먹고 싶은 과자의 봉지를 뜯는다. 내일은 모른다. 누군가는 오늘의 불행을 감수한다. 혀가 즐거워하지 않아도 가장 맛없는 과자를 뜯는다. 내일을 위해서다. 나중의 그 누군가가 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끼고 미루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2년 전 봄,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자기’라는 진부한 부사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아버지는 쉰일곱, 호랑이처럼 산을 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산에서 갑자기 떠나셨다. 발을 헛디디신 것이다. 또다시 이처럼 진부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죽음은 그렇게 예고가 없다. 모든 세상의 엄연한 진실들은 사실 이렇게 닳고 닳아서 진부해진, 그래서 아무런 느낌이 없어진 말들 속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진부한 말로 지어진 책의 제목이 떠오른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너무나 당연해서 어떠한 새로운 각성도 일으키지 못하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그러나 과자를 먹는 순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했다. 미국의 작가인 데이비드 실즈가 쓴 이 독특한 에세이는 유년기부터 노년기, 잉태되는 순간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인간의 몸이 연령대별로 겪게 되는 죽음의 과정을 생물학적인 수치와 냉정한 통계로 제시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자신과 아버지와 딸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문학적 경구를 끼워 넣고 있다.

책에 따르면 우리 몸의 전성기는 7세이다. 그 이후엔 사망률이 증가한다. 뇌가 최대로 커지는 때는 25세, 그래서 지능지수가 가장 높은 것도 25세다. 이후에는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호흡 능력은 20세부터 매년 1퍼센트씩 줄어든다. 척추는 30세부터 매년 0.16센티미터쯤 줄어, 키도 조금씩 작아진다. 근력과 조절 능력, 생식 능력 모두 20세 전후가 절정이다. 감각 영역은 어떤가. 미각은 태어나서 불과 몇 달 만에 퇴화를 시작해 20대 초반부터 짠맛과 쓴맛을 감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냄새를 구별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죽고 있다.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한 해 한 해 아니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까 내일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을, 공원을 산책하는 것을, 술을 마시는 것을, 사랑을 나누는 것을.

 

다시 그 아이 얘길 해보자. 아껴두었던 과자를 두고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야 하거나 도둑을 맞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 그 아이의 대사는 이것이 아닐까.

‘맛있는 것부터 먹을걸.’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아니다. 우리는 지금, 죽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3호 2013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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