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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헤더스> HEATHERS [No.132]

글 |정예경(뉴욕 통신원) 사진 |Chad Batka 2014-10-29 8,933
오프브로드웨이여서 가능한 사회 풍자극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헤더스>는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다 따라하지만 여전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사춘기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우중충하고 어두운 세기말적 분위기 탓에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마이클 레만의 독특한 연출과 위노나 라이더와 크리스천 슬레이터의 열연으로 뒤늦게 마니아층이 형성됐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명력을 이어가 결국 브로드웨이까지 오게 됐다.   
극은 어둡지만 창작자들은 전체 분위기가 심각해지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많은 손질을 가했다. 이야기를 크게 바꾸지 않고도 다면적인 감정으로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어떤 면에서는 좀 닮았지만 좀 더 급진적인 캐릭터들이 많다. 그런데도 음악과 이야기는 부담스럽지 않다. 재미있게 볼 만한 대중적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지만, 비평가들의 높은 점수를 얻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치고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흥행 대열에 섰음에도 토니상을 노려볼 수 있는 ‘그 무엇’이 부족하다. 마치 가요대상을 받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인기 댄스음악 같달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걸 보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즐겁다는 것이다! 



계급사회를 담아낸 고등학교

1989년 9월 웨스턴버거 고등학교. 고3이 된 여주인공 베로니카 소이어가 노래하며 학교 요주의 인물들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이 학교에는 세 명의 동명이인, 퀸카 겸 일진 ‘헤더’들이 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소위 ‘잘나가는’ 이 셋을 동경하기도 하고, 그녀들의 눈 밖에 나 왕따가 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세 명의 헤더들 중 우두머리, 거침없고 잔인하며 이 중 제일 똑똑한 금발 미녀 ‘헤더 챈들러’. 그녀는 ‘인기를 누리는 것이 헤더들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2인자 ‘헤더 듀크’, 그리고 ‘헤더 맥나마라’가 있다. 이 밖에 헤더들과 어울려 다니는 풋볼 팀의 킹카 ‘커크’와 ‘램’이 있는데, 이들은 힘자랑을 하면서 친구들을 괴롭히는 게 유일한 낙이다. 
베로니카는 마이너 그룹에서 벗어나고자 헤더들에게 잘 보이려 하고, 그들 무리에 끼게 된다. 인기녀로서의 생활은 즐거울 듯했으나, 실상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 챈들러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오랜 친구인 고도비만녀 ‘마르타’를 재미 삼아 웃음거리로 만들자는 계획에 동조하지 않자, 헤더 무리의 눈 밖에 나고 학교 생활은 예전보다 몇 배로 힘들어진다. 
이렇게 우울한 생활을 하는 와중에 베로니카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철학서적을 읽는 전학생 ‘JD’를 만나게 된다. 베로니카는 또래답지 않게 매력적이고 고독하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한 JD에 끌리고, 둘은 첫 섹스를 하기에 이른다. 사실 JD는 가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찍 어른스러워져 스스로를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빌딩 폭파 해체 전문가인 JD의 아버지는 미필적 고의로 JD의 엄마가 건물 안에 들어갔을 때 폭탄을 터트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본 JD는 아버지를 너무 싫어하지만, 한편으로는 닮아가고 있다. 
한편 헤더 챈들러에게 용서를 구하고 평탄한 학교 생활을 하겠다고 생각한 베로니카. 헤더의 집에 찾아간 베로니카는 그녀의 아침 음료수를 만드는데, JD는 이것을 독극물로 바꿔치기한다. 그것을 마신 헤더는 즉사하고, JD는 헤더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한다. 1인자의 죽음은 학교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헤더 맥나마라는 1인자의 상징이었던 빨간 리본을 달고 그 위치를 자신이 대신하려 한다. 게다가 두 헤더들은 커크와 램이 공동묘지에서 베로니카와 동시에 관계를 가졌다는 루머까지 퍼트린다. 
JD는 베로니카에게 커크와 램을 혼내주자며 이들을 공동묘지로 불러낸다. 베로니카는 JD가 그들에게 겁만 조금 줄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JD는 진짜 총알을 장전해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둘의 죽음을 ‘게이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위장한다. 순식간에 세 명을 죽이고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베로니카. 그러나 JD는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을 처단하고 선과 사랑만이 남은 위대한 이상 세계에 살자고 이야기한다. 베로니카는 그런 JD에게 이별을 고한다.  
유일한 자신의 편이었고 마음을 주고 맹목적 사랑을 했던 베로니카가 이별을 고하자 이판사판이 된 JD. 그는 베로니카까지 죽이려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며 위기를 모면한다. 베로니카가 자살했다고 생각한 JD는 이 더러운 세상의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자 전교생이 모인 체육관에 폭탄을 가져간다. 이를 알게 된 베로니카는 애증이 뒤섞인 채로 폭탄을 두고 JD와 몸싸움을 벌인다. 그러다 JD의 총을 발사하게 되는 베로니카. 
부상을 입고 죽음의 문턱에 선 JD는 회한을 느끼며 자신이 모든 걸 지고 가겠다고 한다. 폭탄을 안고 자폭하는 그. 자신들이 모두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불완전한 세상을 여전히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선도 되었다가, 악도 되면서. 너무도 인간적으로.



