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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더 라스트 십> THE LAST SHIP [No.136]

글|박천휴 (작가/ 번역가) 사진|Joan Marcus 2015-01-29 5,765

싱어송라이터 스팅의 브로드웨이 도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스팅이 뮤지컬 <더 라스트 십>으로 처음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스팅은 애수에 젖은 듯 특유의 감상적이고 유려한 멜로디로 지난 수십 년에 걸쳐 톱 뮤지션의 명성을 이어왔으며 지금까지 총 열여섯 개의 그래미를 수상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재즈, 팝, 록, 클래식컬 뮤직, 월드뮤직까지 넘나들며 음악을 만들어온 그의 경력을 생각해보면, 그가 왜 이제야 첫 뮤지컬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스팅의 브로드웨이 진출 소식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더 라스트 십>

공연이 개막하기 오래전부터 스팅의 이름을 앞세워 대대적인 홍보를 해온 <더 라스트 십>에는 스팅 이외에도 브로드웨이에서 유명한 이들이 대거 참여했다. 연극 <레드>로 한국 관객들에게도 알려진 극작가 존 로건과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이프/덴>의 작가 브라이언 요키가 공동으로 대본을 썼고, <위키드>와 <어쌔신> 등을 연출했으며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는 화려한 경력의 베테랑 배우 겸 감독 조 만텔로가 연출을 맡았다. 


<더 라스트 십>은 영국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 월센드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은 스팅의 실제 고향으로, 그가 이곳에서 보낸 유년기 시절의 경험이 이 작품의 대본에 어느 정도 영감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더 라스트 십>은 모든 남자가 조선소에서 배를 짓는 직업을 대대로 물려받아온 동네에 사는 어린 청년 기디언이 자신 또한 조선소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이어가길 바라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기디언은 여자 친구 멕에게 함께 고향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가자고 말하지만 멕은 그럴 수 없다며 웰센드에 남고, 기디언은 곧 다시 돌아와 그녀를 데려가겠노라 약속한다. 하지만 기디언은 15년이 지나서야 고향에 돌아오게 되고, 그가 마주하는 건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회한, 다른 남자와 함께 아들을 키우며 새로운 인생을 꾸려가는 옛 애인 멕, 그리고 웰센드에 찾아온 극도의 경기 침체로 인해 조선소가 문을 닫게 된다는 소식이다.


자부심을 품고 배를 짓는 일을 하며 살아온 이곳 사람들에게 이제 주어진 유일한 일은 고철 공장밖에는 없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의 이유이자 정체성인 일을 잃고 낙심해 있던 사람들은 그들 중 지도자 격인 재키라는 인물의 선동하에 다시 조선소 문을 열고 마지막으로 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존 로건과 브라이언 요키의 대본은 이 대목에서 마을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목적과 계산으로 배를 만들려 하는지, 그리고 그 후의 계획은 무엇인지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렇듯 이야기의 부족한 논리에 조금 회의적인 기분이 들려는 무렵, 스팅이 만든 노랫말과 멜로디는 꽤 시의적절하게 감정을 사로잡는다. 재키 역할을 맡은 영국 출신 배우 겸 가수 지미 나일은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와 연기로 ‘우린 세상 가장 위대한 선박을 만들어왔고, 아직 우리의 모든 세상은 이 조선소 안에 있다’고 노래하며 사람들을 이끈다. 


한편, 자신들이 대대로 물려온 조선소 일을 내팽개치고 떠났던 기디언의 귀향에 동네 사람들은 처음엔 달갑지 않은 반응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이곳의 신부님이 사람들과 기디언을 화해시킨다. 신부님 캐릭터가 보여주는 격식 없고 유머러스하며 따뜻한 마음씨와 행동은 어쩐지 이러한 이야기에서 으레 볼 수 있을 것 같은, 대체로 클리셰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도, 다행히 배우의 호연에 힘입어 캐릭터가 낭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디언과 사람들의 갈등은 지나치게 쉽게 해소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또한 등장인물들이 꽤 여러 명이기 때문에 그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진행되던 이야기는, 신부님이 암에 걸린 것을 보여주며 이미 바쁜 이야기에 감정 하나를 더 추가하려는 듯 느껴진다. 곧이어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기디언이 조선소 사람들에게 합류한다. 조선소를 차지한 이들에게 경찰의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하지만, 그들은 지금껏 이 조선소를, 그리고 더 나아가 웰센드를 지켜온 사람들 모두가 흘린 땀의 가치와 정신을 숭고하게 기리려는 듯, 자신들의 ‘마지막 배(더 라스트 십)’를 완성할 것임을 함께 노래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자연스레 <빌리 엘리어트>나 <킹키부츠> 등 영국을 배경으로 노동자들(혹은 어떤 한 커뮤니티)의 유대성을 강조하며, ‘주인공 vs. 세상’의 대결 구조를 지닌 다른 작품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더 라스트 십>의 서사는 아쉽게도 완결성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을 준다. <빌리 엘리어트>에는 노동자들이 길게 이어지는 파업 속에서 지쳐가며 고민하는 걸 보여주는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리얼리즘이 있고, <킹키부츠>에는 마치 커다란 세상 속에서 힘을 합쳐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 저마다의 존재를 축복하는 듯한 기분 좋음이 있다. 그러나 <더 라스트 십>은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깊이가 계속 표면에만 머무르는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홀로 늙어가는 아버지를 등지고 집과 조선소를 떠났던 기디언이, 수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너무나도 쉽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며 ‘최후의 배’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것 등이 그렇다. 기디언뿐만 아니라 대부분 캐릭터의 성격과 심리가 예측을 벗어나지 않게 쓰인 탓에, 이야기 속 상황과 갈등 또한 클리셰를 피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조금 미지근한 작품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필요 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해 저마다의 사연을 노래하는 까닭에 정작 중요한 인물들이 진짜 감정을 더 깊게 파고들 기회를 주지 않는 느낌도 든다. 두 명의 작가가 제대로 협업을 하지 못한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가지 쳐내고 깊이에 집중한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드라마의 아쉬움을 상쇄시키는 음악과 안무, 세트

