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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칼럼] 우리가 지난 여름에 한 일 [No.85]

글 |김영주 (자유기고가) 2010-10-18 4,406

한철 내내 몸에 밴 버릇대로 얇은 이불을 아무렇게나 밀쳐놓고 잠들었다가 잊고 있던 한기를 느끼면서 깨어날 때 여름이 지난 것을 알게 된다. 하늘이 서늘하게 높아지거나, 가로수 잎들이 엽록소를 잃고 붉고 노랗게 물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여름이 끝나갈 즈음, 우연히 성장 영화 몇 편을 몰아서 보았는데 어쩌다 보니 연달아 본 그 영화들 중에서 가장 선명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히스토리 보이즈>와 <디스코 피그>였다. 둘 다 연극이 원작이고, 무대에 선 배우들이 영화에 그대로 출연했고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킬리언 머피가 제일 잘하고 잘 어울리는 역할 - 미친 놈 연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골라든 <디스코 피그>는 소년이 소녀를 만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성장기의 폐쇄적이고 강박적인 집착에 휩싸이면 얼마나 섬뜩하고 처연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였다.
몇 초 차이로 태어난 갓난아이들이 병원 침대에서 서로의 울음소리를 듣고, 눈을 마주친 순간 사랑에 빠져서 영원히 함께하기로 운명 지어졌다는 룬트(일레인 캐시디)와 피그(킬리언 머피)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와 완전히 합일될 수 없는 세계로 밀려나는 것을 거부하는 피그의 발버둥으로 점점 파국을 향해 간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여도 괜찮은 시절을 자연스럽게 통과하지 못하는 이 예민하고 비범한 아이들은, 별명과 암호로 가득 찬 자신들의 작은 궁전에 피 칠갑을 하는 것으로 여름의 끝을 맞게 된다.

반면 <히스토리 보이즈>의 영국 소년들은 바깥세상을 향한 의심과 호기심을 함께 가진 비교적 건강한 10대 아이들이다. 별 볼 일 없는 공립학교에 다니지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지망하는 영재들이라 교장의 절대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는 여덟 소년들은 입시를 위한 특별 수업을 받으면서 보편적이고도 개별적인 통과의례를 겪게 된다.  
아이들이 옥스브리지에 가기를 원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모두가 원하는 곳이기 때문에, 짝사랑하는 동급생에게 좀 더 가치 있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아버지가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갖게 된 목표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지성의 바다에서 희희낙락 물장난을 치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는 앞서 가는 이에게 넘겨받아 자기 안에 머물게 된 지와 사랑을 뒤따라 올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것’이 삶과 배움의 의의임을 가르쳐주는 선생님도 있다. 곰 같은 외모와 달리 역사와 지성을 사랑하는 우아한 정신을 가졌지만, 남학생들의 몸에 손을 대는 몹쓸 버릇이 있는 나이 든 교사 헥터는 <히스토리 보이즈>의 모든 소년들만큼 진지하고 사려 깊게 다뤄지는 캐릭터다. 우리는 그의 눈을 통해 성장기라고 부르는 특정한 한때를 보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예민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그 눈부신 여름날들의 잔영을 자기 영혼 안에 남겨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생의 여름이 지나갈 때, 우리는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면서 안도한다. 그 여름이 너무 뜨겁고 푸르러서 차마 넘기지를 못하고 부서져버리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누군가로부터 이어받아 다음의 누군가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방법이지만, 나 자신의 지난 한때와 현재의 나 사이에 연속성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변하고, 늙고, 죽어가겠지만, 변하지 않는 무엇이 세상에서 영속하게 돕는 한 ‘마디’가 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늦여름과 초가을이 이어지는 이 시기의 어렴풋한 멜랑꼴리가 성장물의 마지막 장면에서 맡게 되는 냄새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 여름이 끝났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5호 2010년 10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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