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하고 불안한 기운이 넘실대는 나탈리 포트만의 적갈색 눈동자가 정면을 주시하는 <블랙 스완>의 포스터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만만치 않은 영화일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무서웠던 영화 <레퀴엠>의 감독에 대한 당연한 예우라고 할까. 하지만 2시간을 조금 넘는 상영 시간 내내 각오한 것 이상의 정신적인 공격을 참아내면서 ‘이건 스릴러가 아니라 호러 영화잖아!’라는 비명을 꾹꾹 눌러야했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으로서 관람 예정인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은,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신체 훼손에 대해 평균 이상으로 민감한 편이라면 피하거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것이다.
<블랙 스완>의 이야기는 거의 동화 수준으로 단순하다(내용상 잔혹 동화이기는 하다만). 수줍음 많고 소극적인 성격 탓에 주역을 맡아 본 적이 없지만, 백조 역에 완벽한 분위기와 테크닉을 겸비하고 있는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새로운 백조 여왕으로 깜짝 캐스팅되면서 완벽한 흑조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스스로를 파괴해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전부다. 하지만 환각제를 복용한 듯 아름답지만 귀기 서린 영상은 극성맞은 어머니의 꿈 안에서 오르골 인형처럼 살아온 발레리나의 연분홍빛 침실에 이미 미세한 실금이 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극 초반부터 불안감을 점층적으로 가중시킨다. 붕괴되어가는 정신에 오염된 것처럼 망가지는 육체의 이미지는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하는데, 이 충격 요법은 마지막 순간 벼랑 끝에선 니나가 비로소 무대에서 도달하게 되는 한 지점까지 관객들을 함께 몰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실 발레만큼 괴담, 또는 기담과 깊이 닿아있는 장르는 드물다. 이 장르의 대표작들은 마법에 걸려 새의 몸에 갇힌 왕녀(<백조의 호수>), 연인에게 배신당한 처녀 귀신(<지젤>), 남자에게 날개를 빼앗기고 죽어가는 요정(<라 실피드>)에 대한 이야기이다. 맞은 편 아파트 베란다에서 하얀 발레복을 입고 춤추는 소녀를 보면서 황홀해했는데 다음 날 알고 보니 자신이 본 것이 목을 맨 소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는 이야기부터 라이벌을 해치기 위해 발레 슈즈 안에 넣어둔 압정 같은 섬뜩한 이미지들은 고전영화 <분홍신>에서 한국 영화 <여고괴담 3 - 여우계단>에 이르기까지 깊이 스며들어있다. 발레는 극단적으로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고, 극단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인간 세상 너머의 것이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다.
음악의 아름다움, 그림의 아름다움, 문학의 아름다움과 달리 이 예술에는 신체성이 너무나 강하게 요구된다. 작업에 신체성이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하위 예술이라고 폄하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고리타분한 관점은 구석으로 밀어두더라도, 인간의 육체가 절대미를 담아내기에 지나치게 연약하고 쉽게 변하는 그릇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함에서 오는 불길함이 발레라는 장르가 맞닿아있는 서늘한 공포와 신경질적인 광기의 강력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쇼 엔터테인먼트가 상업성의 끝을 보여주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극장은 신전이며 공연은 제의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순간들이 있다. 경지에 오른 공연자가 샤먼, 또는 번제물로 자신을 불사를 때처럼 말이다. 니나는 제 영혼과 육체를 제물로 바쳐서 오직 피와 눈물로만 목을 축일 수 있는 검은 새로 다시 태어나고, 관객들은 그 단 한 번뿐인 ‘완벽한’ 무대에 열광한다. <블랙 스완>에서 니나가 보여주는 무대는 무시무시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 춤에 뜨거운 기립 박수로 경의를 표하는 우아한 현대 예술의 감식가들과, 검투사의 피를 보아야 만족할 수 있었던 고대 콜로세움의 로마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르겠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충 잊고 살 수 있는 소멸의 운명과 육체의 문제들을 매 순간 극한까지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아야 하는 삶은 마치 희생 제물의 목덜미처럼 비장하고 강렬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새인 몸으로 피 흘리는 니나를 통해 그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0호 2011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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