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SPAF, 축제 가을이 깊어지는 순간
<한여름밤의 꿈>
누구에게나 ‘가을이 오는 순간’이 있다. 한풀 꺾인 막바지 더위의 끝에 찾아온 빗소리, 꽃집 앞 양동이에 담겨 코끝을 자극하는 국화 향, 늦은 밤 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 개인적으로는 대학로 게시판에 알록달록한 공연 축제 포스터들이 눈에 띄기 시작할 때, “아, 올해도 가을이 왔구나”를 느끼곤 한다. 여름내 지방 곳곳에서 펼쳐진 축제들이 막을 내리고 마로니에 공원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며 계절의 변화를 알릴 무렵, 해마다 이맘때면 연극/무용 애호가들의 발길이 바빠진다. 국내외 연극과 무용, 음악극 등 다양한 공연 예술 장르를 아우르며 다채롭고 풍요로운 공연의 성찬을 마련해 온 SPAF(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10월 7일부터 11월 4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과 대학로예술극장, 그리고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개최되는 2018 SPAF는 ‘회고와 전망(Retrospect and Prospect)’을 주제로 세르비아, 리투아니아, 벨기에, 프랑스, 핀란드 등에서 찾아온 해외 초청 공연과 공모를 통해 선정된 국내 초청 공연, 그리고 창작산실/서울연극제와의 협력 프로그램 및 한국과 싱가포르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글로벌 커넥션 프로그램 등 총 8개국에서 마련한 22개 작품을 선보인다. 또한 축제 기간 중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공연 예술 마켓인 2018 서울아트마켓도 함께 열려 세계 공연 예술의 현주소와 흐름을 확인하고 서로의 정보를 공유, 소통하는 장으로 기능하고자 한다.
도도히 흐르는 발칸의 역사
올해 SPAF를 여는 개막작은 세르비아 국립극장이 선보이는 연극 <드리나강의 다리>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이보 안드리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400년간 이어진 발칸의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무대 위에 압축적인 이미지로 담아낸 작품이다. 유럽의 가장 동쪽인 동시에 아시아가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발칸 반도는 지리적 특성상 유럽과 아시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의 언어 및 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다. <드리나강의 다리>는 그중에서도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굴곡 많은 역사를 겪어야 했던 보스니아 비셰그라드의 한 다리를 배경으로, 도도히 흐르는 400년 발칸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그려낸다.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담은 이 대서사시를 연출가 코칸 믈라데노비치는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무대 위에 장엄하고 세련된 이야기로 펼쳐낸다. 특정 주인공이나 주요 사건 없이 펼쳐지는 원작의 구조를 독백과 노래, 기도문 등 다채로운 형식과 라이브 음악을 통해 압축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및 20세기의 내전 등 현대사의 비극적인 장면들을 포함시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발칸의 역사를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메도우, 메도우, 메도우>
여전히 새롭고 흥미로운 체호프
해마다 다양한 작품들이 SPAF를 찾아오지만, 그중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가라면 역시 체호프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올해도 연극 강국 리투아니아에서 찾아온 연극 <갈매기>가 초스피드로 전 석 매진을 기록하며 체호프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여전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갈매기>는 관객뿐만 아니라 연출이나 배우, 스태프 등 연극인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인데, 그 이유는 이 작품 자체가 바로 ‘연극에 대한’, 그리고 ‘연극을 위한’ 연극이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가 연출한 OKT/빌뉴스시립극단의 <갈매기>는 이 작품이 연극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 주목, 화려한 의상이나 무대, 극적인 갈등이 아니라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와 연극을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고전에 대한 현대적이고 파격적인 각색으로 유명한 연출가 코르슈노바스와 OKT/빌뉴스 시립극단 배우들의 단단한 연기가 어우러져 폴란드 콘탁 페스티벌 및 골든 크로스 어워즈 등 유럽 유수의 연극제에서 이미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최고 연출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드리나강의 다리>
세 가지 빛깔로 그려내는 초원
올해 SPAF 무용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매진된 <메도우, 메도우, 메도우>는 핀란드와 아일랜드의 서로 다른 예술가들이 각자의 예술적 상상력과 다양한 매체를 결합해 만들어낸 3편의 아름다운 무대로 이루어져 있다. 2015년 핀란드 현대무용의 중심지인 조디악센터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핀란드의 안무가 겸 무용수 엘리나 피리넨과 마리아 사이보살미, 아일랜드의 무용가 루에이리 도노반과 케시 윌시가 공동으로 창작했다. <메도우, 메도우, 메도우>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섬세하고 아름다운 3개의 각기 다른 초원(Meadow)을 각각의 예술가들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형태로 그려낸다. 표현 형식에도 단순히 안무와 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신체, 보컬, 미디어, 시각 등을 사용하면서 이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제시함으로써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다원 예술적 성격을 띤다.
<갈매기>
동시대 한국 공연의 다양한 스펙트럼
이번 SPAF 공모를 통해 선정된 국내 초청작들 역시 해외 초청작만큼이나 다채롭고 흥미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리스 비극이 현대 한국에서 어떻게 재창조되는지 보여주는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한국의 전통 연희와 탈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한여름 밤의 꿈>, 루쉰의 소설을 바탕으로 동시대 한국 사회 속 광인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 극단 신세계의 <광인일기>, 북한 무용의 형식을 차용해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안은미컴퍼니의 <안은미의 북한춤>, 현대무용의 판소리 흉내 내기를 통해 고전과 현대성을 동시에 보여주고자 하는 리케이댄스의 <발림> 등 동시대적 의미와 새로운 실험적 형식을 갖춘 다양한 연극, 무용 작품들이 관객들을 기다린다. 또한 2018 서울연극제 대상 수상작인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와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 선정작인 <더 헬멧>을 축제 기간 중 다시 무대에 올림으로써 SPAF를 일회적인 축제가 아니라 올 한 해 국내 공연 예술계의 흐름과 맥락 속에서 유의미한 연결점이 되도록 배치한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1호 2018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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