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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미 온 더 송> [No.168]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스토리피 2017-09-25 3,346

카바레의 퇴행

<미 온 더 송>





신선한 시도의 연장?



요즘 제일 바쁜 연출가를 꼽자면 김태형은 맨 앞에 있을 거다. 최근 석 달 사이에 내가 본 것만 해도 세 편이니 생산력으로 보자면 대단한 창작자임에 틀림없다. 작업의 스펙트럼도 넓다. 진지한 희곡에 바탕을 둔 공연뿐 아니라 오락적인 상상력과 실험적인 대담함이 돋보이는 작업까지 고전적인 작업과 최첨단의 기획을 동시에 아우르니 말이다. 특히 최근에는 형식의 혁신을 앞세운 공연에 관심이 쏠려 있는 것 같더라. 관객이 극장 주변 곳곳을 돌아다니며 실제 상황 같은 체험을 즐기는 극(<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도 그렇고, 즉흥으로 만들어내는 뮤지컬(<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도 그렇고. 이들 공연은 관객 참여를 앞세운 새로운 형식을 소개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는 공연이기에 완성도의 기준은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언뜻 <미 온 더 송>도 이런 시도와 같은 맥락의 작품처럼 보인다. 카바레 뮤지컬을 표방하는 이 작품에서도 중요한 건 역시 관객 참여. 무대와 구분되지 않는 테이블 석은 이 작품이 어떤 형식을 지향하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전에도 이런 시도는 심심찮게 있었다(<머더 발라드>를 기억해 보시라). 하지만 여타의 작품이 그저 테이블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 데 그쳤다면 이 공연의 테이블은 음주까지도 허락하는 파격을 보장한다. 진짜 맥주를 마시며 앉아 있는 관객이 여럿이더라. 공연 공간의 꽤 넓은 부분을 테이블 석으로 확장한 것이 그저 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관객을 좀 더 자유롭게 풀어놓기(?) 위해서라는 설정의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관객 참여를 기준으로 놓자면 이 작품의 맥락은 전작들과 같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 이 작품의 새로움은 이게 전부다.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이 작품의 형식은 내용에 비해 과도한 설정이었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열어놓은 공간에 비해 공간을 채우는 공연은 놀랍도록 진부하다. 그러나 이 진부함보다 더 문제는 이 공연이 시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데 있다. 시도란 곧 고민이다. 즉흥뮤지컬은 관객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는 방식을 고민했기에 신선했고, 소위 RPG연극은 관객에게 상황을 체험케 하는 형식을 시도했기에 신선했다. 이미 유럽에서 유행하는 형식을 가져온 게 뭐가 새롭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 형식이 지향하는 재미와 가치를 성실히 소개하는 것의 의미는 적지 않다. 하지만 <미 온 더 송>에서는 이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가? 관객을 내세우는 포장지는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내용물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댄서의 순정’이나 ‘싱어의 모정’이나


차라리 이 작품이 콘서트 드라마였다면 훨씬 자연스러웠을 거다. 배우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불러주는 친밀한 분위기에서 관객과의 거리는 가까워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카바레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의식하는 순간 이야기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작품의 주인공을 배우 이영미가 아니라 블루벨벳라이브의 가수 미로 설정한 것부터 그렇다. 긴 공백기를 마치고 다시 무대로 돌아온 가수 미가 소설 속의 뱀파이어 세라의 이야기에 빗대어 자기의 사연을 들려주는 구조. 그러니까 배우 이영미를 지우고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배우의 이야기를 기대할 만한 공간에서 이런 인위적인 설정을 하는 것은 의도된 부자연스러움이다. 게다가 등장인물이 뱀파이어라니 뭔가 강렬하고 도발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게 순서상 형식상 맞다.


