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뉴시즈>에서 신문팔이 소년 잭이 기자 캐서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면서 신문은 참 많이 봤는데 중요한 기사를 쓰는 기자 중에 여자는 한 명도 못 봤단 말이지.” 그러자 캐서린은 이렇게 대꾸한다. “시대가 바뀌었거든요. 대세는 변하고 있다고요!” 이 대화를 뮤지컬 속 여성의 입지에 대입해 본다면 어떨까? 극작가 하비 피어스타인은 1992년 개봉한 영화 <뉴시즈>를 2012년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기자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고 신문팔이의 파업을 돕는 중요한 역할로 부각시켰다. 국내에서도 여주인공을 내세운 뮤지컬이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했다는 보도가 종종 눈에 띈다. ‘중요한 역할을 맡는 배우 중에 여자는 한 명도 못 봤던’ 시대는 바뀌고 있는 걸까?
지난 한 해 ‘여성 혐오’는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다. 여러 방송인의 여성 혐오 발언, 소라넷 사태, 최근의 강남역 살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차별과 폭력, 혐오의 시선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온·오프라인상에서 이에 맞서는 여성들의 페미니스트 선언과 시위가 이어졌다. 이와 함께 대중 매체의 남성 중심, 이성애 중심적 드라마와 캐릭터 구성이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부추긴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남성 캐릭터의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 여성 캐릭터를 성녀(어머니, 개념녀) 혹은 창녀(악녀, 김치녀)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화시키는 것, 여성 캐릭터 사이의 인격적인 교류를 배제하고 오로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존재로만 묘사하여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의 인식을 퍼트리는 것 등이 모두 그러한 예다.
뮤지컬 무대에서는 어떨까? 대부분의 뮤지컬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의 어머니나 누이, 연인으로 등장해 전형적인 이성애 로맨스의 대상이 되거나 남성 캐릭터를 돕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고 만다는 건 고질적으로 지적되어 온 문제다.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프레임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통 부드러운 성악 발성의 배우는 밝고 청순한 캐릭터로, 강렬한 록·소울 발성의 배우는 어둡고 섹시한 캐릭터로 이 프레임에 편입되는데, <지킬 앤 하이드>의 두 여주인공 엠마와 루시가 바로 그 전형이다. 여성 캐릭터의 비극을 표현하는 손쉬운 수단으로 강간이나 매춘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마치 여성에게 최고의 비극은 성적으로 희롱당하고 순결(?)을 잃는 것이라는 듯 말이다. 최근 <프랑켄슈타인>과 <마타하리>의 강간 암시 장면이 여성 관객 사이에서 원성을 자아낸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편 남성 캐릭터는 그런 비극적 상황에 놓인 여성 캐릭터(창녀)를 구원하는 존재로서 남다른 영웅성이나 행위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지킬 앤 하이드>에서 루시를 도와주는 지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를 도와주는 알론조, <레 미제라블>에서 팡틴을 도와주는 장 발장, <잭 더 리퍼>에서 글로리아를 도와주는 다니엘 등이 그러한 예다. 하지만 여성 자신의 힘으로 혹은 여성 간의 연대를 통해 비극을 극복하는 작품은 보기 드물다.
그렇다면 성을 평등하게 다룬 작품이란 무얼까. 영화계에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라는 것이 존재한다.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성평등 테스트이다. 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이 지표를 근거로 하면 <엘리자벳>, <투란도트> 등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뮤지컬이라고 하여 꼭 성평등 뮤지컬이라고 하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공연한 중대극장 뮤지컬 중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으로는 <시카고>, <레베카>, <넥스트 투 노멀>, <맘마미아!>, <마타하리>, <위키드> 등이 있다. 물론 <마타하리>의 마타 하리가 사랑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지탄을 받았던 것처럼, 이 지표만으로 성평등 작품을 완벽하게 가려낼 수는 없다. 영화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만큼 음악이 위주가 되는 뮤지컬에 적용하기에는 애매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작자 스스로 성차별적인 클리셰를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경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표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지난 5월에는 여성 혐오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대학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대학생 프로젝트 그룹 ‘하이카라’가 만든 창작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다. ‘모던 걸’로 매도되었던 1920년대 신여성과 ‘김치녀’로 매도되고 있는 21세기 여대생, 그리고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를 병치시키며 세월이 흘러도 비슷한 형태로 계속되는 여성 혐오 문제를 파헤쳤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성차별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무대 앞에서 관객들은 공감의 웃음을 터트리거나 눈물을 훔쳤다. 공연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했는데, 한 달 만에 목표 금액을 초과한 5백만 원이 모이고, 5일간 이어진 공연 역시 매진을 기록해, 여성 혐오 이슈에 대한 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공연의 주 소비층이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남성에게만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것은, 그 자체로 이성애 중심적이고(여성은 남성에게만 관심이 있다), 여성 혐오적인(여성 관객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멋진 남자 배우에게만 관심이 있다) 발상에 기반한다. 여성 관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한편, 남성 중심 작품을 확대 재생산하여, 여배우가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빼앗고 관객의 선택지를 축소한다면 남는 건 악순환뿐이다. 오히려 뮤지컬 마니아 사이에서는 남성 주인공의 성별을 바꾼 ‘성 반전’ 극이나 여성 2인극, 여성 퀴어 로맨스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만하다. 더 많은 여성 캐릭터가 성차별적 굴레에서 벗어나 무대 위를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3호 2016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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