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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봄은 어디로 [No.81]

글 |김영주 2010-08-17 4,682

얼마 전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에서 열린 <한국미술, 근대에서 길찾기 전>을 보러갔다. 부끄럽게도 한국화에는 청맹과니나 다름없지만 진짜 좋은 작품은 바보의 눈에도 좋은 법이라, 빈 주머니에 넘치게 귀한 것들을 담을 수 있었다.
석파 이하응, 그러니까 흥선대원군과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보면서 비범한 예술가가 뛰어난 정치가이자 고매한 학자였던 시절이 불과 100여 년 전이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사제지간인 이당 김은호와 운보 김기창의 작품도 한 공간에 있었는데, 똑같이 친일 부역자의 길을 걸었던 스승과 제자이지만, 예술가로서의 격은 ‘청출어람 청어람’인 것이 확연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당을 생각했다. 적극적인 친일행각에서 독재자 찬양까지 참으로 일관성 있게 한 생을 살았던 자의 아름다운 시에 대한 애증을 어떻게 정리하면 되는지, 전보다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그전까지 몰랐던 작가의 작품 중에는 노수현의 「춘경산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다른 작품에는 딱히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데, 현실 공간인 것도 같고, 이상 세계인 듯도 한 그 봄날의 산수화는 한참을 사로잡혀 바라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수묵담채화에서 복숭아 색 꽃물이 방울방울 맺혀 똑똑 흘러내릴 것 같은 「춘경산수」는 마음 한켠을 간질간질하게도 했고, 꽃망울이 터지듯 짜릿하게도 했다.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영어학원의 회화 수업에서 한국의 자랑거리가 뭐냐는 주제로 대화를 하다보면, 학생들은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아름다운 사계절’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데, 외국인 강사들은 그 이야기를 이상하게 생각한단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한국의 자랑거리라고 손꼽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러게 싶었다. 심지어 얼음제국이라는 러시아에도 여름이 있다는데. 생각해보면, 한반도에만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계절 각각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변화에 각별히 애착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올해 한반도의 봄은 참 이상했다. 지난 십여 년간 프레온 가스, 오존층, 온실효과 등등으로 설명되는 지구 온난화 현상이 지속되더니, 최근에는 그렇게 딱 떨어지는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없는 당혹스런 기상 이변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개나리와 목련과 벚꽃과 라일락이 순서도 없이 한꺼번에 쫓기듯 피었다가 저버리고, 온 적도 없는 것 같은 봄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가버렸다. 이제 봄보다 길어진다는 장마를 감당해야할 초여름이 목전이다. 
식상한 만큼 당연하게 여겼던 ‘계절의 여왕, 5월’이라는 표현도 올해만큼은 사실 관계가 맞지 않아서인지 들리지 않는다. 봄옷을 제대로 꺼내 입을 새도 없이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스승의 날도, 성년의 날도 지났다. 생활 속의 필부필부들이 돈 나갈 날들이 많아서 허리가 휠 지경이라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이에 5.18 민중항쟁 기념일도 지나갔다. 고립된 광주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살아남은 이들이 부르던 절절한 노래 한 곡이 공식행사에서 금지당한 것이 5.18 민중항쟁 30주년을 상징할 만한 사건이었다.
봄날, 밤의 한때에는 천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소동파가 썼다(春宵一刻値千金)). 숨바꼭질 하는 아이의 옷자락처럼, 긴가민가 싶어서 들여다보니 사라져버린 올해의 춘소(春宵)에는 옛 시인이 매긴 값에 다시 천금을 더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그 전에, 올해 우리에게 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분명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1호 2010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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