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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WOMEN ON THE VERGE OF A NERVOUS BREAKDOWN [No.138]

글 | 조연경 (런던 통신원) 사진 | Alastair Muir, John Persson 2015-03-25 5,511

절박한 여자들의 스페인식 해결법 



뮤지컬이 된 스페인 영화

부끄럽지만 스페인 영화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런던의 플레이하우스 극장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Women On the Verge Of a Nervous Breakdown)>의 원작이 동명의 스페인 영화라는 얘기를 듣고는 예습도 할 겸 영화를 미리 봤다. 스페인의 유명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1988년 작품인 원작 영화는 절망에 휩싸인 여주인공이 좌충우돌하는 블랙 코미디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동 응답기에 남겨진 연인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확인한 주인공 페파는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좌절하고, 계속 연인 이반과 통화를 시도하지만, 휴대전화는 물론 삐삐조차 없는 시대라 연락이 좀처럼 닿지 않는다. 거기에 정신병원에서 갓 나온 연인의 전 부인, 그의 장성한 아들과 약혼녀, 친구 칸델라와 테러리스트까지 얽히고설킨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다가 마침내 허무한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는 공감하기 쉽지 않았지만 스페인의 정서가 느껴졌다. 마드리드라면, 스페인 사람이라면 사건이 저렇게 전개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뮤지컬 무대에 올린다는 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가끔씩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는 남자 주인공보다 맘보를 틀어놓은 택시 기사 아저씨가 더 자주 등장하는 이 영화는, 페파가 우연히 같은 맘보 택시를 세 번이나 잡아타는 것처럼, 반복되는 우연과 간발의 차이로 서로를 놓치는 안타까운 순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중년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 말미에 남자에게 기대는 삶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중년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1980년대산 스페인 영화, 그런 이미지가 라틴풍의 음악과 어우러져 무대에 오른다면 근사할 것 같다는 기대를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뮤지컬 <화려한 사기꾼(Dirty Rotten Scoundrels)>의 대본, 가사, 음악을 협업하며 영화 원작 뮤지컬을 엮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였던 데이비드 야즈벡과 제프리 레인이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 2010년, 바틀렛 셔 연출이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예정보다 일찍 막을 내렸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영국 ATG 소유의 사보이 극장에서 개막한 뒤 1년 가까이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화려한 사기꾼>의 성공 사례에 힘입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도 같은 과정을 통해 약 4년 만에 웨스트엔드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바틀렛 셔가 다시 한 번 연출을 맡았지만, 그들의 목표는 브로드웨이 공연과 전혀 다른,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TV 스타 탐신 그레이그가 타이틀롤 페파 역을, 웨스트엔드 <위키드>에서 엘파바 역을 맡아서 열연한 네덜란드 출신의 빌레메인 페르카이크가 폴리나 역을 맡아 기대를 모았다. 그 밖에 포르투갈 출신의 리카르도 알폰소가 택시 기사 역을, 프랑스 배우 제롬 프라동이 이반, 호주 배우 안나 스켈런이 칸델라 역을 맡는 등 세계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참여한 이번 프로덕션은 화려한 면면으로 일단 런던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스페인을 버무린 영국식 작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페인 냄새가 났던 영화와 달리, 뮤지컬 무대에서는 스페인의 자취가 느껴질 듯 말 듯 했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보이는 칠판에는 ‘1987년, 마드리드’라고 시대와 공간적 배경을 명시해 주었고, 공중전화 부스에도 스페인어가 적혀 있고, 라틴 음악이 전체적으로 작품을 감싸고 있었지만, 이 작품은 현재 런던에서 일어나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하얗고 심플한 무대를 배경으로 풀어냈다. 배우들도 브로드웨이 공연 때처럼 스페인어 억양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영국 발음을 사용해서 자칫 느껴질지도 모를 위화감을 지웠다. 어차피 영어로 공연하는데 굳이 스페인어 억양을 사용할 이유가 없고, 기왕이면 영국 관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이 좋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품인 공중전화, 카세트테이프를 쓰는 자동 응답기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토마토를 주재료로 하는 차가운 스페인식 채소 수프인 가스파초가 작품의 공간적 배경을 은근하게 드러냈다.


