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을 살리는 십시일반의 힘
크라우드 펀딩이란 대중으로부터(crowd) 자금을 모은다는(funding) 의미로, 웹이나 모바일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프로젝트를 홍보하고 필요한 자금을 불특정 다수에게서 후원받는 것을 말한다. 주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소셜 펀딩’이라고도 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대중들의 상호 직접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정부나 기업(대형 투자 업체)이 아니라 잠재적인 소비자에게서 직접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크라우드 펀딩은 투자가 부진하고 소비자와 제작자 간의 연대감이 강한 문화 예술 영역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영화, 만화, 음반, 공연, 출판, 전시, 게임, 문구, IT 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금이 없어 사장될 뻔했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크라우드 펀딩 덕에 빛을 보고 있다. 현재 국내 문화 산업에서 활용되는 크라우드 펀딩은 대부분 금전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기부 후원형이다. 감사 메일, 작가가 제작한 물건, 초대권 등 소정의 리워드(reward)를 받을 순 있으나 수익금의 일부를 돌려주지는 않는다. 애당초 프로젝트 구조상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신 재미있거나 뜻깊은 아이디어를 지지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예비 소비자라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시될 상품이나 서비스 자체가 보상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대표적인 펀딩 플랫폼이 미국의 킥스타터와 국내의 굿펀딩, 텀블벅 등이다. 후원자는 플랫폼 사이트에 올라오는 다양한 프로젝트 가운데 원하는 프로젝트를 골라 손쉽게 펀딩을 진행할 수 있다.
크라우드 펀딩의 성공 사례는 영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5·18 민중 항쟁을 다룬 <26년>, 제주 4·3사건을 다룬 <지슬>, 대기업 반도체 공장 직원의 산재 인정 법적 투쟁을 다룬 <또 하나의 약속>, 대형 마트 계약직의 부당 해고를 다룬 <카트> 등 투자를 받기 어려웠던 작품들이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의 십시일반 후원을 통해 제작비 조달에 성공했다. 이에 대한 리워드로 영화사는 엔딩 크레딧에 후원자의 이름을 싣거나 시사회 초대권, 사인 포스터 등을 제공했다. 영화 주간지 <씨네21>은 자체적인 펀딩 플랫폼 ‘펀딩21’을 개설해 영화계 크라우드 펀딩을 지원하고 있다. 기부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의 성격상, 상업적인 영화보다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지만 제작이 쉽지 않은 공익적 성격의 영화들이 주요 후원 대상이 된다. 이런 크라우드 펀딩은 개봉 전 영화의 제작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잠재 관객을 확보하는 마케팅 효과도 거두고 있다.
‘예술나무’와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의 성과
공연계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가 2011년부터 자체적인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예술나무’ 홈페이지(www.artistree.or.kr)에서 회원 가입을 하고 프로젝트를 신청하면, 예술위의 내부 심의를 거쳐 등록 여부가 결정된다. ‘예술나무’는 플랫폼 이용 수수료가 따로 없고, 결제 수수료와 기부금 영수증 발행도 예술위가 책임지기 때문에, 공연제작사로서는 다른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보다 유리하다. 다만 ‘예술나무’의 크라우딩 펀딩은 ‘All or Nothing’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목표 금액을 달성할 경우에만 후원금을 전달받을 수 있다. 목표 금액 달성에 실패할 경우, 후원금 결제는 자동으로 취소된다. 첫해 이원국 발레단의 <돈키호테>가 의상 제작비 500만 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한 이래 다양한 공연·전시 관련 펀딩이 진행돼 왔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사례는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이하 노네임)’가 진행한 두 번의 무대 제작비 모금이다. 비영리 극단을 지향하는 노네임은 2013년 연극 <필로우 맨>을 재연하면서 무대 보수에 필요한 비용 500만 원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금했다. 최자연 제작감독은 “부족한 예산 때문에 고민하던 중 영화계 사례를 보고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하게 됐다.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연’을 지향하는 노네임의 정체성과도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며 그 계기를 설명했다. 약 한 달간 진행된 펀딩에는 총 86명이 참여, 목표 금액을 초과하는 546만 원이 모금됐다. 여기에 고무된 노네임은 올 4월 <변신 이야기>의 무대 제작비 역시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금했다. 지난 펀딩 때보다 높은 800만 원을 목표 금액으로 책정했지만, 3월 16일부터 4월 20일까지 총 139명이 참여하면서 이번에도 목표 금액을 뛰어넘는 861만 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필로우 맨>의 성공이 초연 때부터 작품을 지지해 온 팬층이 있었기 때문이라면, <변신 이야기>의 성공은 물과 수조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무대가 관심을 모았기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 물은 중요한 변신의 매개체로 작용하며, 배우들은 물속을 들락거리며 연기를 펼친다. 노네임 측에서도 SNS를 통해 이러한 수조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펀딩을 홍보했다. 최자연 제작감독은 성공적인 크라우드 펀딩을 위해서는 리워드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리워드를 생각하고 후원하시는 분들이 많다. <필로우 맨> 때는 펀딩에 참여해서 초대권을 받는 것이 티켓을 사는 것보다 더 이익일 수 있었다. <변신 이야기> 때는 그런 일이 없도록 리워드를 책정하여 후원의 의미를 살렸다.” 노네임은 프로그램 북에 후원인 성명을 기재하고, 후원금에 따라 프로그램 북, 오픈리허설 초대, 공연 초대권, 대본집을 리워드로 제공했다. 특히 오픈 리허설은 후원자로서 공연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다. 관심 있는 공연을 직접 후원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그 공연을 접하고, 또 리허설 현장을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경험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크라우드 펀딩만의 매력이다.
