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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o.73] 벼려진 글로 삶을 겨눈다 - 김 훈

글 |김영주 사진 |이맹호 2009-11-06 5,578

 

화장을 지우고 화장했던 살과 근육과 피도 추려낸 다음에 남은 뼈인데 지나치리만큼 아름답다. 하얗게 빛나는 뼈가 아름답다니. 수사가 배제된, 주어와 동사만 남도록 깎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그의 소설이 가장 화려하고 대중적인 공연 장르인 뮤지컬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신기한 일이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막장’이라고 표현했던 작업실은 5년 전 여름 『칼의 노래』와 관련된 방송 취재 때문에 찾았던 곳과 달랐지만 그때 보았던 물건 몇 가지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손으로 원고를 쓰는 작가를 위한 작은 연필깎이, 다 쓴 몽당연필을 모으는 접시가 무게 추 반대편에 올려져 있는 저울, 그리고 8절지만한 크기의 녹색 칠판. 5년 전, 그 칠판에 병자호란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다음 소설은 그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뮤지컬 <남한산성>의 연출가를 먼저 만나보았느냐고, 뮤지컬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문을 여는 그에게 원작이 된 소설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하자 그는 ‘내 소설에 대해서?’라고 혼잣말처럼 반문했다. 

 

 

『남한산성』을 처음 구상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처음 구상은 중학교 3학년 때. 집이 서울이라 중학교 3학년이 되면 남한산성으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그때는 남한산성이 지금처럼 복원이 되어있지가 않았고 병자호란 때 무너진 돌더미, 폐허 그대로였어요. 학교 역사 선생님이 남한산성 밑에 가서 400년 전에 그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해줬는데 나는 그때 그 성과 병자호란을 처음 알았어요. 나는 그때 세상이 너무 무서워서 죽고 싶었어요. 세상이 그렇게 끔찍하고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약한 자를 끝까지 짓밟아 죽이는 곳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 때 내가 소설을 구상했다는 것은 참 무리한 말이지만,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약 50년 후에 나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게 한 것이지요. 45년이 걸렸어요.


남한산성에서 처음 느꼈던 세상의 잔혹함은 그 후 살아가는 동안 익숙해지셨나요.
삶을 살면서 더 처절하게 느꼈죠.

뮤지컬 <남한산성>의 대본을 보셨는지. 원작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끼셨습니까?
대본은 읽었어요. 다른 인물들을 많이 집어 넣었데. 그건 나의 것이 아니에요. 극작가와 연출가의 것이지요. 내 소설에 없는 요소들을 집어 넣은 것이 극적인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같은 이야기인데,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해도 괜찮아요. 달라져서 더 좋아진다면 더 좋은 것이지요. 연출가와 극작가는 원작 소설을 답습할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더 새로운 세계를 열고 나가야지요.


뮤지컬 <남한산성>의 대본에서 바뀐 부분 중에 인상적이었거나 잘 변환시켰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습니까?
오달제를 설정한 것은 잘한 것 같아요. 오달제와 그 여인들 이야기. 그런데 뮤지컬은 음악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극본만 읽어서는 알 수가 없는거죠. 성남에서 자기 고장의 역사를 가지고 큰 공을 들여서 우리 뮤지컬을 만드는데, 이건 지금까지 잘 없던 일이고 좋은 일이에요.


극장이나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이 현대의 신전이라고 하는 조셉 캠벨 같은 사람의 기준으로는 현대의 무신론자인 셈인데요.
앞으로도 안 가려고. 깜깜한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에 들어가는 게 싫어요.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에요.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고 극장에 안 가서 불편하거나 모자란 것이 없어요. 나는 놀 때도 혼자 놀아. 혼자서 재밌게 놀아요. 책을 읽고, 음악도 듣고, 강가에도 나가고. 자전거를 타고 연 날리고, 망원경을 가지고 나가서 새를 보고. 나는 남하고 같이 있는 게 싫어요. 혼자 있는 게 좋지.

혼자서 글을 쓰고 나면 책으로 출판이 되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생각과 이야기를 하고, 또 그것으로 뮤지컬이나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이들도 나옵니다. 이런 일들에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까?
그건 것은 소통이 되어가는 현상인 것이지요.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을 써서 책상 안에 넣어두려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내 일기를 쓰는 게 아니에요. 그걸 써서 세상에 발표해서 읽히기 위해서 쓰는 거고. 글을 써서 출판사에 가져다 주잖아요? 그럼 뭐겠어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사람들에게 읽혀야 하고, 또 하나는 내 밥을 벌어먹어야 하는 거죠. 그걸 묵혀두고 있으면 밥을 못 벌어먹잖아요. 그걸 갖다 팔아야 먹는 거죠. 그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거죠. 글은 나 혼자 쓰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으로 소통이 되는 거죠.

