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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에브리바디스 토킹 어바웃 제이미> [NO.172]

글 |남윤호 배우 사진 |Johan Persson 2018-01-24 8,990

특별한 소년의 당당한 자아찾기

<에브리바디스 토킹 어바웃 제이미>

Everybody’s Talking About Jamie




궁금증을 자극하는 공연 포스터


“Everybody’s Talking About Jamie”. 지난해 11월 웨스트엔드에 오른 신작의 제목인 이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모두가 얘기하고 있는 제이미(이하 <제이미>)” 정도가 될 것이다. 런던의 수많은 공연 가운데, 이달의 리뷰 작품으로 이 ‘제이미’를 택한 이유는 누군가의 추천도, 입소문 때문도 아닌 지하철역에 붙어 있던 공연 포스터와 그 안의 문구였다. 문구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현 세대의 빌리 엘리어트’. 포스터엔 남자인지 여자인지 얼핏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고운 금발 소년이 펄 아이섀도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건 뭐지 싶어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영국 셰필드에 사는 열여섯 살의 고등학생 제이미 뉴의 꿈은 드래그 퀸이 되는 것이다.” 이 한 줄의 작품 설명은 공연에 더욱 큰 흥미를 갖게 했고, 그렇다면 <제이미>라는 공연에 대해 한국 관객들과 공유해 보자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포스터를 처음 마주한 게 개막 두 달 전이었으니까, 공연에 대한 호기심은 내 안에서 약 두 달간 인큐베이팅된 셈이다. 그리고 지난 11월 18일 저녁 드디어 <제이미>를 마주해 한국의 예비 관객분들에게 ‘제이미 뉴’라는 특별한 소년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제이미 캠벨과 제이미 뉴, 그리고 셰필드


<제이미>의 배경인 셰필드는 영국 북부에 위치한 철강 산업 도시이다. 셰필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전체에서 대영 제국의 허리에 위치하는데, 잉글랜드의 대표 북부 도시 맨체스터나 리버풀처럼 과거부터 공업 도시로 유명해 워킹 클래스(노동 계급)가 주를 이루어 산다. 물론 노동 계급이라고 해서 그들의 삶이 가난하거나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지역 배경에 대해 먼저 밝혀두는 이유는 극 중에서 제이미가 겪는 일들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빌리 엘리어트>에 등장하는 빌리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역시 북부의 대표적인 노동 계급이라 할 수 있는데(<빌리 엘리어트>의 배경도 영국의 북부 광산 지역인 더햄이다), ‘<빌리 엘리어트>’ 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같은 딱딱한 억양과 거칠고 솔직한 감정 표현. 북부 지역 남자들은 대개 축구와 럭비에 열광하는 ‘상남자’들이고, 여자들 또한 남자들 못지않게 씩씩하고 당당한 ‘여장부’들이다. 이런 동네에서 드래그 퀸을 꿈꾸는 열여섯 살의 남자아이라니. 이게 웬 말인가.


하지만 다소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광산업이 주산업이었던 영국 북부 도시 카운티 더햄에서 자란 열여섯 소년 제이미 캠벨이 뮤지컬 주인공 제이미 뉴의 실제 모델이다. 드래그 퀸을 꿈꾸는 북부 소년 제이미 캠벨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2011년 BBC3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제이미: 16세의 드래그 퀸>을 통해서였는데, 이 모든 시작은 그가 직접 보낸 이메일 한 통에서 비롯됐다. 다큐멘터리의 공동 제작자인 제스 윌킨스의 말을 빌려보자. “우리 제작사는 아주 많은 다큐멘터리의 아이디어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중 단 1퍼센트 정도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지요. 제이미의 이메일이 눈길을 끌었던 이유요? 일단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웠고, 제이미가 마치 영화 대본처럼 이야기를 써서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캐릭터와 대단한 스토리의 완벽한 조화였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를 연상시켰죠.”


그리고 우연히 이 다큐멘터리를 접한 연출가 조나단 버터렐이 제이미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제작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뮤지컬 <제이미>가 시작된다. 크리에이티브 팀을 꾸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뛰어다니던 조나단 버터렐은 음악감독 길레스피 셀러즈와 작사가 톰 맥크레이를 만나게 되는데, 셰필드에 위치한 크루서블 시어터의 예술감독이었던 다니엘 에반스가 제작을 맡기로 결정해 뮤지컬 <제이미>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드래그 퀸, 그 화려함의 이면


