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즐거울 수 있도록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연출 전공. 어린 시절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지만 고교생 때 진학 방향을 바꿔 공대에 입학, 한 학기 만에 다시 공연 연출로 진로를 변경한 독특한 이력이있다. 2005년 연기예술과 1학년 재학 당시, 대학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은 이지나 연출을 통해 연극 <클로저>로 조연출에 입문하면서 빠르게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08년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록키 호러 쇼>에 연출로 이름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텔 미 온 어 선데이>(2007), <컴퍼니>(2008), <브로드웨이 42번가>(2009) 등 다수의 작품에 조연출로 참여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프리실라>(2014)나 <데스노트>(2015) 등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에 협력 연출로 참여하며 이력을 쌓았다. 지난해 가을에 올라간 연극 <안녕, 여름>을 시작으로 연출로서 활발히 활동 중이며, 현재 올가을 개막하는 서울예술단의 신작 <꾿빠이, 이상>을 준비 중이다. 오랜 현장 경험에서 쌓아온 노하우로 의사소통과 의견 조율에 능숙하다는 게 강점으로 꼽힌다.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록키 호러 쇼>는 첫 중극장 연출작이었다. 공연을 마친 소감은 어떤가.
<록키 호러 쇼>는 2008년에 이 작품으로 연출 입봉을 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는데, <록키 호러 쇼>의 국내 공연 연출을 담당하셨던 이지나 선생님 밑에서 일찍 조연출 생활을 시작했던 터라 어린 나이임에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전 몇 시즌에 조연출로 참여했던 작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선생님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이번 공연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첫 중극장 연출이라 부담이 있었지만, 이전에 대극장 뮤지컬 <프리실라>나 <데스노트>에 협력 연출로 참여했던 경험이 무대를 운용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작품적으론 <록키 호러 쇼>가 지닌 재미있는 요소만 잘 풀어내도 성공이겠다 싶었는데, 특히 젊은 관객들에게 생소한 컬트 문화를 재미있게 푸는 데 중점을 두려고 했다. 이 부분에선 김성수 음악감독님이 정말 큰 도움을 주셨다. <록키 호러 쇼>의 앙상블인 ‘팬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도 그간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입봉한 후 다시 조연출로 오래 활동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실 <록키 호러 쇼> 이후에 본의 아니게 일 년 반가량을 쉬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떤 회사가 이십 대 중반의 초짜에게 연출직을 맡기려고 하겠나. 그렇다고 다시 조연출로 쓰자니 미안하고, 포지션이 애매했던 거다. 그러다 이지나 연출님이 <서편제> 2010년 초연 때 괜찮으면 조연출로 오겠냐고 해서 복귀하게 됐다. 이후 자연스럽게 다른 연출님들과도 작업하게 됐는데, 그때 많이 들었던 얘기가 연출을 하고 나서 다시 조연출을 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런데 솔직히 <록키 호러 쇼>로 연출을 해본 건 맞지만, 냉정히 말해 스스로는 그게 입봉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 좋게 값진 경험을 했던 거지. 조연출과 연출을 병행했던 기간까지 포함하면 조연출 경력이 거의 12년 정도 되는데, 다양한 스타일의 연출님들께 정말 많은 걸 배웠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조연출을 하면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연출을 맡다 보니, 함께 작업해야 하는 스태프들하고 나이나 경력 차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조연출 시절에 겪어봤던 분들이 많아서 비교적 쉽게 소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감독님들도 나라는 사람을 이미 경험해 봤기 때문에 연출 경험은 부족할지언정 믿어주셨던 거다. 지금 내 인맥의 대부분은 조연출 때 형성된 건데, 인맥이야말로 조연출 생활의 큰 수확 아닐까 싶다. 현장 경험도 빼놓을 수 없는 재산이다. 최근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게 뭐냐면, 작품은 연출이 혼자 만들 수 없다는 거다. 연출가의 머리에서 100퍼센트의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을뿐더러, 설령 그게 된다 하더라도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 큰 그림을 안에서 각 파트의 의견을 조율해 정리하는 게 연출이 해야 하는 일인데, 그런 협업 노하우는 단기간에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값진 소득은 사수를 얻었다는 것 그 자체다.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어렸을 때 엄마가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뭔가를 물어보는 게 참 신기했다. 나에겐 너무 커다란 존재인 엄마도 모르는 게 있구나 싶어서. 내가 연출이 되어 보니 딱 그 기분이다. 연출이면 뭐든 다 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많아졌다. 그럴 때 전화해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선배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뮤지컬의 교본처럼 여긴 작품이 있나.
너무 유명한 작품이라 좀 뻔하지만, 어렸을 때 <캣츠>를 정말 재미있게 봤다. 개인적으로 말보다 노래나 춤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데, <캣츠>는 대사가 없는 성스루 뮤지컬이라 더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롤모델인 이지나 연출님 작품 중에선 <바람의 나라>하고 <서편제>를 제일 좋아한다. 연출님이 가장 잘하시는 것 중 하나가 배우의 장점을 작품에 활용하는 건데, 배우를 적재적소에 써서 작품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던 게 <바람의 나라> 아니었나 싶다. 그걸 보면서 배우 운용법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보통 우리나라 뮤지컬에선 노래와 안무, 대사 장면이 구분되는데 연출님이 그 경계를 많이 허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서편제>는 세 요소를 한데 잘 버무렸을 뿐 아니라,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국악을 녹여냈다는 점에서 감탄했다.
연출가로서 신념은 뭔가.
다양한 연출님들 곁에서 보고 배운바, 내가 세운 첫 번째 원칙은 작품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될 땐 강단 있게 의견을 밀어붙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처음에 잡은 컨셉을 끝까지 고수하자는 거다. 그리고 항상 재미있게 작업하자는 게 나의 가장 큰 신념이다. 나뿐만 아니라 작업에 참여하는 모두가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좋은 작품은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즐겁게 작업에 임할 때 나오는 것 같다. 프로듀서의 작품 또는 특정 주연 배우의 작품이 아닌 모두가 ‘내 작품’이라고 느끼면서 작업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만드는 연출이 되는 것, 이게 내가 바라는 모습이다.
끝으로 차기작 <꾿빠이, 이상>에 대한 팁을 준다면?
처음 연출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떤 작품인지 물었더니 무용을 바탕으로 한 실험극이라고 하더라. 뭔가 재미있겠다 싶었다. 천재 시인 이상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지만,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성이 아니어서 스토리 전달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베일에 싸여 있는 이상이라는 존재를 명확히 어떤 사람으로 규정짓지 말자는 데 모든 스태프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연기와 노래, 춤을 하나로 녹여내는 것,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공연의 즉흥성을 최대로 살리는 것. 이 두 가지를 실현하는 게 이번 작품의 핵심 목표인데, 연습실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재미있게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우리 스태프들이 재미있으면 같이 작업하는 배우들도 재밌을 거고, 배우들이 무대에서 재밌어 하면 관객들도 재밌게 볼 거라 믿는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7호 2017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