효과적인 클리셰 연출

영화가 나온 지 약 20년이 흐른 지금조차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급진적이다. 만약 이 이야기를 보이는 대로 연출했다면 순식간에 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죽고 폭탄이 터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 삶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흥겹고 어떤 면으로는 위로도 준다. 많은 부분이 대본과 연출 덕이다.
진지해지려는 시점에서 그 분위기를 단번에 날려주는 대사들은 환기의 효과가 크다. 제작진이 ‘이야기는 바로 진행하되, 그것에 깊이 이입되는 시점에서는 반드시 유머를 넣어 분위기를 환기한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만든 듯하다. 헤더 듀크는 친구들을 따라 자살 시도를 예고하는 노래를 하는데, 스산한 분위기는 10초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베로니카가 그녀의 수면제 자살 시도를 저지하는데, 신이 끝날 때까지 삼켰던 약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고급스런 웃음을 연출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다시 밝아진다. 마르타 역시 자살 시도를 하는데, 물에 뛰어들기 전 왕따 소녀의 옛날 옛적 좋은 추억을 노래하기에 동정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그러나 그 노래에도 역시 유머가 숨어있다. ‘다정한 시간들이었어’라는 대사 바로 다음 ‘우우우~ 우우우~ 우우우우우~’라는 후렴구를 부른다. 의도된 ‘오버’다. 초등학생들이나 입을 법한 빛나는 유니콘 옷을 입은 덩치 큰 마르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묘한 웃음을 자아낸다. 남자들끼리 싸우는 학원 폭력 장면은 슬로모션으로 처리되는데(요즘엔 매트릭스 장면을 패러디한 극들이 많아지면서 이도 상당히 일반적인 연출이 되어버렸지만) 그때 사용되는 음악이 R&B풍이고, 여주인공은 싸우는 남자들 사이사이를 다니면서 오버하며 응원을 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한 번 꼬거나 과장해서 웃음을 주는 것이다. 건장한 두 남자의 죽음이 게이의 사랑으로 위장되고, 다음 장면에서 둘이 옷을 다 벗은 채로 등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백업 싱어를 하니 웃지 않을래야 안 웃을 수 없다.  
이 창작자들은 알 수 없이 묘한 줄타기의 지점을 딱 짚어내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또 유치한 클리셰적 연출도 정말 의도적으로 과감하게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오프닝의 ‘인물 소개’ 넘버가 나오는 장면이 그렇다. 때는 학교 점심시간. 누구와 밥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주인공은 독창과 앙상블로 커크와 램, 세 명의 헤더들까지 한 번에 소개한다. 소개의 방식에 별로 고민을 하지 않은 그야말로 베이직한 방식이다. 그런데 헤더들의 등장에서는 갑자기 전교생이 식판을 들어 아치를 만든다. 그 사이로 ‘헤더! 헤더!’라는 노래가 나오고 불이 번쩍거리며 미스코리아가 등장하듯 헤더들이 한 명씩 나타난다. 참 유치하지만, ‘일진’의 위상과 고등학생 퀸카의 이미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는 것 같다. 유치한 연출과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비치는 것이다. 
사실 허접스럽고 간단한 연출을 이렇게 잘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있어 보이는’ 연출을 하는 건 생각을 많이 하면 되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접스러워 보이는 연출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출가와 극작가는 아마도 재미있게 작업했을 것이다. 즐기지 않았거나 상 욕심을 냈다면 이런 용기는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브로드웨이식 오프브로드웨이 작품

음악의 쓰임은 매우 인상적이다. 기능적으로 ‘상황 설명’을 담당하는 넘버들은 팝으로 진행되는데, 팝 스타일 음악이더라도 뮤지컬 음악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화성이 상당히 기능적으로 쓰이면서 전조를 자유롭게 구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작곡을 배운 사람들은 극 음악을 쓸 때 이런 부분을 많이 배워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팝 스타일로 곡을 쓴다 해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고, 극 음악을 쓸 때 유념해야 할 구조적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심각한 소재를 표현할 때 R&B 등의 장르로 바꾸는 의외성도 웃음을 자아낸다. 너무 깊게 빠져드는 순간을 포착해 진지한 분위기로 역전시키는 작가와 작곡가의 협업은 절묘하다. 
이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식의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통은 예산 문제로 극의 규모와 예산을 줄이기 때문에 오프브로드웨이 작업은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극은 그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해체해서 보여주는 좋은 예다. 브로드웨이보다 오프브로드웨이가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보컬 편곡은 거의 대극장 수준에 근접하고 사운드 조절도 상당히 수준급이다. 중소극장 공연치고는 상당히 꽉찬 사운드다. 사운드와 편곡은 브로드웨이 수준인데 극 주제는 훨씬 자유롭다.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메이저와 인디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포용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대본은 교과서적으로 잘 다듬어졌고 전체적으로는 인디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나는 죽은 내 게이 아들이 자랑스럽다! 왜냐하면 나도 게이이기 때문이다’라고 커밍아웃하고 장례식장에서 한바탕 소란스런 춤판을 보여주는 아버지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런 작품은 오프브로드웨이라서 가능하구나 싶고,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유가 아직은 있구나 싶다. 
<헤더스>는 결코 가볍지 않은 극이지만 깔끔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질풍노도의 청소년 JD의 죽음이 슬프긴 해도 아프지 않다. 다만 아련할 뿐이다. 



초인 사상과 중2병

이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현대판으로 꼬아놓은 이야기인 듯도 싶다. ‘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을 처단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초인 사상을 가진 JD, ‘악한 인간과 선한 인간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며 우리는 남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며 그의 죄를 안아주는 베로니카. 어찌 보면 선과 악의 정의에 대해 넌지시 화두를 제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외로움의 끝에서 비뚤어지고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끌린 안타까운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과 향수도 자극한다. 일진이었으면 일진이었던 대로, 피해자였으면 피해자였던 대로, 방관자였으면 또 그런대로, 자신의 옛날을 곱씹어볼 수 있는 극이다. 
이 이야기의 생명력이 오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요소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둡고 전혀 브로드웨이스럽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남는 이야기. 그래서 그럴까? 평론가들의 애매한 별점과는 상관없이, 벌써 연장 공연의 조짐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2호 2014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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