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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파리의 미국인> AN AMERICAN IN PARIS [No.143]

글 | 여지현 뉴욕통신원 사진 | Angela Sterling 2015-08-27 4,718

로맨틱함의 정수를 보여주는 발레 뮤지컬

유난히 고전이 많이 올라간 2014-2015년 시즌 브로드웨이에서 단연코 가장 돋보였던 작품은 2014년 파리 샤뜨레 극장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하고 지난 3월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파리의 미국인(An American In Paris)>이다.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관객을 끌었고,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뮤지컬상은 놓쳤지만 안무, 조명, 무대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2시간 30분 동안 뮤지컬과 발레를 오가며 관객들의 낭만과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이 작품은 최우수 뮤지컬상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 내내 매주 브로드웨이 박스 오피스 최상위권에 머무르며 앞으로 적어도 몇 년간은 계속 공연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1945년 파리는 핑크빛이었을까

1951년에 제작된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조지 거슈윈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파리의 미국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화가를 꿈꾸며 예술의 도시 파리에 정착한 미군인 제리 물리건(로버트 페어차일드)이 파리의 댄서 리즈 드쌍(리앤 코페)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내용이다. 파리라는 이국적인 공간과, 조지 거슈윈의 로맨틱한 재즈 리듬, 그리고 달콤한 사랑 이야기라는 요소를 고려할 때, 두 시간 반의 달달함이 조금 과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다. 원작 영화가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지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뮤지컬 <파리의 미국인>의 특징은 작가진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파리의 어두운 현실 역시 무대에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극장에 들어서면, 막이 올라가 있는 무대 중앙에 그랜드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마치 축음기에서 나오는 듯 아련하게 ‘Embraceable You’의 선율이 울려 퍼지면서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작곡가 아담 호치버그(브랜든 우라노위츠)가 피아노에 기대어 서서 독백으로 1945년의 파리를 기억한다. 움직임을 통해 그가 다리가 조금 불편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의 불편한 몸은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선호하는 그의 작곡가적 취향과 함께 공연 내내 전쟁의 어두움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뮤지컬은 오케스트라의 드라마틱한 서곡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독백으로 시작돼 내용이 마냥 로맨틱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뮤지컬 <크레이지 포 유>를 쓴 켄 루드빅이 작가로 참여한 2008년 휴스턴 버전은 1951년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극화했다고 하니 이번 버전과 전혀 다른 이야기였을 것이다. 크레이그 루카스가 작가로 새로 합류하면서, 영화의 배경이 1950년 즈음이었던 것과는 달리 1945년 전쟁 직후의 시간대로 설정해 로맨틱한 이야기에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가미했다. 또 다른 큰 변화는, 당시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작곡가인 아담 하치버그가 기억 속의 이야기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들려준다는 점이다. 



파리의 미국인 아담 하치버그

전후 파리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즐겁지만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담의 독백이 끝나면, 피아노 협주곡 F장조(Concerto in F)가 울려 퍼지며 프로시니엄 뒤쪽으로 커다란 나치 깃발이 내려온다. 깃발이 무대 바닥에 닫자마자 사람들이 그것을 내리면서 뒤집으면 무대 가득 프랑스 국기가 펼쳐지면서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무대 상수 쪽으로 사라진다. 전쟁이 끝나서 기쁘지만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파리의 거리와 배급을 받으려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 사이로 군복을 입은 제리가 등장한다. 제리가 잠시 무대에서 사라지면, 거리의 시민들 사이로 리즈가 등장하는데, 불한당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리즈를 제리가 구해 주고, 리즈는 감사의 인사도 없이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발레로 보여주는 이 첫 장면은 주연 배우들과 앙상블의 무용도 압권이지만, 그들과 함께 춤을 추는 듯 연출된 밥 크로울리의 무대 세트와 나타샤 캇츠의 조명 역시 뛰어나다.
거의 10분 가까이 지속되는 이 첫 장면에서 아담의 카페에 제리가 들어와서 서로 알게 되는 두 번째 신으로 전환된다. 아담과 제리가 서로 알아가는 중에 아담에게서 노래를 배우며 부모님 몰래 카바레 배우의 꿈을 키우고 있는 헨리 바우렐이 레슨을 받으러 카페에 들어오고, 그들의 대화를 통해 헨리가 곧 청혼할 연인이 있다는 걸 관객들은 알게 된다. 헨리의 레슨곡인 ‘I Got Rhythm’을 다 같이 부르면서 셋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눈치 빠른 관객들이라면, 우울하고 비관적인 작곡가인 아담, 낙천적인 화가 지망생 제리, 그리고 소심하지만 뚝심 있는 헨리 이 셋 모두 리즈를 사랑하게 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셋 중에서 아담은 고백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의 사랑을 접게 되는데, 상황상 중립적일 수 없는 아담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제리와 리즈의 사랑 얘기는 작품의 의미층을 풍부하게 한다.
아담이 피아니스트로 참여한 오디션에 따라 간 제리는 자신이 도착했던 날 마주친 리즈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리즈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제리는 리즈가 일하는 향수 가게까지 따라가서 그녀에게 마음을 전한다. 한편, 이 오디션장에서 아담 역시 리즈를 사랑하게 된다. 소심한 헨리는 청혼 아닌 청혼을 리즈에게 하고, 리즈는 청혼인지도 모른 채 엉겁결에 승낙을 한다. 그 와중에 제리가 무대 디자인을 맡은 작품에 스폰서를 자처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부유한 상속녀 마일로 데븐포트가 제리와 아담을 고용하는 조건으로 리즈가 오디션을 따낸 발레 공연을 후원한다. 마일로는 자신의 마음을 제리에게 고백하지만 이미 리즈를 향해 마음을 굳힌 제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리즈는 헨리와 파혼을 하고 제리를 선택한다. 헨리는 사랑은 잃었지만, 그가 원하던 카바레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첫발을 나름 성공적으로 내딛고, 아담 역시 사랑은 잃었지만(고백도 하지 못한다) 작곡가로서 첫걸음을 뗀다. 