누군가는 미국의 유명한 서바이벌 TV 쇼인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를 통해 드래그 퀸을 접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드래그 퀸을 접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뮤지컬 관객들은 <헤드윅>이나 <프리실라>, <킹키부츠>를 통해 드래그 퀸을 간접 체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래그 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존재인데,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모든 드래그 퀸이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드래그 퀸의 쇼가 그저 예쁘게 여장한 남자들이 무대에 올라 예쁘게 춤추는 쇼가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히 하고 싶다. 형형색색의 가발과 진한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소 과장된 듯한 제스처로 공연하는 립싱크 쇼(드래그 퀸의 대표 쇼)는 겉보기엔 쉬워 보일지 몰라도, 내면의 깊은 곳에 침체되어 있는 가장 약한 나에게 가장 강한 내가 목소리를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들 앞에서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나를 드래그 퀸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무대 위의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래그 퀸 쇼에서 여성성이 표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드래그 퀸과 반대로 여자들이 남장을 하는 공연 드래그 킹 쇼도 있는데, 이때 여성들은 남성 페르소나를 만들어낸 후 그 페르소나가 또 다른 여성 페르소나를 창조하기도 한다(이를 ‘더블 턴’이라고 한다). 따라서 드래그라는 장르는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이며, 누군가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자유이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경험이 된다. 


극 중 제이미 뉴도 마찬가지이다. 남들과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를 당당히 드러내며, 자신의 여성성을 표출하기 위해 드래그 퀸을 꿈꾸는 제이미는 그 과정에서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곤 자기 자신만의 진정한 드래그 퀸 페르소나 ‘미미 미’를 탄생시키게 된다.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인 웨스트엔드의 <제이미>


<제이미>가 공연 중인 웨스트엔드의 아폴로 시어터는 소호와 차이나타운이 만나는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제이미>가 오픈하기 전까진 할리우드 스타 시에나 밀러가 출연했던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공연한 곳으로, 웨스트엔드의 스테디셀러 <레 미제라블>의 이웃 극장이기도 하다. 1901년에 문을 연 오래된 곳인데, 애초에 뮤지컬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됐다고 한다. 그리스 예술의 신이자 뮤즈들의 리더인 아폴로의 이름을 붙인 극장인 만큼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내부에는 아폴로와 그 뮤즈들의 석상들이 장식돼 있다.


반면 <제이미>의 무대는 굉장히 현대적이다. 무대는 간단한 변화만으로 제이미의 교실과 집, 또 드래그 퀸이 운영하는 가게로 바뀐다. 영국 북부의 공업 지역 특성을 사각형의 디자인과 회색으로 표현한 듯 보였고, 복층 구조의 2층엔 7인조 밴드가 자리잡아 무대에서 배우들과 함께 숨쉬며 연주한다. 주로 회색을 사용하였지만, 가끔은 불투명한 판넬 사이로 화려한 조명들이 쏟아져 나와 드래그 퀸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실 <제이미>의 스토리는 어쩌면 전형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들이 있다. 주인공은 자신만의 꿈을 꾸지만, 그 꿈은 방해받는다. 그 과정에서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이 존재하는데, 무너지려는 주인공을 다잡아주는 멘토 캐릭터들로 인해 다시 꿈에 도전하고 결국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미>라는 뮤지컬이 날 놀라게 했던 점은 이런 전형적인 줄거리 속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인 제이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 않다.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을 꾸며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인물로 거듭난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갈등과 친구들과의 갈등 속에서도 스스로 작아지고 무너지기보단 더 당당하고 멋스럽게 그 갈등을 자신에게 맞게 해결한다.


반면 가족들과의 갈등은 꽤나 직설적이고 표면적이다. 제이미의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이혼했는데, 엄마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제이미를 위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지만, 아빠는 제이미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제이미의 어머니가 부르는 솔로곡 ‘He’s My Boy’는 세상의 어느 아들, 딸이 들어도 가슴이 저려오는 곡일 것이다.

이번 웨스트엔드 공연은 2014년 초연에서 주인공 제이미를 맡았던 존 맥크레아를 포함해 대부분의 초연 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한다. 제작 초기부터 함께해 왔던 그들이기에 연기, 노래, 안무, 앙상블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신나면서도 눈물 나는 공연을 보여준다. 주로 팝 스타일이면서도 각 캐릭터의 성격에 들어맞는 음악과 MTV 느낌의 영상 효과, 그리고 힙합과 현대 무용을 섞은 듯한 안무까지 세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으면서 나 자신을 어느 정도는 돌아보게 해준 공연을 만난 느낌이다.




극장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


공연을 보면서 문득 이런 느낌을 받았다. 어느 순간 객석의 관객 전체가 극에 몰입하여 같이 웃고 울면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단 느낌 말이다. 커튼콜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는데, 마치 무대 위의 배우들과 무대 뒤의 스태프들, 그리고 객석의 관객들까지 극장 전체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개개인이 집으로 가져가는 감정들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공연장에서 박수를 보내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무엇이었든 함께 공유하며 공연이 우리 자신에게 건네준 저마다의 감정을 즐기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 배우들에게 찾아가 이런 경험을 같이 공유해 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었을 만큼, 한 편의 사랑스러운 공연을 만난 것에 감사를 보낸다. <제이미>는 런던 아폴로 극장에서 4월 21일까지 공연될 예정이다. 일상적인 생활에 지쳐간다면 제이미의 이야기를 경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2호 2018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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