그런데 이야기 좀 보소, 도발은커녕 식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아무리 철학과 예술에 통달했다 해도 남편과 아이를 통해서만 인간다움을 배우는 뱀파이어 세라의 이야기부터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위해 자기의 모든 피를 바치는 희생적인 남자의 이야기라니. 이 소설을 빗대어 자기 인생을 말하는 가수 미의 이야기도 진부하기로는 처지지 않는다. 초기 치매에 걸린 젊은 엄마의 애끓는 모정이 눈물겹더라.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모성이고 자기긍정인 셈이다. 따뜻함은 위로로 이어진다. ‘괜찮아, 힘들면 울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넌 날 수 있어, 힘을 내!’ 도발의 경쾌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위로의 감상이 넘친다. 만일 콘서트 드라마로서 배우가 자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결론을 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거다. 하지만 카바레 뮤지컬이라면서. 이럼 반칙이지. 카바레 뮤지컬의 작가 김태형의 서사적 상상력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원래 카바레는 특정한 공간을 일컫는 말이지만 웃음이든 독설이든 실험이든 그야말로 ‘아무거나’ 가능한 형식을 대표하는 말이기도 하다. 카바레의 멋은 통속이 됐든 정치가 됐든 사람들의 통념을 뛰어넘는 도발에 있는 거다. 그러니까 카바레를 표방한다는 것은 형식이 됐든 내용이 됐든 무언가를 뒤집는다는 것이고 무언가를 건드린다는 것이며 무언가에 부딪친다는 것과 같다. 새로운 것을 배태하는 힘의 근원이 이것이다. 이 힘이 유럽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낳았고 미국에서는 풍자코미디를 낳았으며 한국에서는 자유부인을 낳았다. 유부녀의 신분으로 자유연애라는 금기를 끊임없이 꿈꿨던 자유부인은 1950년대 한국의 카바레 문화가 탄생시킨 대표적인 소설 속 인물이다. 60년도 훨씬 전에 벌써 도발의 몸짓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의 카바레 뮤지컬에서 ‘싱어의 모정’을 보게 되다니. 우리에게 카바레는 자유부인의 상상력보다도 퇴보한 개성 없는 건전 문화인 셈이다. ‘댄서의 순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고민하지 않는, 너무나도 쉬운


이렇게까지 생각하긴 싫지만, 남편과 아내(김태형과 이영미는 부부다)가 소박하게 기획한 공연에 괜히 카바레 뮤지컬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건 아닐까. 정말 카바레 뮤지컬을 시도할 생각이었으면 배우의 선정부터 적절했어야 한다. 이영미는 좋은 배우이자 뮤지션이지만 일인극을 이끄는 이야기꾼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적절한 캐스팅은 아니다. 일단 말의 기술에서나 마음의 여유에서 관객을 압도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극은 산만해지거나 지루해지고 만다. 일인극을 ‘연기’하기보다는 차라리 배우로서 뮤지션으로서 가정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는 더 빛났을 것이다. 목까지 쉬어버린 그에게 무대는 꽤 버거워 보였다.


관객 참여를 이끌어내는 연출의 매무새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뱀파이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관객의 합창을 유도하는 등 스토리의 연결과 관객 참여의 호흡은 자주 부자연스럽고, 펜까지 나눠주며 관객에게 직접 받은 메모는 극에서 거의 쓸모가 없다. 흔한 신청곡조차 밴드가 즉석 연주를 못하던데 그럴 거면 신청곡은 왜 받나. 정말 카바레 뮤지컬의 참여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다면 관객들을 테이블에서 일어나게 할 만한 전략을 마련했어야 했다. 극장이 아니라 진짜 술집을 빌려서 공연을 하든지 정말 라이브 극장에 온 것 같은 해방감을 주든지, 뭐든지.


김태형은 이번 작업에서 쉬운 길을 택했다. 가장 편한 배우에 충분히 익숙한 방식으로 아주 무난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느라 이 작품은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아 안전한 공연이 되어버렸다. 안전함과 신선함이 함께일 순 없는 법. 물론 음악의 몫이 있으니 공연은 나름의 힘을 가질 거다. 하지만 카바레 뮤지컬이라는 형식은, 연출인 그가 하릴없이 무대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형식의 이름에 부합하려면 뱀파이어 세라는 남편을 식탁 위에 올려 즐겁게 피를 빨면서 무대 위의 남편을 비웃어야 할 거다. 그러나 흡혈귀판 규방가사에 기대는 무슨. 이 쉬운 만듦새 때문에 이 공연이 지닌 가치(뮤지컬 동네에서 보기 드문 여성 일인극이다!)가 휘발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8호 2017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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