 

인터넷에 신작 소설 『공무도하』를 연재했지만 그런 경우에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네티즌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없었습니다.
여긴 컴퓨터가 없잖아요. 컴퓨터를 한 번 들여다본 적이 없어요. 뭐라고 댓글이 올라왔는지 난 몰라. 사람들이 댓글을 달고, 내가 거기다 대고 또 댓글을 달고, 난 그런 것을 소통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요. 그냥 말질이겠지. 채팅. 
사람들은 거기서 어떤 생산적인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게 아닐까요.
그런데 그것이… 아무 말도 안하는 게 훨씬 좋을 수가 있어요. 거기다가 대고 뭐라고 하는 것보다 고요히 있는 게 훨씬 좋을 때가 있지 않겠어요? 난 거기에서 댓글을 다는 사람들보고 하지 말라고,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고 하고 싶어요. 혼자 가만히 있는 걸 못하나봐, 사람들이. 그걸 못하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이 소통의 장이나 도구였다면 지금은 그 자체가 세상의 일부이거나, 하나의 세상이 됐잖아요. 그게 도구일 때는 대체할 방법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한 세상이 되었을 때는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낙후된 거지. 난 낙후된 게 좋아요. 내가 낙후된 게 수치스럽지도 않고 앞서나가는 놈들을 부러워하거나 존경하지도 않아요.

낙후되었다기보다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세상 하나를 완전히 닫아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용기라든가, 신념, 고집으로 느껴집니다.
글쎄, 그런 것보다도 난 저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저 안에 의미 있는 세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대개 없데? 저 안에. 나는 저걸 몰라가지고, 내가 찾고 싶은 정보가 있을 거 아녜요. 그래서 누굴 시켜서 찾아보라고 하면 그런 건 없대요.

예를 들어서 어떤 것이요?
가령 다산 정약용은 고문틀에 매달려서 천주교를 배신할 때 어떤 말을 했는지 찾아보라고 했는데 그런 건 없대. 그럼 뭐가 있느냐 물었더니 저 안에 여행가서 어디 가면 맛있는 게 있고, 그런 건 다 있다는 거야. 그런 건 나한테 필요가 없죠. 난 맛있는 데는 다 알아.


『조선왕조실록』의 어떤 구절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곳,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한 그림 안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컴퓨터로 쉽게 찾아 볼 수 있죠. 그건 컴퓨터가 아주 좋은 점이죠. 하지만 컴퓨터를 가진 사람들은 고종실록을 다 보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다 봐요. 정확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공무도하』 같은 경우에, 인터넷으로 연재되는 것을 읽지 못했습니다. 책으로 찍혀 나온, 손댈 수 없이 고정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 어딘지 소설의 숙명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건 책으로 읽는 게 더 좋을 거예요. 일관된 독서… 그게 더 건강한 독서죠.


『현의 노래』, 『칼의 노래』, 『남한산성』까지 세 권의 장편소설을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쓰고 난 후에 현대물을 쓴 것은 원래 계획이었습니까, 아니면 변화의 계기가 있었습니까?
역사를 소재로 소설을 썼지만, 나는 역사에 대해 특별한 애착이나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에요. 난 그냥 쓰고 싶은 걸 쓰는 거예요. 인간의 야만성에 대해 쓰겠다, 하면 『남한산성』의 시대를 끌어다가 쓰는 거죠, 나는 현대에 대해 쓰겠다, 하면 『공무도하』를 쓰는 거고. 앞으로 역사적인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인간의 야만성에 대해서, 보잘 것 없는 숙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인데,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문장은 신기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글쎄, 난 그게 아름답다는 건 잘 모르겠어요. 『공무도하』에서 쓰고 있는 건 전혀 아름다운 문장이 아닌데. 행정문서 같은 문장인데. 문장은 아름답기보다는 정확하면 되는 것이에요. 정확한 것이 아름답죠. 아름답지만 정확하지 않은 것은 추악한 문장이에요. 그런 문장이 많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정확하기 때문에 정확한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인가요?
나는 그것이 정확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안 편해요. 문장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야. 작가가 개입하지 않은 것.