무대 오른쪽에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있는 하얀 세트는 페파의 펜트하우스를 표현했다. 왼쪽 위에는 밴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이 하얀 무대를 더 빛나게 만들어주었고, 소품과 의상은 원색이라 더 눈에 띄었다. 배우들의 손에 들려 책상이며 소파 등 다양한 소품들이 오갈 때마다 강렬한 이미지들이 무대 위를 수놓으며 유쾌하게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소품 이동을 담당하는 배우들이 따로 있었는데, 그들은 의자 하나도 그냥 갖다 놓는 게 아니라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고 리듬을 타며 무대를 장악했다. 페파가 마드리드 시내를 휘젓고 다니면서 장면마다 배경이 바뀌는 통에, 이야기에 상관없이 무대 배경과 배우의 의상이 너무 자주 바뀐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의상과 장면 전환이 많아서 느껴지는 번잡함 역시 일부러 의도된 이 작품의 일부로 느껴졌다.

마드리드의 절박한 사연들

이 작품은 해설자 역할을 맡은 택시 기사의 마드리드 소개로 시작된다. 경쾌한 라틴 비트에 맞춰 소개되는 마드리드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마법의 장소다. 모든 배우들이 나와 라틴 리듬에 흥겹게 몸을 맡겼지만, 이내 그곳은 각자의 사정으로 절박한 여성들이 모인 도시로 변해 황당한 사건들을 목도하게 된다. 


영화 더빙을 주로 하는 42세의 여배우 페파는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깨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연인 이반은 온데간데없고, 자동 응답기에는 이별 통고가 남겨져 있다. 난데없는 통보에 정신이 혼란스러운 페파는 프로듀서의 재촉을 못 이겨 녹음실로 향한다. 그곳에서 이반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분량을 녹음한 후 사라졌다. 이반이 남겨 놓은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분량을 녹음하는 페파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점점 혼미해지다가 결국 정신을 놓아버린다. 


이반을 찾던 페파는 우연히 루시아를 만나고, 그녀를 쫓아간다. 이반을 기다리며 그 집 앞을 서성이던 페파는 루시아가 이반의 전 부인이며, 다 큰 아들 카를로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뜻밖의 사실에 얼떨떨해진 페파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간다. 막 정신병원에서 나온 루시아는 이반에게 위자료를 청구하기 위해 변호사 폴리나와 함께 재판을 준비하는 중이다. 그녀는 이반이 자신을 버린 탓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삶을 되찾고,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를로스의 약혼녀 마리사는 우유부단한 카를로스를 다그쳐 신혼집을 알아보고 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페파는 혹시라도 이반이 음성을 남겨놓았을까 봐 테이프 가득 부재중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는 자동 응답기를 재생하지만, 거기 남겨져 있는 건 모델인 친구 칸델라의 절박한 메시지뿐이다. 칸델라는 자신의 남자 친구가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아침부터, 낮에 일을 하면서도, 밤을 꼬박 새운 새벽까지 페파에게 연락을 해달라며 수십 개의 메시지를 연달아 남겨 놓았다. 칸델라의 메시지들 끝에 마지막으로 녹음된 이반의 메시지는 결국 테이프가 부족해 중간에 끊겨버린다. 분노를 못 이긴 페파는 전화기를 창밖으로 던지고 만다.


이별 후유증으로 멍한 페파는 담배를 피우려다가 침대에 불을 내고, 토마토로 가스파초를 만들다가 진정제를 잔뜩 집어넣는다. 그런 페파의 집에 칸델라가 찾아온다. 페파가 칸델라를 진정시키고, 전화기를 주우러 나간 사이, 카를로스와 마리사가 페파의 집을 보러 온다. 집에 돌아온 페파는 이반의 아들인 카를로스를 보고 반가워하며 이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카를로스는 이반이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알려주고, 페파는 이반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다. 한편 절망에 사로잡힌 칸델라는 자살을 하려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카를로스와 페파에 의해 구조된다. 카를로스와 칸델라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이 모든 상황이 지루한 마리사는 가스파초를 마시고 깊은 잠에 빠진다. 칸델라의 사정을 들은 카를로스는 어머니의 변호사인 폴리나가 페미니스트니까 그녀를 도와줄 거라며 상담을 해보라고 추천하고, 페파는 칸델라를 대신해 변호사를 찾아가기 위해 혼자 집을 나선다. 칸델라는 자신이 테러리스트를 숨겨준 공범이라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카를로스는 그런 칸델라를 설득해 익명으로 테러 계획을 경찰에 알린다.



불안을 이겨내는 법

페파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상황은 점점 꼬여가고, 그러는 와중에 역설적으로 이반은 점점 잊혀간다. 칸델라의 일을 부탁하기 위해 찾은 폴리나의 사무실에서 페파는 영문 모를 홀대를 당한다. 사실 폴리나가 이반의 새 연인이었던 것. 폴리나는 페파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찾아왔을까 봐 불안해서 오히려 어색하게 페파를 몰아세운다. 


