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살인이 현실로
제임스 맥티그 감독의 영화 <더 레이븐>(2012)은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그대로 따라 하는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다. 한때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술과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포. 그런 그에게 신문사는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자극적인 글만 요구한다. 그러던 중, 포의 소설 속 살인을 모방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포의 연인 또한 납치된다. 범인은 포에게 ‘당신의 뛰어난 추리 능력에 도전한다. 이 범죄에 대한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지 않으면 연인을 죽이겠다’는 편지를 남긴다. 그리고 살인 현장마다 연인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숨겨둔다. 포는 형사와 함께 살인마와 연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동시에 이 과정을 소설로 써 내려간다.
19세기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추리 소설의 발명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모르그가의 살인』, 『마리 로제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에 등장해 비상한 두뇌로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 뒤팽은 셜록 홈스 등 이후 등장하는 명탐정 캐릭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더 레이븐>에는 포의 단편 소설 『모르그가의 살인』, 『함정과 진자』, 『마리 로제 수수께끼』, 『적사병 가면』, 『발데마 사건의 진실』, 『아몬틸라도 술통』, 『어셔 가의 몰락』 등을 모티프로 한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실제 포는 살인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아내 버지니아를 일찍 병으로 떠나보낸 뒤 깊은 슬픔에 빠져 2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의 죽기 전 며칠간의 행방은 베일에 싸여 있는데, <더 레이븐>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픽션이다. 1849년 10월, 포는 볼티모어 거리에서 빈사 상태로 발견되었고,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숨을 거뒀다. “신이시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아르노 슈트로벨의 소설 『스크립트』(2012) 역시 소설 속 연쇄 살인이 현실화되는 이야기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납치한 여성의 피부를 벗겨 그 위에 소설을 써 보내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난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범행 수법이 『스크립트』라는 추리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모방한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이 이전에도 모방 범죄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당시 열성팬을 자처한 누군가가 작가에게 ‘당신의 소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도록 도와주겠다’는 편지를 보낸 뒤 소설 내용과 똑같은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소설과 범죄의 연관성이 분명해지자 작가, 담당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 서점 주인 등 이 사건으로 소설이 주목받을 경우 이득을 볼 수 있는 여러 인물이 용의자 선상에 오른다. 형사는 이들 사이를 오가며 범인을 밝히고 납치된 여성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스크립트』는 ‘소설 속의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독특한 삼중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스크립트』에는 등장인물 크리스토프 얀이 쓴 가상의 소설 『스크립트』가 등장한다. 얀이 쓴 『스크립트』의 주인공 역시 작가로, 그는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한 뒤 자신의 소설을 알리기 위해 인간의 피부 위에 소설을 쓴다. 두 가상의 작가는 모두 실패한 무명작가라는 설정을 공유하는데, 실제 『스크립트』를 쓴 작가 아르노 슈트로벨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장편 소설 『마구스』가 약 스무 군데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노 슈트로벨은 범죄를 일으키는 대신 직접 책을 출판했다. 책은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결국 대형 출판사의 눈에 띄어 7개국에 수출되는 히트작이 되었다.
소설 속 사랑이 현실로
영화 <루비 스팍스>(2012)는 자신의 이상형을 창조한 작가의 이야기다. 주인공 캘빈은 첫 소설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이후 연애와 집필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꿈속 여인 루비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소설을 쓰며 가까스로 창작의 희열을 되찾는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설 속 루비가 캘빈의 눈앞에 나타난다. 루비는 자신이 허구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캘빈의 진짜 연인처럼 행동한다. 캘빈은 믿기 힘든 기적에 기뻐하며 루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루비는 독립된 자아를 확립해 가고 캘빈과 부딪히는 일이 잦아진다. 결국 캘빈은 다시 타자기를 꺼내 자기가 원하는 루비의 모습을 써 내려간다. 현실의 루비는 캘빈이 쓴 소설대로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럴수록 둘의 관계는 꼬여만 간다.
<루비 스팍스>는 피그말리온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 속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주변의 문란한 여인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직접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한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 조각상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신화는 피그말리온이 인간이 된 조각상과 행복한 결혼을 올리는 걸로 끝나지만, <루비 스팍스>의 주인공 캘빈은 시련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연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 강요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며 맞춰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 루비 역으로 출연한 배우 조이 카잔은 이 영화의 각본가이며, 캘빈 역의 폴 데이노는 그의 실제 연인이다.
기욤 뮈소의 소설 『종이 여자』(2010) 역시 작가가 소설 속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실연의 슬픔에 빠져 상상력이 고갈된 베스트셀러 작가 톰. 그 앞에 갑자기 소설 속 등장인물 빌리가 등장한다. 빌리는 자신이 문장 허리가 뚝 끊겨 인쇄된 소설책 파본을 통해 현실로 굴러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헤어진 연인을 되찾게 도와줄 테니, 내가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게 후속작을 써달라’고 제안한다. 두 사람은 톰의 전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빌리를 현실로 끌어낸 소설책 파본이 한꺼번에 소각되자 빌리는 죽을 위기에 처한다. 톰은 빌리를 픽션의 세계로 돌려보낼 후속작 집필에 박차를 가하고, 톰의 친구들은 꺼져가는 빌리의 생명을 붙들기 위해 소각되지 않은 단 한 권의 파본을 찾아 나선다.
작가 기욤 뮈소는 이 환상적인 로맨스를 통해 책과 독자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톰은 상상의 세계가 작가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임을 피력한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가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이 여자』에서 빌리는 단순히 톰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생명을 얻지 못한다. 소설이 완성되어 독자들 손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상상의 세계가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함께 볼만한 작품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 평범한 국세청 직원 해롤드는 어느 날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해롤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소설가이며 자신은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구스범스>(2015) 작은 마을로 이사 온 잭의 옆집에는 베스트셀러 소설 『구스범스』의 작가가 살고 있다. 어느 날 비명소리를 듣고 옆집에 들어간 잭은 실수로 자물쇠로 잠겨 있던 책을 열어버린다. 그러자 책 속에 잠들어 있던 괴물들이 현실로 쏟아져 나온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4호 2018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