글 쓰는 사람들이나 작곡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전체 중 2할 정도는 내가 아닌, 내가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으로 채워지는 것이라는 말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으세요?
아니. 난 내가 의식하지 않은 건 다 빼요. 내가 정확한 의지를 가지고 쓴 게 아닌 문장은 없는 거죠. 내 문장에는 내가 전혀 안 나타나잖아요. 글을 쓴 자의 내면이나 정서가 전혀 없잖아. 나는 나를 싹 빼버리잖아요.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에요. 내가 완벽하게 빠져야 해요. 그래야 정확한 문장이 돼.

『개』의 주인공 보리는요?
『개』? 그건 개의 관능으로 쓴 글이지요. 개. 『개』는 아직 다 못쓴 거예요. 그건 쓸 수가 없어요. 개는 인간보다 후각이 200배 발달했고 청각이 50배 발달했다고 하잖아요. 그렇죠? 그건 과학적인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개의 내면에는 인간보다 수백 배 많은 삶의 원재료들이 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보다 백 배는 풍부한 삶의 원자재들을 갖추고 있는거죠. 좌우간 그것들이 말을 못해서 드러내지 못하고 짖기만 하는 거지. 그걸 인간의 언어로 드러내려고 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혼자 노는 걸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그중에 보리 같은 개를 키우는 일도 포함되나요?
난 그런 건 싫어해요. 나는 짐승을 기르는 건 싫어요. 나는 그것들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러 오는 건 싫어요. 『개』는 소설이죠. 나하고 관련이 없는. 내가 쓴 소설은 나와 관련이 없어요.


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 독자들이 작가의 개성이나 삶의 이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드물게 그런 작가 중 한 분이니까요.
독자는 소설만 읽으면 돼요. 작가의 생은 알 필요가 없어. 내가 쓴 소설은 내가 산 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예요. 나를 다 빼놓고 쓰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 아니에요.  내가 여기 들어가 있으면 소설이 안 돼요. 에세이 밖에 안 되잖아. 소설은 내가 나와서 설치는 게 아니고,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쓰는 거예요. 나를 쓰면 일기를 쓰는 거겠지. 하지만 난 일기를 쓰는 게 아니니까, 등장인물 속에 나는 없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생과 연결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건 작가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설만 읽으면 돼.

가령, 임화 같은 시인의 경우는요?
임화의 시는, 그의 생과 관련이 있죠. 나의 소설은 나의 생과 관련이 없어요. 임화는 임화의 경우인 거고. 그 사람은 소설가는 아니고, 시인이죠.


치욕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시나요?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에요.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이 잘나고 위대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이에요. 나에게는 연민 같은 정서는 없어요. 내 글에 연민이 안나오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직 연민의 정서를 가지고도 글을 쓰더라고. 우리나라 대중가요도 거의 다 연민에 대한 거잖아요. 그 연민 하나 가지고 수만 곡을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우리가. 고향, 어머니, 어린 시절, 청춘, 이거 다 연민이잖아. 난 그런 게 없어요. 난 연민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아요. 나하고 다른 것뿐이지. 그들은 연민을 하고 나는 관찰을 하고 그런 것이지. 누가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은 아니에요.

20여 년 전 소설 『태백산맥』에 대해 글을 썼을 때 삶의 구체성, 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은 화두를 갖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태백산맥』은 밥의 문제에 대한 것이 컸죠.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밥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서지. 가장 중요한 게 밥이지. 밥을 안 먹으면 죽잖아요. 밥을 한 끼를 안 먹으면 견딜 수가 있어요. 두 끼를 안 먹으면 작동이 잘 안 돼. 세 끼를 안 먹으면? 누워야지. 그게 무서운 거예요. 사람은 한 달을 안 먹어서 죽는 게 아니고, 세 끼만 안 먹으면 작동불능이 돼요. 우리는 밥이 무서운 걸 알아야 해요. 젊은이들은 매일 자고 일어나면 자기 입에 맛있는 게 저절로 들어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참 어림없는 일이에요. 늙으면 알아요. 그것이 아니라는 걸.

 

그는 TV를 보지 않는다. 뉴스는 보지만 텔레비전 뉴스보다 라디오 뉴스가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TV에는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니까 주관적이 되는 것 같아요. 인간이 없는 게 훨씬 신빙성이 있어요. 목소리만 나오는 것이 더 객관적이에요.” 40여 년 동안 하루에 두 갑씩 피우던 담배는 지난 해 여름부터 끊었다. 아직도 좀 힘이 든다는 그에게 새삼스런 금연의 이유를 묻자 “이제 다 피운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언젠가 다 쓴 것 같으면, 그는 연필을 내려놓을까. “아니, 글을 어떻게 다 써요?” 소설가는 정색을 하며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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