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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INSIDE THEATER] 국립창극단 <산불> [No.169]

글 |박보라 사진제공 |국립창극단 2017-10-26 3,522

국립창극단 <산불>

완벽하게 사그라든 불씨





일그러진 욕망

 

국립창극단이 이번 시즌 첫 공연으로 대형 신작 <산불>을 선보인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은 판소리는 물론 그리스 비극, 서양 희곡, 동화 등에 주목하며 창극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해 왔다. 이번엔 한국 현대 희곡사의 이정표라 불리는 차범석의 『산불』을 원작으로 한국 현대 희곡의 창극화에 도전한다. 우리네 이야기를 한(恨)이 담긴 소리로 표현해 묵직한 감동을 담을 예정.


작품은 1951년 겨울, 한국전쟁으로 노인과 과부만 남은 지리산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어느 날 과부 점례의 집에 빨치산에서 탈출한 젊은 남자 규복이 숨어든다. 점례는 그를 뒷산 대나무 숲에 숨겨주면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이웃집 과부 사월에게 은밀한 관계를 들키고 만다. 그리고 사월은 점례에게 규복을 함께 보살피자고 이야기한다.


창극 <산불>은 원작에서 상당히 많은 변화를 이룰 것으로 예고했다. 극본을 맡은 최치언은 까마귀들, 죽은 남자들 등 새로운 캐릭터를 심어 넣으며 새로운 창극본을 만들었다. 원작에서는 1951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그리지만, 이번엔 1965년 점례 시어미니 양씨가 죽어 장례를 치르러 돌아온 고향에서부터 시작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원작에서 강조한 이데올로기 갈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원작이 창작되던 시대에서 여성의 적나라한 욕망은 충격적일 수 있지만, 이젠 이런 요소가 더 이상 충격이 아닌 시대다. 이런 시대적 변화를 통해, 관객은 일그러진 욕망을 만들어내는 전쟁 자체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원작이 한국전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그 비극을 작은 마을 속에서 축약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면, 창극 <산불>은 작은 마을로부터 전쟁이 주는 폭력의 보편성을 끌어내며 메시지를 던진다.




전쟁의 소용돌이

 

<산불>은 영화 <부산행>, <곡성>, <타짜> 등에서 이름을 알린 장영규가 음악감독을 맡았다. 창극 작업에 처음 도전하는 그는 판소리의 해체와 재조립을 위해 한층 색다른 시도를 할 예정이다. 이성열 연출은 “우리나라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악극이라, 판소리 음악을 어떻게 잘 구현하느냐가 문제다. 장영규 음악감독이 새로운 소리로 작품을 재창조하는 것에 도전하고 있다. 다양한 음악 기법 및 음향 효과를 통해 <산불>의 소리가 구현될 예정이다”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편 무대예술가 이태섭의 손에서 탄생한 거대한 회전무대 위에는 약 천 그루의 대나무와 각종 모형을 배치한 대나무 숲이 구현된다. 평화와 거리가 먼 난장판 같은 마을의 모습을 통해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면서 사는 인물들을 시각적으로 강조한 것. 폐허 속에서 싹틔우는 불구적인 사랑이 이런 무대 분위기와 더해져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이다. 여기에 전쟁의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나선형 무대 장치와 대형 폭격기 등의 오브제가 사용돼 <산불>의 리얼리즘을 화려하게 구현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성열 연출가 MINI INTERVIEW


<산불>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평소에 창극에 관심이 있었다. 최근 국립창극단에서 창극의 현대화라고 하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 우리 판소리와 서양의 연극이 만나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좋은 제안이 왔고 이렇게 작업을 하게 됐다.


작품에서 공들인 부분을 설명해 달라.

<산불>의 여자들은 남자들이 없는 마을의 과부들로, 모두 전쟁을 통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이들의 고통을 잘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려고 했다. 주인공인 점례, 사월, 최씨, 양씨뿐 아니라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가 지닌 전쟁의 상흔을 시각화, 청각화하려고 노력했다. 


원작과 달라진 부분은 무엇인가.

원작에서는 남성들이 시작과 끝에 나온다. 이야기의 앞엔 인민군이 출몰하고, 뒤에는 대나무 숲을 태우러 국군들이 온다. 이번 <산불>에서는 마을의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까마귀를 의인화해 코러스 역할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 까마귀들은 남성과 여성이 혼성으로 구성됐다. 또 토끼 바위 밑에 끌려가 총살을 당한 남자들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구슬프게 운다. 가족과 부인과 자식을 그리워하면서 우는 거다. 그래서 여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남자들과 까마귀들이 무대에 함께 있다. 이렇게 원작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인물들을 배치해 작품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고 재미와 볼거리를 더할 예정이다.


작품에서 매력적인 부분은 무엇인가

<산불>은 전쟁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과거엔 이 작품을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주목했지만, 이젠 냉전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그려보고 싶다. 관객들은 전쟁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큰 모티프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전쟁이라는 건 보편적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인간이 그런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면, 그 상황에서 사랑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는지, 그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나고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주목했으면 좋겠다.


관객들이 <산불>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나.

지금은 사랑에 대한 열망과 그것이 굴절될 수밖에 없는 전쟁의 상처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전쟁은 주어진 부대적인 상황이고, 그 속에서 뜨거운 사랑이 움텄다가 상처를 입고 사그라진 거다. <산불>을 통해 우리의 지난 역사를 되새기고, 이런 상황을 겪었던 여성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극한적인 상황 속에 서로를 원하는 사랑, 그리고 결국은 이뤄지지 못하는 것에 가슴 아파했으면 좋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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