다시 집에 돌아온 페파는 루시아의 전화를 받는다. 결국 재판에서 진 루시아가 불안을 못 이겨 페파에게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다. 페파는 이반이 새 여자와 여행을 떠난다고 말해 주지만, 루시아는 곧이듣지 않고 페파의 집을 찾아온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걸었던 전화를 추적한 형사들이 페파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형사들과 루시아가 가세하자 페파의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고 여긴 페파는 진정제를 가득 넣은 가스파초를 자연스럽게 형사들에게 권해 재운다. 카를로스와 칸델라는 사건에 얽히기 싫은 마음에 자발적으로 가스파초를 마신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반을 죽여서 울분을 풀겠다며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달아나고, 페파는 우연히 다시 잡은 맘보 택시를 타고 이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루시아를 쫓는다. 폴리나의 사무실에서 몸을 날려 이반을 구한 페파는 며칠 동안 그렇게 찾아 헤매던 이반을 드디어 만났지만, 아무 말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집에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약에 취해 자고 있는 것을 본 페파는 허탈하게 웃고 만다. 마침 가장 먼저 잠들었던 마리사가 깨어나는데, 카를로스가 칸델라와 가까워져 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홀가분해한다. 


약 이틀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은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황당한 연쇄 사건들이었고, 그것들을 겪으며 페파를 비롯한 여성들은 각자 불안에 시달렸다. 결국 이 작품은 이들이 불안을 떨치고 홀로서기까지의 과정을 요란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루아침에 남자를 잃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을 맛봤지만,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가 떠난 후에도 해는 뜬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자 하나 때문에, 이틀 내내 연락이 닿지 않아서 무너질 뻔한 페파의 이야기는 21세기 뮤지컬 무대에 고스란히 옮겨 놓기에 고루하게 느껴지는 면이 없지 않다. 테러리스트를 우연치 않게 숨겨주게 된 칸델라의 사연이나, 20여 년 전에 자신을 버린 남편에게 보상받으려는 루시아의 사연, 우유부단한 약혼자에 대한 불만을 완벽한 결혼 준비를 통해 대체하려다 실패한 마리사의 사연도 지극히 1980년대답다. 현재에 맞춰 억지로 설정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옛날 영화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인지 관객들의 연령층이 높은 편이었다. 1980년대에 비슷한 사랑을 했을 관객들은 불안을 못 이겨 좌충우돌하는 배우들에게 공감했고, 황당한 사건들에 함께 웃었다. 자칫 불협화음을 낼 수 있었을 21세기와 1980년대식 사랑법의 부조화는 오히려 관객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되었다.

불안한 우리를 위로하는 소박한 코미디

방송과 연극 무대를 오가며 커리어를 쌓은 탐신 그레이그는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쟁쟁한 배우들이 모인 만큼 누구 하나 뺄 것 없이 완벽하게 극에 들어맞는 연기로 작품의 수준을 한층 올려주었는데 특히 칸델라 역을 맡은 배우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칸델라는 불안함에 징징거리면서도 백치미를 보여주며 유쾌하게 상황을 살렸다. 그 귀여운 모습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한층 밝게 해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현대인의 고질적인 만성 불안을 날려줄 순 없지만, 30년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며 함께 웃어넘기도록 도와줄 순 있다. 거기에 택시 기사가 직접 기타를 치며 불러주는 라틴풍의 오프닝 곡이나, 관객들도 절로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라틴 리듬은 덤이었다. 무대 위 연주자들까지 흥겹게 리듬을 타며 들려주는 라틴 음악은 듣는 이들을 부드럽게 무장 해제시켰다. 스페인 사람 특유의 여유를 전파해 주는 라틴 리듬이 관객들을 어루만졌다. 빵 터지는 큰 웃음이 아니더라도 입꼬리를 실룩이며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화려한 음악과 춤이 팡팡 터지는 대형 뮤지컬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이 대체로 그렇다. <라이온 킹>이나 <위키드> 같은 작품도 있지만, 영국 북부의 탄광촌(<빌리 엘리어트>), 60년대에 소박하게 시작한 밴드(<서니 애프터눈>), 유들유들한 사기꾼들의 작은 소동극(<화려한 사기꾼>), 조그만 여자아이의 복수(<마틸다>), 생리 현상을 둘러싼 고군분투(<유린타운>), 뮤지컬을 향한 소심한 비난의 화살(<포비든 브로드웨이>)처럼 작고 소박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도 그런 웨스트엔드의 한구석에서 80년대 스페인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은 뮤지컬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8호 2015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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