뮤지컬 크라우드 펀딩의 한계
뮤지컬에서는 아직까지 성공적인 크라우드 펀딩 사례가 등장하지 않았다. 공익적인 성격의 공연에서 크라우드 펀딩이 조금씩 활용되고 있는 수준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꽃신>도 그중 하나다. 배우와 제작진이 모두 재능 기부로 참여한 이 작품은 2014년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오픈 트레이드’에서 지방 공연 및 해외 공연을 위한 준비금을 모금했다. ‘오픈 트레이드’는 목표 금액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기간 내에 모인 후원금을 전부 전달받을 수 있는 ‘Keep it All’ 방식의 펀딩 플랫폼이다. 그러나 <꽃신>의 크라우드 펀딩은 한 달 간 16명에게 98만 원을 모금하는 데 그쳐 이렇다 할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창작뮤지컬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송하는 팟캐스트 ‘스튜디오 뮤지컬’은 2015년 1월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프라인 공연 <당신만이>의 제작비 일부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금했다. ‘텀블벅’을 통해 총 31명이 후원한 결과 111만 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 일회성 공연이었다는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 『바보 빅터』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빅터>는 공연 제작비가 아닌 객석 나눔을 목적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제작사 휴아시스는 ‘소중한 나 자신을 믿으라’는 공연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2014년 공연 시 탈북자 및 소외 계층을 객석에 초대했다. 2015년 재공연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확대하여 ‘YOUR Day’라는 객석 나눔의 날을 마련했다. 3~4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인 후원금에 따라 5월에 예정된 YOUR Day의 초청 인원수가 결정된다. 후원금 4만 원당 한 좌석이 기부되며, 만석일 경우 YOUR Day가 더 늘어난다. 리워드로 제공되는 초대권은 후원자 본인이 수령할 수도 있고, 다시 기부 좌석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이 프로젝트는 ’펀딩 21’을 통해 ‘Keep it All’ 방식으로 진행됐다.
공연계에 크라우드 펀딩 성공 사례가 드문 것은 우선 그 자체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공연계 크라우드 펀딩을 지원하는 ‘예술나무’ 사이트의 경우 자체적인 홍보가 미비해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때문에 ‘예술나무’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더라도 마케팅과 홍보는 공연기획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기획사의 SNS가 주된 홍보 매체로 이용되다 보니 관객 풀이 작은 공연계에서 입소문이 퍼져 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 그 결과 크라우드 펀딩의 본래 취지와는 달리 대부분의 기부금이 지인이나 관계자를 통해 모이는 현실이다. 이메일 주소나 SNS 계정만으로 가입이 되는 다른 플랫폼 사이트에 비해 ‘예술나무’는 복잡한 가입 절차를 거쳐야만 후원이 가능하다는 점도 방문자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공연계의 크라우드 펀딩은 아직 걸음마 단계일 뿐이다. 하지만 크라우드 펀딩이 활성화된다면 제작사는 대형 투자사나 공공 지원에 기대지 않고 다양한 공연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며, 일방적인 소비자였던 관객의 작품 선택권 역시 강화될 것이다.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와 매력적인 펀딩 프로젝트들의 등장이 앞으로 공연계에서도 새로운 제작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0호 2015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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