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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노장의 빈 무대 <11 그리고 12> [No.81]

글 |정명주 사진제공 |Pascal Victor (ArtComArt) 2010-08-17 4,178


20세기 세계 연극계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피터 부룩, 올해로 여든다섯 살이 된 그가, 자신의 연극 인생을 집결한 공연, <11 그리고 12>를 런던 바비칸센터를 거쳐 서울의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다(6월 17일~20일). 피터 부룩은 1965년,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마라 사드>로 토니상의 최우수 연극상 및 연출상을 수상했던 노장 연출가이고, 1985년 인도의 성전 <마하바라타>를 장장 9시간짜리 대형 야외극으로 선보여 세계를 경악케했던 화제의 연출가이다.  20세기를 거치며 수많은 화제작을 선보였던 그가 팔순이 넘어 선보이는 연극 <11 그리고 12>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11 그리고 12>의 무대는 너무나도 간소하다. 빈 무대 위에 빨간 카펫 하나, 그리고 헐벗은 나무 몇 그루, 나무 의자 몇 개, 모래 몇 줌, 그것이 전부이다. 그 간소한 공간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얼굴색이 다른 열 명 남짓의 배우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먼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예배를 볼 때 기도문을 11번 낭송하느냐, 12번 낭송하느냐로 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던 시골 마을의 이야기이고, 불교의 선문답과 같은 노 수도승들의 이야기이다, 이것이 노장의 연출가가 도달한 연극의 정수이다. 모든 장식과 껍데기를 버리고 ‘빈 공간’에서 들려주는 작지만 큰 이야기, 언어와 문화와 모든 장벽을 넘어선 ‘보편적인’ 이야기를 노장의 연출가는 조용히 들려준다.

막이 오르면 흑인청년 하나가 모래 위에 펼쳐진 빨간 카펫 위에 올라서면서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작은 ‘염주알’ 하나에서 얼마나 많은 시샘과 증오와 살인, 학살이 야기될 수 있는지를 보아왔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청년의 이름은 ‘암쿠렐’이다. 아프리카어로 ‘작은 이야기꾼’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아명이다. 극 중 이름은 아마두 함파테 바, 원작 『티에노 보카』를 쓴 아프리카 작가의 이름과 같다. 책의 내용은 ‘티에노 보카’라는 수피교의 고승을 실제 인생의 스승으로 두었던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암쿠렐이 서 있는 빨간 카펫은 그 작가의 고향인 아프리카 말리의 이야기 전통에서 빌려 온 것이다. 카펫을 펼쳐놓고, 이야기의 공간, 즉 상상력의 영역을 설정하면서 ‘판’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70년대 초, 피터 부룩이 세계 각국에서 모인 다국적인 배우들을 모아, 보편적인 연극 언어를 찾아 아프리카를 유랑하면서 발견한 연극적 장치이다. 그리고 피터 브룩이 그의 명저 『빈 공간(The Empty Space)』에서 역설하였듯이, 그 작은 카펫 위의 빈 공간이야말로, 잡다한 연극적 관습이나 장식(The Deadly Theatre)을 모두 버리고, 대중성이나 인기에 영합(The Rough Theatre)하지 않고, 반짝이는 연극정신을 가지고(The Immediate Theatre), 성스러운 연극성(The Holy Theatre)에 도달하기 위해 선택한 연극적 장치인 것이다.

불교의 선문답 같은 대화와 교훈적인 우화들이 담긴, 어쩌면 매우 동양적인 이야기를, 서양의 노장연출가가 연극 인생의 결정판으로 내보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피터 브룩은 평생에 걸쳐 신비교의 교주인 구르디예프(Gurdjieff 1877~1949)의 우주적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해 온 신비교 신자이다. 고대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했던 구르디예프의 사상은 우주적인 조화를 기본으로 했다. 즉, 세상에는 수천 개의 현실(믿음)이 존재하며, 이 복잡하게 설킨 현실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편협된 현실을 좇을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 어우러진, 조화로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설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르디예프의 가르침은 피터 브룩의 인생과 연극에 기본적인 축이 되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11 그리고 12>는 이러한 ‘다양성의 조화’를 시도한다. 다양한 국적과 문화의 배우들을 기용한 캐스팅에서부터 그것은 분명하다. 연극적인 기법 면에서도 앞서 설명한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기본틀로 하면서, 텍스트에 기반한 서양 연극의 기본 방식을 이용했다. 오랫동안 피터 브룩과 작업해 온 프랑스의 희곡작가, 마리 엘렌 에스티엔느가 『티에노 보카』를 개작한 희곡이다. 음악적으로는 토시 스치토리 일본 노연극의 코러스처럼, 상황에 따라 긴박감 넘치는 북소리와 애잔한 피리소리를 통해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애절한 현의 울림을 들려준다. 무대 장치는 인공적인 소재를 일체 배제하고, 나무와 흙, 천 등의 자연 소재만을 사용하여 우주적인 상징을 기도했다. 이렇게 다양한 전통을 취합하면서도, 단순미로 구현해 낸 무대는, 피터 브룩이 평생을 찾아낸 ‘정제된’ 본질로서의 연극을 위한 공간이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서양연극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2,30대를 거쳐서 이미 모두 시도했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관례에 발이 묶여 ‘죽어버린’ 서양 연극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영국을 떠나 다국적 배우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인도로 여행을 하며, 서양 연극의 고정된 문법을 대신할, 보다 원초적인 연극 언어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여정을 통해 ‘궁극적인 연극의 본질’을, 모든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는 세계적 보편성을 담보하는 연극을 추구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것이 바로 <11 그리고 12>의 ‘빈’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주제 면에서도 <11그리고 12>에는 구르디예프의 가르침의 정수가 극 중 인물, 티에노 보카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세상에는 세 가지 진리가 있다. ‘나의 진리, 너의 진리, 그리고 진짜 진리.’ 이렇게 각자의 진리들이 ‘다양성 속의 조화로운 일체’를 이루지 못하는 세상에는, 분쟁과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곧, 85세의 노장 연출가 피터 브룩이 인생을 정리하며 세상에 꼭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 것이다. 신념, 즉 자기만의 진리를 고집하는 것은 세상의 독이 될 뿐이다. 그렇게 평생의 신념을 담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다. 그 또한 그만의 진리일 뿐이므로. 그래서 감정이 배제된 나지막한 목소리의 배우들을 통해, 참으로 겸손한 무대를 통해, 피터 브룩은 그가 생각하는 연극의 본질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조심스레 말한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1호 2010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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