음악과 안무에 가득 담긴 로맨스

분명 어두운 파리의 모습을 담고 있긴 하지만, <파리의 미국인>은 로맨틱한 뮤지컬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로맨스의 대부분은 조지 거슈윈의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즈와 제리의 안무에서 나온다. 
이 작품의 프로듀서들은 미국이 아닌 파리에서 트라이아웃을 결정했다. 자칫 무용극 같아 보일 수 있는 컨셉의 작품에 브로드웨이식 뮤지컬에 익숙한 뉴욕 투자자들로부터 천만 불이 넘는 제작비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움을 안고 투자자를 구하고 있던 차에 몇 년 전부터 미국 뮤지컬을 파리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던 샤뜨레 극장의 장 뤽 쇼프랭이 관심을 보였고, 제작비의 1/3 가까이 되는 삼백만 달러를 유치해 프랑스 트라이아웃과 브로드웨이 공연이 성사될 수 있었다.
앞서 잠시 얘기했듯이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용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중심축을 담당한다. 열일곱 곡 정도 되는 뮤지컬 넘버 중 리즈와 제리의 듀엣곡이 없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노래 가사가 아닌 둘의 파드되로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반해 헨리와 리즈, 그리고 제리와 그의 예술에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보내주는 상속녀 마일로가 함께하는 파드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사랑은 텍스트가 아닌 춤과 음악으로만 표현이 된다. 이런 장치는 리즈에게 청혼하기 위해 편지를 몇 차례씩 쓰고 결국 “결혼해 줄래요?”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두루뭉술 리즈에게 일방적인 승낙을 받아내는 헨리의 소통 방식과도 대조되고, 리즈를 사랑하지만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녀를 위해 피아노를 치고 음악을 써주는 것에 그치는 아담의 방식과도 대조된다. 다시 말해, 춤은 제리와 리즈에게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만의 언어인 것이다.

 



고전의 현대적 재현, 그리고 관객의 반응

현대의 뮤지컬에서 무용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뮤지컬 <파리의 미국인>이 지난 시즌 브로드웨이에 가져온 영향은 사실 꽤 고무적이다. 언제인가부터 텍스트가 작품의 가장 중심이 되기 시작한 뮤지컬계에 음악과 안무가 텍스트와 좀 더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서 고전의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 안무와 함께 춤추는 조명과 무대 역시 작품의 무게 균형을 맞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허공에 두 척의 배를 띄워놓은 센 강변의 무대는 현실의 공간을 허구의 무대에 어떻게 예술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그림이었다. 그리고 2막 발레 공연에서 칸딘스키 추상화 느낌의 파란빛이 짙은 원색 무대배경을 사용한 것도 1920년대 예술가들의 교감을 현대 관객들에게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캐릭터도 일차원적인 묘사를 뛰어넘어 현재의 관객들이 좀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게 그려냈는데, 그중 하나가 헨리이다. 원작 영화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뮤지컬에서 등장하는 헨리는 (아마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이로 그려진다. 리즈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부터, 배우를 꿈꾸는 것,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것, 그리고 아담이 농담처럼 “Girls”라고 부르는 것에 반응을 보이는 것까지, 작품을 새로 써낸 루카스와 휠든이 인물의 디테일과 깊이에 신경을 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 대부분(브로드웨이의 관객들 중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지루하게 봤다. 잘 만든 작품이지만, 무용이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작품 호흡이 늘어지는 부분이 있다. 텍스트 위주의 뮤지컬에 이미 익숙해진 젊은 뮤지컬 관객들에게 어필하기에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중심적으로 자리 잡은 무용, 특히 발레라는 언어가 낯설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티켓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 작품이 잘 만들어졌다는 방증이고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있는 관객층이 그만큼 두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찌 됐건 새로운 시도가 날로 어려워지고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고전을 새롭게 만들어내어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3호 2015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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