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넬리>의 명장면은 단연 파리넬리가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를 부르던 그 순간이 아닐까?
그렇게 카스트라토는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 하나로도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스트라토의 이야기. 이번엔 영화가 아닌 뮤지컬 무대에서 <파리넬리>의 매력을 만날 수 있게 돼 반갑다.
파리넬리와의 만남에 앞서, 알아두어야 할 카스트라토의 세계 속으로.
희생으로 빚어낸 아름다움
카스트라토의 기원은 성경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서 비롯되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16세기 중세 교회가 잘못 해석하여 여성의 발언권을 빼앗은 것. 그리하여 여성은 교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게 됐다. 1668년 교황 클레멘스 9세가 여성은 가수가 될 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발표하면서, 교회 성가대는 모두 남성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남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음역에 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안한 방법은 변성기가 지나기 전의 소년을 거세해 아름다운 목소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 이렇듯 거세를 통해 여성의 음역을 구사하게 된 성악가, 그들이 바로 카스트라토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좋은 악기가 인간의 목소리라 여겼다. 하지만 신성한 미사는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불가피하게 소년들의 희생이 따랐다. 라틴어 ‘거세하다(castrare)’란 말에서 비롯된 카스트라토(castrato). 당시 고환을 제거하는 수술은 생명을 앗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카스트라토로 만들려는 부모들도 많았다. 카사노바의 전기에는 “카스트라토들의 인기가 대단하고 엄청난 부를 얻었기에 1720~1730년대 사이 가난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출하려는 부모들이 4천 명이 넘는 아이들을 거세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거세 수술을 받으면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의 변성이 없다. 또한 후두는 작아지고, 성대는 길어지며, 울대뼈가 나오지 않아 폐부의 면적이 커진다. 그래서 호흡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고, 맑은 음색과 힘 있는 목소리로 높은 음역을 넘나들게 된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아 수술의 실패로 평생 불구로 살게 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생식 기능을 잃게 되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거세를 한다고 해도 카스트라토로 성공할 확률은 희박했기 때문에 비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년들도 많았다.
꿈같은 번영 그리고 쇠퇴
카스트라토의 본격적인 황금기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당시엔 인기 카스트라토의 초상화를 배지로 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일 만큼 카스트라토의 인기가 대단했다. 당대를 풍미한 스타 카스트라토는 파리넬리, 카파렐리, 세네지오 등이 있는데, 이들은 토리노 최고 통치자의 연봉과 맞먹는 출연료를 받으며, 천문학적인 몸값을 자랑했다. 이러한 카스트라토의 인기와 맞물리며, 이 시기 바로크 오페라 또한 예술적인 절정기를 맞이했다. 오페라 관객들은 카스트라토의 현란한 기교와 치명적인 고음에 열광했고, 그에 따라 무대 위 카스트라토의 역할은 점점 커져갔다. 남녀 주인공뿐 아니라 왕이나 장군 같은 남성다운 역할도 모두 카스트라토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 것. 그래서 여성 소프라노들이 남장을 하고 카스트라토인 척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카스트라토의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카스트라토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근대 오페라의 시대가 열리며, 관객들은 기교보다는 자연스러운 창법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824년 베네치아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한 마이어베어의 <이집트의 십자군>이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가 되었다. 더불어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오페라극장에 카스트라토의 출연을 금지시키고, 그 양성도 막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19세기에는 크레첸티니, 볼루티 등이 카스트라토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급기야 로마 교황청이 이를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라고 규탄하기에 이른다. 1903년 마침내 교황이 공식적으로 카스트라토 금지령을 내리며, 아팠던 만큼 화려했던 카스트라토의 역사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됐다.
카를로 브로스키 (1698~1756)
18세기를 주름잡은 전설적인 카스트라토. 그의 예명인 파리넬리는 후원자인 파리나 형제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2011년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영화 <파리넬리>로 더 널리 알려진 그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나 작곡가인 아버지 살바토레 브로스키에 의해 카스트라토가 되었다. 파리넬리는 당시 유명한 작곡가였던 니콜라 포르포라의 제자였는데, 18세기 유럽 오페라계엔 그들과 쌍벽을 이루는 라이벌이 있었다. 바로 카스트라토 카레스티니와 작곡가 헨델. 포르포라와 헨델은 각각 경쟁적으로 파리넬리와 카레스티니를 위한 아리아를 선보이며 대결 구도를 이루었다. 유럽 각국에서 활발히 공연하던 파리넬리는 스페인 궁정 음악가로도 활동하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파리넬리는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에게 10년 동안 매일 밤 네 곡의 노래를 들려줘 왕의 우울증을 낫게 해준 전력도 있다.
알레산드로 모레스키 (1858~1922)
역사상 기록된 마지막 카스트라토로, 목소리가 녹음된 유일한 카스트라토이기도 하다. 1903년 로마 교황청은 공식적으로 소년들의 거세를 금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스틴 채플 성가대에 카스트라토를 고용했다. 덕분에 모레스키는 시스틴 채플 성가대의 지휘자이자 소프라노 솔리스트로 활약할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음반으로 남게 된 것은 그라모폰의 엔지니어 프레드 가이스버그의 공이 컸다. 그는 교황 레오 8세를 설득해 1902년과 1904년 두 번에 걸쳐 시스틴 채플을 녹음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OPAL 레이블에서 발매된 「The Last Castrato」를 통해 진짜 카스트라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9호 2015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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