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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S] 응답하라! 쎄시봉의 추억 [No.140]

글 | 나윤정 2015-06-08 6,698

<한밤의 세레나데>의 주인공 지선은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하던 중 감전 사고로 1973년 음악다방 쎄시봉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LP판 가득한 음악다방에서 ‘나랑너랑’이란 듀엣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선의 엄마와 아빠, 

그들은 그때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전하며 복고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한다. 
실제로 한국 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 감상실 쎄시봉.  과연 그곳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청춘들의 음악 아지트                       

바야흐로 1953년, 서울 무교동에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 감상실이 문을 열었다. 그 이름 ‘쎄시봉(C’est si bon)’, 불어로 ‘매우 멋지다’는 뜻을 품은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전축이 흔치 않던 시절이다 보니, 무엇보다 입장료만 내면 최신 팝음악을 종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당대 청춘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게 쎄시봉은 음악을 사랑하는 청춘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쎄시봉의 전성기는 1960년대. 이 시기 ‘뉴월드’, ‘아카데미’, ‘카네기’, ‘르네상스’, ‘메트로’ 등 다양한 음악 감상실이 문을 열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렇듯 음악 감상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저마다 인기 DJ의 섭외와 신곡의 확보가 화두가 됐다. 특히 음악 감상실 DJ의 인기는 스타 배우를 방불케 했는데, 당시 활발히 활약한 DJ들은 대부분 방송계나 문화계로 진출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쎄시봉의 대표 DJ는 조용호(TBC PD), 박광희(KBS PD)를 비롯해 작가 피천득의 아들 피세영과 현 명동예술극장장 구자흥 등이 있었다. 
쎄시봉이 수많은 음악 감상실 중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이유는 비단 음악 감상실의 틀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업체와의 경쟁 속에서 이곳이 선택한 차별화 전략은 바로 라이브 무대. 젊은이들과 호흡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숨은 고수들을 찾아낸 것이다. 월요일엔 신보를 낸 가수를 매주 무대에 세워 현장에서 점수를 매기는 ‘성점감상실’, 화요일엔 이상벽의 진행으로 재치 넘치는 삼행시를 꼽는 ‘삼행시 백일장’, 수요일은 박목월, 서정주, 박재삼 등의 시인이 나와 자작시를 낭독하고 강론을 펼치는 ‘시인 만세’ 등 매일매일 재기발랄한 프로그램들이 쎄시봉의 명성을 키워갔다. 놀 줄 아는 청춘들은 매주 알찬 프로그램으로 채워지는 이곳을 당연히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숨은 스타의 탄생 

쎄시봉의 인기 코너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대학생의 밤.’ 이곳의 단골이었던 서울대 국문과생 김종철(현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당시 DJ였던 서울대 미학과 출신의 구자흥(현 명동예술극장장)과 이백천(현 한국경음악평론가)에게 제안을 해 탄생한 기획이었다. 김종철은 직접 섭외를 맡아 손님이 제일 적은 시간대인 매주 금요일 저녁 6시에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 코너명에서 알 수 있듯 취지는 대학생들의 신선한 무대를 펼쳐보자는 것. 첫 회의 주인공은 홍익대 밴드 ‘캄보밴드’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이 코너는 이내 쎄시봉의 명물이 되었다. 
이 코너의 사회자였던 홍익대 미대생 이상벽(현 방송인)이 홍대의 명물이었던 송창식을 무대에 세운 일화도 유명하다. 서울예고 성악과에 수석 입학했지만 학교를 중퇴했던 송창식은 당시 홍대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홍대 캠퍼스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성악 전공이었던 만큼 그가 쎄시봉 무대에 올라 처음 부른 노래는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는데, 통기타를 치며 편안한 발성으로 오페라를 부르는 모습이 현장의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조영남,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쎄시봉은 한국 포크 음악의 열풍을 일으켰기에 더 특별한 공간이다. 이러한 쎄시봉의 간판급 스타 중 영화 <쎄시봉>의 모티프가 된 전설의 듀오 트윈 폴리오를 빼놓을 수 없다. 윤형주와 송창식이 결성한 이 그룹은 1968년 2월에 데뷔해 ‘하얀 손수건’, ‘웨딩케이크’ 등의 명곡을 히트시키며 스타 반열에 올랐는데, 이들의 성공이 남다른 의미를 지녔던 이유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젊은이들의 음악 문화가 새롭게 탄생했음을 상징함과 동시에 포크 음악 열풍의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 쎄시봉의 또 하나의 슈퍼스타였던 조영남 또한 번안곡 ‘딜라일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해 독특한 창법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만큼 쎄시봉의 위력은 남달랐던 것이다. 
매년 20만 명의 청춘들과 함께했던 쎄시봉의 추억. 비록 1969년 5월 무교동 재개발로 인해 쎄시봉은 문을 닫았지만, 그 이름은 음악과 함께였기에 영원불멸의 존재로 남게 되었다.  


그때 그 시절, 음악 감상실


 쎄시봉의 라이벌 ‘오비스캐빈’     €
무교동에 쎄시봉이 있다면, 명동엔 오비스캐빈이 있었다. 오비스캐빈의 원형은 팝송 마니아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심지다방.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통기타 붐이 일자 1969년 오비스캐빈으로 이름을 바꿨고, 세련되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뽐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불어닥친 생맥주의 인기 또한 오비스캐빈의 성공에 한몫했다. 쎄시봉과 양대 산맥을 이뤘던 이 음악 감상실의 대표 스타는 양희은, 신중현, 펄시스터즈, 김추자, 키보이스 등이었다. 


 통기타의 전성기 ‘쉘부르’      
명동의 통기타 시대는 1973년 ‘쉘부르’의 등장으로 전성기에 이르렀다. MBC 라디오 PD 겸 DJ였던 이종환과 쉐그린이 주축이 돼 만든 한국 최초의 언플러그드 음악 감상실 쉘부르. 처음에는 종로 2가에 자리했지만 이듬해 지하철 공사 때문에 명동으로 가게를 옮겼다. 음악 감상실의 후발 주자였음에도, 이곳을 거쳐 간 스타들의 수는 독보적이다. 특히 통기타 2세대들을 대거 양산한 것이 특징. 최성수, 이문세, 남궁옥분, 신형원, 이수만, 어니언스, 변진섭 등이 이곳을 거쳐 갔고, 코미디언 주병진, MC 허참 등도 무대를 빛냈다.   


 한국 히피 문화의 발상지 ‘르 시랑스’      
쎄시봉의 전성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은 이백천. 서울대 영문과 출신이었던 이백천은 TBS PD로 활약하던 중 음반을 구하기 위해 쎄시봉에 들렀다가 DJ 박스를 맡게 된 인물. 쎄시봉의 주요 프로그램들을 기획한 그는 ‘통기타 군단의 음악 선생님’이란 애칭으로도 유명하다. 충무로 태극당 삼익피아노 지하실에 기틀을 세운 ‘르 시랑스’는 이백천이 직접 경영했던 음악 감상실. 단숨에 젊은이들의 문화 공간으로 인기를 모으며 한국 히피 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김민기, 김도향, 양병집 등이 이곳에서 라이브 무대를 펼치며, 세시봉의 명맥을 이어갔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0호 2015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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