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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MeToo #WithYou 그리고 Musical [No.175]

글 |이수진(극작가·공연 칼럼니스트) 2018-05-04 4,628
“그리고 만약, 구역질나는
경찰서 불빛 아래,
너의 강간마 묘사가 네가
고해 중인 경찰과 비슷하다면, 
너는 삼킬래, 부인할래, 집으로
가며 거짓말을 할래?”





미투 운동의 인식 변화
오늘 한국의 미투 운동이 서 있는 지점은 대략 1972년 아드리안 리치가 ‘강간’이라는 시를 쓰던 그때다. 강간을 당한 사람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강간당하기 전의 인생이 얼마나 ‘순결함’을 유지했는지를 증명해야만 한다. 또한 강간으로 인해 받은 상처 때문에 앞으로 어떤 기쁨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치 산산이 부서져 웃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일그러진 얼굴과 불안한 눈빛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 강간 가해자는 피해자와 연인 비슷한 것이었다고 우기거나, 피해자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어떻게 ‘안 돼요’를 외치며 교태를 부렸는지를 묘사하며 누구라도 같은 처지였다면 그리했을 거라며 항변한다. 피해자는 강간의 모든 순간을 경찰 복장을 한 사람 앞에서 낱낱이 고해야만 한다. 몇 번을 물어도 혼동이 없어야 하며, 매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하면 그 순간 ‘꽃뱀’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아니, 그 책상 앞에 앉는 순간부터 이미 피해자의 죄는 정해져 있다. ‘강간을 당한 죄’. 현재 대한민국의 미투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상황이다. 게다가 언론은 멋대로 피해자의 고통에 순위를 매기려 들며 관음하듯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묘사를 통해 클릭 수를 올린다. 현재 한국의 미투가 무언가에 일조한 게 있다면 우선 성추행, 강간을 하는 가해자들의 ‘멀쩡함’에 대한 환기일 것이다. 섹스에 환장하여 침을 흘리며 충혈된 눈으로 어두운 골목을 헤매는 변태가 아니라 지나치게 멀쩡한 직업과 권력을 손에 쥐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하는 자로서의 가해자에 대한 인식이 비로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브로드웨이에 미투 운동이 가져온 변화
할리우드의 미투가 무서운 속도로 번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성추행과 성폭행이 수면 위로 올라왔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반면 브로드웨이의 미투는 지지하는 배우나 스태프의 숫자는 많은데 비해 고발당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현저하게 적다. 2017년 11월 <킹키부츠>의 캐스팅 디렉터였던 저스틴 허프가 성추행을 해왔다는 미투를 통해 곧바로 해고되었고, 최근에는 브로드웨이 제작자 협회장이자 디즈니 시어트리컬 프러덕션의 대표인 토마스 슈마허가 성추행으로 지목됐지만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버티고 있다. 얼굴을 마주보며 매일 한 공간에서 공연하고 연습하고 공연이 끝나도 여전히 그 관계가 이어지는 일종의 거대한 패밀리 같은 브로드웨이 공연계의 특성 때문일까, 브로드웨이 미투의 영향은 인적 쇄신이 아닌 콘텐츠 쇄신으로 기울고 있는 양상이다. 사회적인 현상이나 새로운 시류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늦고 보수적인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신작보다는 공연 일정이 확정된 리바이벌 공연이 우선 그 대상이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이 방면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은 <마이 페어 레이디>와 <캐러셀(Carousel)>, <프리티 우먼>으로 여성 캐릭터가 모두 남성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중 탈출이 가장 용이한 작품은 의외로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원작으로 한 <마이 페어 레이디>다. 뮤지컬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히긴스 박사에게 교육을 받은 일라이자가 굽히고 들어와 명령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 앞의 내용을 보자면 여성이 교육을 바탕으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고민은 1990년에 개봉한 영화를 바탕으로 한 신작 <프리티 우먼>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를 모티프로 하는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부자 남성이 길거리에서 산 매춘부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한다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비비안이 에드워드를 만나기 전부터 매춘을 그만둘 결심을 하는 의지가 강한 인물로 각색 중이라고 알려졌다. 리드 제작자인 폴라 와그너가 여성으로서 이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현재 브로드웨이에서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내용을 고민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특정 작품이 아닌 대다수의 작품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미투가 브로드웨이의 콘텐츠를 바꾸고 있다.




관객의 힘으로 시작된 국내 미투 운동
국내 연극계와 뮤지컬계의 미투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이 고발들이 트위터 같은 개인 SNS가 아니라 관객들의 사이트인 ‘연극뮤지컬갤러리(일명 연뮤갤)’라는 익명 게시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연극에 비해 상업적인 시스템을 갖추며 발전해 온 뮤지컬계에서는 연출가도 그저 고용인의 일부일 뿐이다.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은 제작자들이지만, 뮤지컬 제작자들은 최근 문제가 된 연극 극단들의 대표들처럼 작은 연못의 제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성추행이나 폭행이 없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겠지만, 유난히 뮤지컬계에서 배우들의 미투 고발이나 ‘위드 유’ 선언조차 흔하지 않은 것은 캐스팅 배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남성이라는 점이 그 유추에 힘을 실어준다.

상대적으로 조용해 보이는 뮤지컬계지만 브로드웨이와 마찬가지로 인적 쇄신보다 작품 내용 쇄신의 조짐이 보인다. 최근 재공연이 올라간 <삼총사>는 개막 전 마초를 상징하는 캐릭터 포르토스의 캐릭터를 바꿀 예정이라고 공표했으며, 지나치게 잔인한 강간 장면이 늘 지적을 받아왔던 <맨 오브 라만차>도 해당 장면 수정을 선언했다. 그동안 내내 관객들이 지적해 왔어도 바뀌지 않았던 내용이 미투 운동 이후 바뀐 것은, 뮤지컬 관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관객의 의견을 이제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이를 통해 미투 운동을 덮고 관객을 달래면서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뮤지컬계 전체를 암흑기로 몰아넣는 상황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관객은 여성들이지만 작품을 선정하고 제안하는 제작자들은 거의 남자들인 뮤지컬계에서 여성 관객들은 주어지는 작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투 운동 이후 관객과 제작자의 콘텐츠 선택 사이의 극심했던 불균형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조짐이 보이는 것도 미투 운동의 성과다. 미투 운동을 통한 변화들이 지속된다면 관객들은 더욱 다양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뮤지컬 무대에서 볼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뮤지컬계는 위기를 넘어서 더 큰 시장을 형성할 수도 있다. 미투 운동은 여성만이 아닌 모든 억압받는 존재들을 위한 것이지만, 단언하건대 그중 최소한 9할은 여성이기에, 오늘도 Me Too, 그리고 With You.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5호 2018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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