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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매혹의 근대 도시 경성 [NO.170]

글 |안세영 사진 |- 2017-12-08 8,116

<사의 찬미>, <팬레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배니싱> 등 최근 관객들과 만난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작품의 배경이 경성이라는 것!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비극을 품고 있으면서도, 근대 문물의 유입으로 봉건의 관습과 근대의 새로움이 뒤섞이며 혼란과 격동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시대. 그 특유의 분위기는 뮤지컬 무대에서도 빛을 발휘하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뮤지컬 속 경성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의 찬미>, <팬레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창작진들을 만나 각 작품들이 무대에 당대를 어떻게 녹여냈는지 알아보았다.

 

매혹의 근대 도시, 경성

 

일제강점기 서울은 ‘경성(京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망국의 설움과 신문물에 대한 흥분이 혼재했던 경성은 불온하고도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번쩍이는 고층 백화점과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카페가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비밀스런 움직임이 계속되던 시절이다. 혼돈 속에서 꽃핀 무궁한 이야깃거리는 영화·드라마·소설·공연을 막론하고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사랑받았다. 그중에서도 뮤지컬이 주무대로 삼는 것은 1920~30년대의 경성. 그 시절 경성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 시대상은 뮤지컬 속에 어떻게 투영되었을까.  

 

1930년대 경성 거리


새로운 풍경, 새로운 유행

근대화의 물결과 더불어 경성의 풍경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1920년대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밤거리를 환히 비추는 경성은 그야말로 불야성의 도시였다. 불 켜진 상점의 진열장과 거리를 메운 광고 이미지가 자본주의화된 근대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고층 빌딩도 속속 들어섰다. 1929년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명동, 충무로 일대)에 국내 최초의 백화점 ‘미츠코시 경성 지점’이 세워진 데 이어, 1937년에는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종로 일대)에도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에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춘 ‘화신백화점’이 세워졌다.


거리에는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금테 안경을 낀 ‘모던보이’와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뾰족구두를 신은 ‘모던걸’이 등장했다. 외래문화를 쫓으며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인 이들은 사치스럽고 문란한 ‘못된 보이’, ‘못된 걸’로 비판을 받았지만, 동시에 은근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장소는 바로 카페. 이국적인 인테리어와 모던한 옷차림의 웨이트리스, 최신 유행의 음악과 춤이 있었던 카페는 현대적 인간을 자처하는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아지트였다.


1920~30년대 대중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신문, 잡지, 라디오 방송, 영화관과 같은 매체의 확산이었다. 특히 영화는 서구 문화 유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20년대부터 단성사, 우미관 등 여러 상설 영화관에서 외국 영화가 대거 상영되면서, 조선인은 영화에 나오는 서양 배우의 옷차림과 연애 풍속을 흉내내며 단기간에 근대적 삶의 양식을 학습했다.


이 시절 경성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에는 모던걸, 모던보이의 말쑥한 패션은 물론 재즈, 사교댄스 등 당대에 유행했던 음악과 춤이 반영돼 있다. 특히 최근 창작뮤지컬 공모 당선작 중에는 경성에 유입된 새로운 문화와 유행을 조명한 뮤지컬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서울시뮤지컬단의 ‘2013 힘내라, 우리 뮤지컬’ 쇼케이스 선정작 <경성 딴싱퀸>은 경성의 사교댄스 유행을, ‘2016 뮤지컬 인큐’ 리딩 공연 선정작 <꿈에 그릴>은 국내 최초의 양식당 ‘그릴’을, ‘2017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당선작 <경성가왕>은 국내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의 레코드 가수를 소재로 한다. 이들 작품은 근대화가 열어준 가능성, 그리고 일제의 감시와 통제로 인한 제약을 갈등의 주축으로 삼는다.

 

 

가로등이 늘어선 남촌

 

 

신여성과 연애의 탄생


1920~30년대는 무엇보다 연애의 시대였다. 19세기 초 서양 선교사들이 ‘Love’를 번역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연애(戀愛)’라는 단어는 중국과 일본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연애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1910년대 말, 연애 소설 『장한몽』(1913), 『무정』(1917)의 인기와 함께 자유연애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부터다. 가문의 뜻이 아닌 개인의 뜻으로 짝을 선택한다는 자유연애 사상은 당시 청년들에게 근대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자유연애는 도시에 연애와 관련한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했고, 교회당과 음악회, 극장, 바, 카페 등이 데이트 공간으로 부상했다.


여성의 지위와 역할 변화도 자유연애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조건이었다.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활동 영역은 집 안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886년 이화학당을 필두로 선교사나 민간단체에 의한 여성교육기관이 설립되었고,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교육받은 신여성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비행사 박경원, 소프라노 윤심덕, 무용가 최승희, 화가 나혜석 등 인텔리 직업여성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이들의 파격적인 연애 스캔들이 자유연애 풍조를 이끌어 나간 것은 물론이다. 이 밖에도 새롭게 형성된 도시 문화는 웨이트리스, 티켓걸, 버스걸, 엘리베이터걸, 바걸 등 새로운 여성 직업군을 탄생시켰다. 기생들은 유행가 가수, 영화배우로 진출해 새로운 대중문화의 주역이 되었다. 다른 여성들보다 사회적 제약에서 자유로웠던 기생은 자유연애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녀의 접촉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집안에서 정해 주는 상대와 결혼하는 조혼 풍습 또한 자유연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사랑은 종종 자살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곤 했다.


이 땅에 처음으로 연애 열풍이 불어닥친 시절, 당대 명사들의 극적인 러브 스토리는 여러 뮤지컬에 영감을 주었다.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정사(情死)를 소재로 한 <사의 찬미>,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문인 이상의 삶과 김유정의 연애사를 모티프로 한 <팬레터>, 동성 커플 홍옥임과 김용주의 정사(情死)를 그린 <콩칠팔새삼륙> 등이 그 예다. 실제 경성에서의 연애가 그러했듯, 이들 작품 속의 사랑도 대부분 비극적인 색채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당대 자유연애의 주인공이었던 신여성, 여학생, 기생은 자연스레 뮤지컬에서도 여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호텔 양식당에서 차를 마시는 최승희

 

 

뜨거운 투쟁


화려한 도시 문화와 애달픈 연애 풍조만이 이 시대 경성의 전부는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끈질긴 독립운동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이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실패한 뒤, 해외로 근거지를 옮긴 독립운동가들은 더 강력한 무장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이 조직되었다. 의열단은 1920년대에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후일 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신채호 등이 이 의열단의 고문 역할을 했다.


뮤지컬에서는 조선 청년들이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만나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과정을 그린 <경성특사>, 동경시청장 암살 작전을 그린 <청춘, 18대1>이 독립운동을 소재로 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개인의 영달만 생각하던 조선의 청춘들이 우연한 계기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이야기다. 독립운동을 다룬 이야기는 자칫 무거워지기 십상이지만, 두 작품은 각각 추리 활극과 사교댄스라는 당대의 유행 요소를 차용해 절망과 낭만이 교차하는 시대상을 녹여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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