<더 라스트 십>은 이렇듯 대본이 지닌 아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장점도 많은 공연이다. 우선 스팅의 음악은 기대한 만큼이나 빛을 발한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영국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도 동시에 뱃사공의 노래 같은 느낌에, 어딘지 조금 예스러운 정취까지 전해준다. <더 라스트 십>의 노래들은 지난 2013년에 스팅이 발표했던 동명의 컨셉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들과 이번 공연을 위해 그가 새롭게 쓴 곡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몇 곡은 그의 예전 앨범에서 가져왔다. 뮤지컬 작곡가로서 스팅의 첫 작업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데, 우선 작품 전체를 통틀어 모든 곡들이 제대로 된 뮤지컬 넘버라는 것이다. 스팅은 유명 싱어송라이터로서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멜로디 좋은 팝 음악을 생각 없이 억지로 뮤지컬에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곡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또한 그가 직접 쓴 가사들 또한 그걸 부르는 인물들의 상황과 이야기에 잘 맞춰져 있으며 매우 호소력 있게 들린다. 스팅은 음악가로서 지금껏 그의 명성에 걸맞게, 깊이가 느껴지는 멜랑콜리와 슬픔이 잘 어우러진 뮤지컬 넘버들을 들려준다. 조금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가 적어도 음악이 덧입혀지는 부분에서만큼은 여전히 호소력 있게 와 닿는다. 


<더 라스트 십>은 대체로 애수에 젖은 듯한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안무가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뮤지컬 <원스>, <아메리칸 이디엇> 등으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안무가로 떠오른 스티븐 하겟이 안무를 담당했는데, 노동자들이 발을 구르며 분노와 좌절을 표출하는 듯한 거칠고 열정적인 안무를 비롯해 앙상블들이 짜임새 있게 무대 위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며 표현하는 에너지가 인상적이다. 스티븐 하겟의 안무 동작들은 진지한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에 적절하게 들어맞으며 인상적인 모습들을 이끌어낸다. <원스>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조금 더 컨셉추얼하게 짜인 안무 동작들은, 이 제법 긴 이야기가 별로 느슨해짐 없이 이어지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무대 디자인 역시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인 느낌으로 이야기의 주 무대인 조선소와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펍을 오가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특히나 노동자들이 배를 만드는 장면과 마지막 승선 장면에서의 세트 전환과 무대 연출은, 역동적으로 짜인 안무 동작과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짜릿한 기분을 전달한다. 대부분 뮤지컬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단체 안무 동작들이 보통 흥겨운 춤 동작인 것에 비해, 이 진지한 성격의 작품에서는 답답한 현실을 이겨내려는 일꾼들이 일하는 모습조차도 안무 동작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안무가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무대 언어에 부합하는 요소가 되어 관객들에게 다이내믹을 전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공연 예술이 지닌 장점과 가능성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게 된다. 이렇게 공연 내내 짜임새 있고 촘촘하게 이어지는 안무와 무대 연출은 이 신작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많은 경력을 쌓은 노련한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만만치 않은 작품임을 새삼 상기시킨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 또한 이 작품의 큰 장점이다. 주인공 기디언을 연기한 마이클 에스퍼는 뮤지컬 <아메리칸 이디엇>과 여러 편의 영화, TV 드라마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자신이 도망쳤던 과거와 대면하고 고민하는 감정을 드라마틱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여주인공 멕의 현재 애인 역을 맡은 애런 라자(<라이트 인 더 피아자>, <맘마미아> 등에 출연) 역시 조금 상투적일 수 있는 캐릭터를 좋은 연기와 굉장히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살려내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리더 재키를 연기하는 지미 나일은 목소리에서부터 힘 있는 카리스마를 표현하는데, 이 작품에서 스팅의 음악이 지니는 남성적이고 영국적인 느낌을 더없이 적절하게 전달하며 호소력을 더한다.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려는 사람들의 삶을 진지한 분위기로 다룬 <더 라스트 십>은 대다수의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이 흥겨운 노래와 낙천적인 이야기를 무기로 여행객과 가족 단위 관객들을 노리는 것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흥겹고 낙천적인 공연들이 대체로 훨씬 더 쉽게 상업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증명하듯, 지난 10월 말에 시작한 이 공연은 현재까지 약 60퍼센트 정도의 비교적 낮은 객석 점유율을 보여왔다. 하지만 <더 라스트 십>이 가진 정직한 감성과 도전 정신이 지닌 가치는 그냥 묻혀버리기엔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진다. 


스팅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는 공연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지난 12월 말부터 자신이 직접 주요 역할인 재키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며 1월 말까지 공연에 합류한다. 스팅의 팬들에겐 이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의 연기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아마도 두 번 다시 돌아오기 힘든 기회가 아닐까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6호 2015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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